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대표님.”
비서실에서 황비서에게 연락이 왔다.
태선증권사에 있더라도 황비서에게 대표라고 부르라고 지시했다.
이제 태선증권사 자체 일보다도 외부의 일이 더 많으니 혼선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서영만 사장님의 비서라는 분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바로 연결해.”
연이은 사업 성공이 큰아버지들에게 큰 경각심을 줬다는 건 알고 있었다.
또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는 건 태선 창립기념회에서도 충분히 느꼈으니까.
재만의 경계 어린 눈빛은 특히나 눈에 띄었다.
진태 다음으로 가장 권력이 있다는 사람이 저렇게 표정 관리 하나 못 하다니.
거기에 비해 오히려 영만이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런 영만이 내게 먼저 연락을 한 건 더욱 의외였다.
태선가의 삼남. 서영만.
현재 태선보험을 이끌고 있고, 보험을 이끌어가는 그의 능력 역시 나쁘지 않았다.
보험사 업계 1위도 매년 놓치지 않을 정도로 탄탄했으며 태선전자에서도 태선보험이 꽤 많은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수신 전환 버튼을 누르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강빈 본부장님 맞으십니까?”
“네. 맞습니다.”
“네. 저는 서영만 사장님의 비서 정명한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통화내용은 간단했다. 영만이 나를 불렀다고.
“알겠습니다. 시간은 언제가 괜찮습니까?”
“다음 주 월요일 3시입니다.”
골라도 바쁜 시간대였다.
그런 걸 다 떠나서 굳이 내가 영만의 시간에 맞출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제가 시간이 안 됩니다. 다음 주 수요일 오후 4시에 방문하겠다고 전달하세요.”
“네?”
“그 시간이 아니면 저도 만나기 어렵다고 전달하세요. 그럼 끊겠습니다.”
“아니, 저기…”
빠르게 전화를 끊었다.
영만에게 직접 온 전화라면 이런 식으로는 대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서를 통해서 내게 통보식이라니.
초반의 기세가 중요하다.
한번 굽히고 들어가면 당연하다고 여길 것이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황비서를 통해 다시 연락이 왔다.
“대표님. 이번엔 서영만 사장님께서 직접 연락이 왔습니다.”
“하… 연락해.”
곧이어 영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우리 조카님이 요새 바쁘신가 보네. 다음 주 월요일에 시간이 안 된다면서?”
명한에게 곧장 보고를 받았는지 영만이 직접 전화를 걸었다.
묘한 기 싸움이다.
“아닙니다. 셋째 큰아버지께서 보자고 하시면 시간 내야죠.”
“아니다, 바쁜 사람 나한테만 맞춰서 오라 가라 했네. 언제든지 오기만 하면 상관없지, 하하.”
영만의 시원한 웃음이 들렸다.
잘 포장했지만 가식적인 목소리였다.
영만은 참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다.
서강빈으로 다시 태어난 뒤에는 많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지만, 지난 삶에서 미디어와 소문을 통해 들었던 그의 이야기는 참 대단했다.
‘호탕함과 소박함으로 무장한 태선의 악마’였나?
유한 성격. 대학교 강연까지 나갈 정도의 재치 있는 입담. 소탈한 이미지의 재벌.
기사가 터지기 전까지 영만이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인식이였다.
“월요일 3시까지 제가 태선보험사로 찾아가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어? 하하. 그나저나 요새 어떻게 지내니? 가족들은 잘 지내고?”
“저는 바쁘게 지내서 가족들 소식은 잘 모르겠습니다. 제 아버지께 직접 물어보시는 게 나을 것 같네요.”
“가족들 소식까지 모를 정도로 바쁘다는 거야? 하하.”
말끝마다 웃음소리를 붙이니 거슬렸다.
누가 봐도 어색한데.
왜 사람들은 호탕하다는 거야?
평소에 전혀 연락이 없다가 갑작스레 가족들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도 뻔했다.
“그보다 최근에 회장님을 봤다면서?”
역시 목표는 이쪽이었다.
영만이 진태의 이야기를 꺼낸 건 단순하다.
후계 자리에 욕심이 많으니까.
