#37화
한국 자본총액 기준 재계 서열 1위 태선그룹의 주가는 연일 우상향 중.
예금 금리를 챙길 바엔 태선의 주식을 사라는 말이 나올 정도니까.
그러던 중 날벼락이 떨어졌다.
‘한성제철 부도, 최고 은행 지급불능 상태’
처음 사람들은 저 말을 믿지 않았다.
한성제철 같은 대기업이 부도라니.
하지만 한성제철의 매출 중 절반 이상이 내부자거래였다는 자료와 기사가 쏟아지고.
사람들은 그제서야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성그룹의 회장 정한수는 사실이 아니라며 강력하게 부인했지만 소용없었다.
끊임없이 나오는 비리와 증거들.
한성제철과 연결되었던 최고 은행은 도산했고, 한성사태를 보고 심각함을 느낀 여러 은행들은 자금 회수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은행의 압박.
은행들은 한성사태에 위기감을 느끼고 기업들의 대출금 지급일을 더 이상 연장해주지 않았다.
부채비율이 높고 단기성 채무가 많던 기업들은 그렇게 줄줄이 파산했다.
강빈의 말을 미리 들었던 진태는 채규에게 태선그룹과 한성그룹의 유착관계에 대한 추측성 기사를 막으라 미리 지시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태선그룹 회장 서진태가 직접 나서서 해명을 하라는 여론이 들끓었다.
국가적 위기의 주범으로 몰릴 위기에 처하자 진태는 자신의 저택으로 주요 계열사의 임원들을 불러 모았다.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진태의 저택에 고급 승용차들이 즐비했다.
넓디넓은 저택에 도착한 임원들은 빠르게 집 안에 위치한 회의실로 모여들었다.
스무 명이 앉을 정도의 긴 테이블엔 이미 임원들로 꽉 찼고 늦게 도착한 몇몇 임원들은 뒤에 서서 진태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2층에서 내려온 진태가 자리에 앉자마자 먼저 입을 뗐다.
“현 상황을 타개할 만한 생각이 있으면 누구든지 말해 봐.”
모두 진태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태선전자의 자회사, 태선메디슨의 김채중 사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태선의 모든 계열사의 주가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습니다. 계열사 몇 개가 주춤한 적은 있어도 이런 적은 없습니다. 청와대 측에 연락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김사장아.”
“네?”
“안 해봤을 것 같냐? 그걸 말이라고 해?”
진태의 말에 좌중의 분위기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청와대 측에서도 모른척하는 상황이라는 말에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김채중 사장을 끝으로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자 진태가 자신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던졌다.
찻잔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깨진 찻잔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영만이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할 말이 있어서 일어난 거지? 말해 봐.”
“아, 아닙니다.”
재빨리 자리에 앉는 영만을 보고 진태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도 없어? 재만이 네가 말해봐라.”
“저는….”
재만이 하는 수 없이 말을 꺼내려 할 때 채규가 급하게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한성그룹 최종 부도처리 됐습니다.”
“정한수 그 새끼는 잡았어?”
진태의 목소리가 더없이 차가웠다.
정한수를 잡는다고 바뀌는 것은 없겠지만 분풀이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공항과 주요 부두 쪽은 전부 조치를 취했습니다만… 아직 연락은 없습니다. 이미 떴을 수도 있습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진태의 눈치를 살폈다.
진태가 갑자기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개같은… 참고인 조사는 피할 수 없지?”
“네… 정한수가 빨리 잡히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검찰 총장한테는 연락해봤고?”
“보고드리기 전에 하고 오는 길입니다. 사안이 너무 큰 사안이라… 힘들 것 같습니다.”
직접 투자에 가담한 건 아니다.
그러니 단순 조사에 그칠 것이다.
그러나 태선이 그토록 견고하게 쌓아 올렸던 명예에는 금이 간다.
진태는 한숨을 내쉬며 좌중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쳐다봤다.
“내가 갖다 바친 돈만 해도 얼만데, 이 새끼들이…”
목적어가 불투명한 진태의 말에 아무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
태선보험이 홈쇼핑에 진출하는 날이 되었다.
