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나른한 토요일 오후, 오랜만에 소파에 앉아서 TV를 틀었다.
드디어 오늘 홈쇼핑이 첫 방송 되는 날이다.
강남의류에서는 남은 가방의 재고가 골칫덩어리였는지 저작권과 남은 재고를 판매가보다 훨씬 저렴하게 양도했다.
처음 기획 단계를 거치고 이후 남은 기획은 해성에게 맡겼기 때문에 나도 어떻게 방송이 진행될지 몰랐다.
드디어 대한민국의 첫 홈쇼핑 방송이 시작됐다.
화면 바깥에서부터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김희선이 등장했다.
성형외과 의사가 뽑은 가장 완벽한 미인이라는 김희선의 미모는 단번에 시선을 끌었다.
희선은 어깨에 멘 숄더백이 잘 보이도록 몸을 틀어 카메라를 향해 비췄다.
“안녕하세요. 시청자 여러분. 오늘 쇼호스트를 맡은 배우 김희선입니다.”
사실 방송 전부터 가방의 인기는 상당했다.
내가 지시한 대로 해성은 길거리에서 숄더백을 들고 다니는 김희선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냈고, 잡지와 신문에 흘렸다.
사람들은 차세대 톱배우 김희선이 어디서든 들고 다니는 가방에 관심 갖기 시작했다.
명품백을 매고 다닐 것 같은 배우의 반전 패션.
그리고 예상외로 잘 어울리는 모습에 사람들은 너도나도 사고 싶어 가방의 출처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가방의 저작권과 모든 재고는 행복 홈쇼핑의 소유가 되었기에, 가방을 사고 싶어도 살 수 없었다.
이전에 구매했던 사람들은 높은 가격으로 벼룩시장에 가방을 팔기 시작했고, 시세보다 높은 가격에도 없어서 못팔 지경이었다고 한다.
숄더백은 김희선이 이전에 한 번 들고 나왔던 것이라 선택했던 건데 생각 이로 명품 원단 브랜드 ‘사르랭’의 천연 소가죽으로 만들어서 질감도 괜찮았다.
이미 행복 홈쇼핑의 첫 판매 상품으로 '김희선 가방'이 나온다는 소식은 입소문이 났었고, 인사밖에 하지 않았는데도 TV 하단에 적힌 재고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3000에서 순식간에 2998, 2969, 2943....
“벌써부터 시청자분들의 반응이 아주 뜨거운데요? 아직 소개도 하기 전인데 말이죠. 다들 아시다시피 오늘 여러분들께 보여드릴 상품은요. 제가 평소에도 데일리백으로 많이 들고 다니는 숄더백입니다.”
이후에 희선은 숄더백을 들고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소비심리를 자극시켰다.
“어머, 저 가방 너무 이쁘다.”
어느새 방에 들어온 영혜가 TV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영혜는 온갖 명품가방을 갖고 있었음에도 방송을 보고 구매욕구가 생긴 모양이다.
“언제 오셨어요? 하나 사드릴까요?”
“아들이 사주는 거야? 엄마는 좋지.”
“기다려보세요. 제가 주문할게요.”
TV 상단에 적힌 번호로 전화하는데 영혜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전화로 주문하는 거야?”
“네. 홈쇼핑은 전화로 주문할 수 있어요.”
휴대전화에는 계속 연결 중이라는 말만 반복해서 울렸다.
교환원을 여럿 썼을 텐데도 주문 폭주 때문에 연결이 지연되고 있는 것 같았다.
영혜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안 되는 거니?”
“사려는 사람들이 많나 봐요. 어머니 것은 제가 따로 챙길게요.”
“구할 수 있어?”
“네. 제가 저 홈쇼핑 채널의 투자자거든요.”
“투자자라니?”
지금은 방송 중이기 때문에 연락할 수 없지만 방송이 끝난 후 해성에게 남은 재고 중 하나를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놀란 영혜를 그대로 두고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희선이 앞에 놓인 전화를 받고 있었다.
내가 해성에게 얘기한 대로 TV 화면에는 판매 번호와 상담 번호 두 개가 동시 송출되고 있었는데 상담 번호는 희선과 연결된 모양이었다.
“네. 숄더백을 뒤집어서 흔들어 보라구요? 네. 알겠습니다.
희선은 직접 숄더백을 뒤집어 흔들었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고객들의 요구에 따라 숄더백을 움직이기도 하고 만지며 질감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재고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엄마는 약속이 있어서 나가볼게.”
“네. 들어가세요.”
영혜는 홀린 듯이 화면에 시선을 두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 방송은 3시간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3000개의 재고가 완판되었을 때는 고작 2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TV에서 환호성 소리와 함께 화면 위로 돌돌 말린 종이가 떠올랐다가 떨어졌다.
희선의 얼굴에 기쁨과 곤란함이 교차하며 나타났다.
“여러분 덕에 예정보다 일찍 완판이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그럼 남은 시간은…”
희선이 눈이 갈 곳을 잃은 것처럼 서성였다.
해성은 이렇게 이른 시간에 완판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다음 기획은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스탭 중 한 명이 희선에게 달려가 귓속말을 했다.
희선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방금 전해 들은 소식이 있는데요. 시청자분들의 응원에 힘입어 숄더백을 추가 제작할 예정이랍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사전 예약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다행히 곧바로 조치를 취한 모양이었다.