서민들과 사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구축한 것도 그런 욕심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결국 퇴사한 임직원들의 잇따른 제보로 그의 다른 이면이 밝혀지긴 했지만…
진태가 세상을 떠나고 회장 자리가 공석일 때, 영만은 태선전자의 이사회를 설득하기 위해 각종 로비를 통해 지분을 확보하려고 노력했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그는 모든 힘을 다해서 재만과 경쟁했고 패했다.
결과적으로 각종 뇌물 수수와 비리, 청탁, 임직원 폭언 및 폭행 등이 밝혀지면서 징역을 살게 되지만…
물론 후계 자리에서 졌기 때문에 사실과 다른, 만들어진 이미지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방심할 만한 상대는 아니라는 것이다.
“회장님을 뵙기는 했는데 별 대화는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뵈러 갈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만나고 싶다고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잖아요?”
“아, 그래? 하긴 회장님이 쉬운 분은 아니시지. 나도 만나기 힘들다니까? 하하.”
영만의 웃음소리가 과장되게 들렸다.
쓸데없는 소리에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말을 끊었다.
“저 이제 일 보러 가야 합니다.”
“아이고, 조카님이 바쁜 걸 잊고 있었네. 하하. 그래. 일 보러 가.”
“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영만은 나를 부르는 이유는
나와 진태의 관계를 파악하고, 정보를 얻으려는 의도.
사람들은 속을 알 수 없다고 했지만,
글쎄.
내 눈엔 뻔했다.
영만이 원하는 정보는 주지 않으면서 나에게 필요한 것만 빼 오면 될 일이다.
***
“대표님. 도착했습니다.”
“그래. 근처 주차장에 있으면 연락할게. 대기하고 있어.”
“네. 알겠습니다.”
얼마 전 임기사와 황비서에게도 휴대전화를 하나씩 선물했다.
태선보험사 바로 앞에서 세웠기 때문에 곧장 들어갈 수 있었다.
프론트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태선증권사의 서강빈 본부장입니다. 서영만 사장님과 약속을 잡았습니다.”
“아, 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여자가 서둘러 전화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중년의 여자가 나타났다.
“서본부장님? 전에 연락드렸었던 비서 정명한입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비서의 안내로 곧장 최상층에 있는 영만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문을 노크하며 말했다.
“서강빈입니다.”
“그래. 들어와.”
집무실에 들어가자 갈색 가죽 소파에 편하게 몸을 기대앉아있는 영만이 보였다.
한가한 시간은 아닐 텐데, 일부러 이런 이미지를 연출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앉으렴.”
영만의 말에 그의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가까이서 마주 보니 부드러운 인상과 달리 눈매는 찢어져서 날카로웠다.
나중에 인상을 바꾸기 위해 눈을 수술했다는 풍문이 있었는데, 지금 찢어진 눈매를 보니 그냥 나온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자리에 앉고 영만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하하. 큰아버지가 조카 얼굴을 보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냐?”
내가 말없이 가만히 있자 영만이 이어서 말했다.
“네가 새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큰아버지가 돼서 아직 도와주지도 못했네. 필요한 건 없고?”
웃음이 나올 뻔했다.
내가 도와달라고 했었나?
도와주지 않아도 잘될 사업이었고.
GB택배와 홈쇼핑 사업 모두 잘 되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괜찮습니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네가 이번에 시작했다는 홈쇼핑에 우리 보험상품을 팔아보면 어떠냐.”
영만이 인심 쓰듯 말하는 모습이 어이없었다.
마치 자신이 도와주는 듯이 말하고 있지만 사실 보험상품이 홈쇼핑에 출연하게 되면 태선 보험에 가장 이득 아닌가.
홈쇼핑의 이점은 김희선 가방을 통해 충분히 증명됐다
내가 곧장 답하지 않자 영만이 이어 말했다.
“수수료는 대충 월납액의 200프로 정도면 되겠지? 우리 보험사 내에서도 제일 잘나가는 암보험을 내걸어 줄게. 업계 1위의 1위 상품이라고. 하하.”
내가 여전히 아무 표정도 아무 답도 없자 영만이 머쓱한지 뒷머리를 긁었다.
홈쇼핑 상품으로서의 보험.
나쁘지 않는 제안이다.
홈슈랑스라는 말이 떠올랐다.
아직은 쓰지 않는 말이지만, 홈슈랑스는 ‘홈쇼핑’과 ‘보험(insurance)’의 합성어이다
홈슈랑스라는 말처럼,
보험과 홈쇼핑은 속성이 잘 맞았다.