영만은 미리 촬영장에 와 있었다.
“강빈이 왔구나.”
“안녕하세요. 그런데 시간이 되셨네요? 태선그룹 전체가 비상이던데.”
한성그룹이 부도를 낸 이후 임원회의가 잦아졌다.
준만도 최근 임원회의에 간다면서 아침 일찍 나갈 때가 많았다.
영만이라고 다를까 싶었다.
“하하. 바쁘기는 하지. 그래도 사람들이 태선보험은 변함이 없네.”
뭔일 날 일이 뭐가 있다고.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그리고 첫 방송인데 사장이 직접 와서 격려를 해야지.”
조용히 옆에 서 있던 조용기 부장이 눈에 띄었다.
영만이 옆에 있어서인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영만이 이곳에 온 것은 뻔했다.
격려는 무슨.
첫 방송이니까 자세히 보기도 하면서 쇼호스트로 선 조부장을 감시하는 겸 압박하기 위해서겠지.
“잘됐네요. 홈쇼핑의 위력 직접 보시면 좋을 겁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영만의 옆에 나란히 섰다.
조명과 카메라 세팅이 끝나고 조부장이 무대 위에 올랐다.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자 촬영팀의 막내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외쳤다.
“슛 들어가겠습니다!”
조부장은 언제 긴장했었냐는 듯 얼굴이 바뀌더니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암의 종류가 약 300여 가지입니다. 자, 모든 암 다 보장해 드릴게요. 앞으로 나타날 수 있는 신종 암까지 다 포함해서 말이죠. 모든 암 보장…”
조부장은 과장된 내용을 섞어가며 능글맞게 잘 이어나갔다.
화면 하단에 표기된 전화번호는 태선보험의 상담원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디어 방송이 끝나고.
곧장 영만의 전화벨이 울렸다.
통화하는 영만이 크게 웃었다.
“신규가입자가 2만 명이 넘었다네? 하하.”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나쁘지 않은 조건이고, 그동안 해왔던 영업이랑 스케일이 다를 거라고.”
단기간에 이만한 수량의 계약을 따냈다는 사실에 영만은 많이 기뻐 보였다.
하기야 그동안 광고도 해왔을 테지만, 이 정도의 효과는 없었을 테니.
“진작 제안할 걸 그랬어. 정기적으로 보험광고를 내줄 테니까 일정 잡아놔.”
역시나 뻔뻔한 사람이다.
지금 누가 우위인지 모르는 건가?
“다음 번이라니요? 이미 다음 달까지 일정이 다 잡혀있습니다. 추가방송을 원하시면 다시 계약하세요.”
“뭐?”
급하게 나를 다잡고 말을 이어가려던 영만을 제지하고, 내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해성이었다.
“네. 홍사장님.”
“서대표님. 현장에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사무실에 있는데, 이미 확인하셨을 테지만 이번 방송 역시 대박인 것 같습니다. 태선보험에서 실시간 전화가 쇄도 하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습니다. 사실 지금 모지해상과 삼운손해보험 측에서 계약 가능하냐는 연락이 왔습니다. 아무래도 태선 보험의 방송을 본 것 같습니다.”
“네, 직접 만나보고 계약 내용 따져서 홍사장이 판단해서 결정 내리세요.”
“네 알겠습니다.”
초조하게 전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영만이, 모지해상과 삼운손해보험이란 말에 아연실색했다.
그런 영만을 향해 한 번 더 말해줬다.
“모지해상과 삼운보험 측에서 연락이 왔다고 하네요.”
“서강빈. 지금 뭐 하는 게냐. 태선보험이다!”
“행복홈쇼핑은 태선과 관계없습니다. 제가 대표도 아니구요. 나머지는 홍해성 사장과 얘기하십시오.”
“너…!”
끝난 방송에 태선보험 관계자들과 직원들이 판넬과 사은품을 치워댔다.
그리고 다음 방송상품인 듯한 화장품 가득 든 박스가 줄줄이 들어왔다.
“큰아버지. 이번에 매출이 크게 오르겠어요. 축하드립니다.”
여전히 얼빠진 영만을 뒤로 하고 스튜디오를 나왔다.
***
8시간의 참고인 조사를 마친 진태.
조용히 검찰정을 나왔다.
짙은 다크서클에 피곤함이 느껴졌지만, 걸음걸이만은 당당했다.
열댓 명의 보디가드들이 일제히 진태를 감쌌고
대기하고 있던 인파들 사이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탁.
어디선가 날아온 달걀이 보디가드의 어깨에 떨어졌다.
줄줄 흘러내리는 달걀물.
잠깐 걸음을 멈춘 진태.
달걀이 날아온 방향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쏟아지는 야유에도 진태는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한참을 서 있던 진태.
기자들과 진태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채규가 그런 진태에게 다가가 조용히 귓속말을 하고, 그제서야 진태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까맣게 썬팅된 차에 진태가 오르고 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채규가 물을 건넸다.
“고생하셨습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멀건 국밥 주길래 먹는 시늉만 했지. 보는 눈이 있으니 참아달래.”
“회장님 도착하는 시간 맞춰서 바로 식사하실 수 있게 저택에 연락하겠습니다. 별다른 일은 없으셨습니까?”
“할 게 있나. 대본은 이미 줬고, 나야 시간만 보내다 왔지. 이런 촌극도 오랜만이네.”
차를 둘러싼 인파에 차가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했다.
보디가드들이 차를 둘러싸며 조금씩 길을 텄다.
“저놈들은 뭘 안다고 저 난리야?”
“회장님이 검찰청에 들어가시고 기사가 났습니다.”
“기사?”
“네. 정한수가 한국을 뜨기 전에 회장님과 접촉했던 정황과 검찰의 피해자 조사에 따르면, 회장님 역시 정한수와 함께 공동 투자를 진행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참고인 조사를 받게 된 것도 한몫했고요.”
“이런… 그 기사 쓴 놈이 누구야?”
“한국 쪽 언론은 통제했었는데… 시작은 상해일보 쪽에서 나왔답니다. 다른 언론사들도 눈치를 보다가 결국 기사를 냈고요.”
“중국이면 지왕신 쪽이겠구만. 이번 기회에 나를 묻으려고 작정을 했어.”
지왕신.
현재 중국 3위의 전자회사.
지왕신은 태선을 굉장히 싫어한다.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중국진출을 한 태선전자로 인해 자신들의 매출이 꽤 하락했기 때문이다.
당장 자국 기업과의 경쟁도 힘든 와중에 이웃 나라 한국과의 경쟁이니 더욱이 열받았을 테고.
그런 태선과 진태를 묻을 건수를 마련했는데 당연히 모른척했을 리가 없다.
“재만이에게 힘 더 실어. 그놈들 확실하게 짓밟아.”
“네, 전달하겠습니다.”
“못하면 전자 내놓으라 해. 자리만 주면 목숨 바치겠다는 놈들 천지에 널렸는데.”
말은 매몰차게 했지만 당장 뭔가를 하긴 쉽지 않다는 거 진태도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태선전자 불매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성그룹이 완전히 부도가 나면서 그동안 지속되었던 여러 경제 문제들이 슬슬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고.
누군가가 오롯이 만들어낸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탓할 사람을 필요로 했다. 정한수는 이미 해외로 도피했고, 사람들은 다음 타깃을 진태로 삼았다.
“우선은 언론 쪽 통제 확실하게 해. 지금부터 태선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 내는 놈들은 싹 다 태선그룹과 연 끊는 것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전해.”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그리고 회장님 나오시기 직전에 이종환 검찰청장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오늘을 끝으로 회장님 혐의는 완전히 없는 걸로 가겠답니다.”
“그래야지 지가 받아먹은 게 있는데.”
“네. 예상했던 것보다 사건이 커지긴 했지만 곧 잠잠해질 겁니다.”
정계 위쪽에 돈 몇 푼 쥐여주고 언론은 통제하면 끝날 일.
상해일보 역시 해외 쪽 언론이니 지금 당장은 터졌던 거지만 곧 잠잠해질 거고.
진태는 처음 문제를 제기하고 투자를 철회시키게 만들었던 인물을 떠올렸다.
“조만간 강빈이를 만나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