말한 대로 업계 1위의 1위 상품을 하게 되는 홈쇼핑.
그리고 그 뒤로 판매가 성공된다면 줄줄이 들어오게 될 다른 보험사들의 제안.
거기다 재고가 있는 상품도 아니니 수익은 결국 홈쇼핑에서 하기 나름.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월납액의 200프로는 약하다.
“큰아버지. 저는 수수료로 월납액의 500프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500프로?”
유한 표정을 유지하던 영만의 표정이 일순 험악해졌다.
“강빈아. 너, 큰아버지 상대로 장사라도 하려는 거냐?”
이내 다시 원래 표정으로 돌아온 영만이 당황스럽다는 말투로 물었다.
“큰아버지가 저를 상대로 사업하시려는 거 아닙니까. 저를 도와주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200프로라뇨. 저희 채널의 시청자는 적어도 수십만 명입니다. 첫 방송 때는 백만을 넘겼고요. 1:1로 영업하는 형식이 아닌 한 번에 1대 수십만을 상대로 영업하는 겁니다. 영업효율을 생각하시면 절대로 500프로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영만이 장사라도 하는 거냐며 반발했지만 사실 월납액의 500프로면 그리 높은 수수료도 아니었다.
지난 삶, 손해보험을 상대로 월납액 1000프로가 넘는 홈쇼핑 채널도 있었으니까.
“흠…”
영만도 고민이 되는지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500프로는 너무 비싸다. 아니면 관리자비나 중간 수수료는 네가 낼래?”
살짝 공격적으로 변한 영만의 말투.
그건 그렇고, 관리자비와 중간 수수료를 홈쇼핑이 부담하면 남는 게 뭐란 말인가.
“큰아버지. 저희 행복홈쇼핑은 현재 유일무이한 홈쇼핑 채널입니다. 독점 사업이라는 말입니다. 게다가 첫 상품이 대박이 나면서 인지도 역시 계속 상승 중입니다. 그리고 행복홈쇼핑은 태선그룹의 계열사가 아닙니다. 언제든지 다른 보험사와 컨택할 수도 있습니다.”
“뭐, 뭐? 다른 보험사?”
당연히 자신과 계약을 하는 줄 알았나 보다.
조카한테서 수수료 낮출 생각뿐인 사람이 뻔뻔하기는.
내가 대뜸 다른 보험사를 언급하니 많이 당황했는지 영만은 말까지 더듬었다.
“마지막으로 제안 드리겠습니다. 수수료는 월납액의 400프로. 대신 기타 수수료들은 태선보험 측에서 해결해주세요.”
부자연스럽게 웃어대며 말을 걸던 영만이 한참 말이 없었다.
한참 생각하는 듯한 그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던졌다.
“큰아버지 입장에서도 전혀 손해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존 보험설계사보다 적은 수수료로보다 많은 고객들을 유치할 수 있으니까요. 고민할 게 있습니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영만이 고민하는 것도 사실 어느 정도 이해 갔다.
홈쇼핑 채널의 수수료가 지금은 정립되지 않은 시기이고, 태선보험은 홈쇼핑에 진출하는 최초의 보험사이니까.
영만은 보험상품이 홈쇼핑 나왔을 때 수익이 좋지 못할 때를 대비하기도 해야 했지만, 홈쇼핑에서 대박이 나더라도, 이후까지 생각해서 미리 수수료를 적게 선정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고.
하지만, 누가봐도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은 제안.
고민을 끝냈는지, 영만은 고개를 들어 말했다.
“알았다. 수수료로 월납액의 400프로로 하지.”
나이스.
사실 처음부터 목표했던 건 400프로였다.
그래서 일부러 처음부터 높은 숫자인 500프로를 제시했다.
그 뒤로 400을 제시하면 영만의 입장에선 내가 낮춰주고 있다는 생각도 들 것이고,
처음 제시했던 금액에 비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할 거고.
“계약에 대해서는 홍해성 사장한테 연락이 올 겁니다. 쇼호스트는 큰아버지께서 실력 있는 영업사원으로 한 명 선정해주세요.”
“하하. 좋다. 내 조카를 위해 한 번 힘써주마. 앞으로 잘 부탁한다.”
마지막까지 어색한 웃음을 짓는 영만.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맞잡고 씨익.
같이 웃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