희선은 다시 상담 전화를 받으며 제품에 관련한 요청들을 들어주었다.
그때 황비서에게 전화가 왔다.
황비서는 내 지시를 받고 행복홈쇼핑 방송 현장에 가 있었다.
“대표님. 황미연입니다. 행복홈쇼핑 관련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응. 나도 보고 있어. 추가 제작은 얘기된 거지?”
“네. 홍해성 사장이 현장에서 바로 내린 결정입니다. 디자인 저작권이 있어서 바로 제작 공장 측과 연락을 했습니다. 2시간 만에 199,900원의 숄더백 3000개가 모두 나갔습니다. 총 매출은 약 6억 원입니다.”
첫 방송에 매출이 6억 원.
이후의 사전 예약까지 받고 있으니 실제 매출은 그 이상.
또한 숄더백의 배송을 비롯해 행복홈쇼핑이 판매하는 모든 제품은 GB택배가 전담.
GB택배의 이득까지 포함한다면..
“그래. 고생했어. 이만 퇴근해.”
그리고 한 가지를 더했다.
“황비서 몫을 포함해서 숄더백 2개 남기라고 홍해성 사장한테 전할게.”
“감사합니다.”
황비서의 숨길 수 없는 들뜬 표정이 눈에 선했다.
영혜의 몫까지를 챙겼다.
홈쇼핑이 성공할 건 예상했지만 긴장했었는데,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었다.
‘홈쇼핑 사업은 외환위기에서도 살아남은 종목이다. 격변하게 될 시기에 입지를 더 탄탄하게 굳혀야 돼.’
TV 속 화면에는 아직도 희선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
“홈쇼핑 매출이 첫날만 약 6억 원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진태는 서재에 앉아 채규가 하는 보고를 듣고 있었다.
한 달 전 강빈을 매몰차게 내보냈다.
재계서열 1위 태선그룹의 회장인 자신에게 오만하게 조언하는 놈.
그러나 여전히 강빈은 진태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었다.
“행복홈쇼핑에서 강빈의 지분이 3분의 1이라고 했나?”
“네. 그쪽 직원을 통해 들은 바로는 이번 기획도 대부분 강빈 군이 한 것이라고 합니다.”
강빈은 이번에도 처음 하는 사업을 성공시켰다.
진태가 보기에 강빈이 하는 투자와 사업들은 도박에 가까웠다.
사업이란 도박에 가깝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진태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진태는 무슨 사업을 하든 철저한 분석과 거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반드시 성공시켰다.
그런데 강빈은 한국에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던 사업들을 진행하는데도 막힘이 없었다.
분석을 할 자료도, 진태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자본들로 말이다.
만약 강빈의 티끌만 한 자본이 아니라 진태, 자신의 돈으로 사업을 진행시켰다면…
물론 자산 규모가 커질수록 운용의 효율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고, 기대수익률도 낮아지기 때문에 드라마틱한 수익은 아니었을 것이다.
“강빈이에게 정보책이 없는 것은 확실한가?”
“네. 확실합니다. 기관에 의뢰해서 전화 정보를 살폈을 때도, 지속적으로 연락하는 사람은 비서 황미연과 강빈 군이 미국 쪽에 심은 에릭 장, 둘뿐이었습니다. 둘 다 강빈 군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사람들이구요.”
“한 번 더 조사하게. 정말 정보책 하나 없이 모든 것이 강빈이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놈은 난 놈이야.”
“알겠습니다. 확실하게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봐 온 강빈은 예의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강빈이 선을 지키지 않고 공식 선상에서 진태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후 강빈을 서재로 불러들여 대화를 나누었을 때도 강빈이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뒤로 강빈이 한 말이 계속 생각이 났다.
아무래도 대충 넘겨야 할 일은 아닌 것 같아서 채규를 시켜 뒷조사를 시켰다.
정한수… 사업을 벌이는 꼴은 영락없는 투기꾼이었지만 사람은 괜찮았는데.
“얘기할 게 있지 않나?”
“아직은 확실한 것이 없어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요새 정한수 회장의 움직임이 미심쩍습니다.”
채규는 확실한 것이 아니면 진태에게 얘기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이런 식으로 서두를 여는 것은 그만큼 이 일이 진태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괜찮으니 얘기해 보게.”
채규가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최근 한성그룹이 행태가 이상합니다. 원래도 사업 규모가 크기는 했지만 투자받은 예산 안에서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산규격을 초과해가며 급격하게 사업 규모만 키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알고 있네. 그것 때문에 나에게 공동 투자를 제안한 것이니까. 그런데 나는 아직 수락하지 않았는데. 다른 놈이라도 문 거야?”
“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줄을 댈만한 사람은 이미 다 댔는지, 한성그룹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은 이제 없습니다. 수상한 낌새를 느낀 몇몇 투자자들이 투자금 환수를 요청했지만 정한수 회장은 올해 안으로 지급하겠다는 말만 하고 별다른 대처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태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그런데 사업 규모를 키웠다?”
“네… 아무래도 회장님이 곧 투자할 것이라는 찌라시를 뿌린 모양입니다.”
진태가 머리를 짚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공동 투자를 진행하자던 한수의 말에 진태는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실제로 강빈의 말이 아니었으면 이미 투자를 진행했을지도 몰랐다.
현재 진태의 자산은 수조 원에 이르렀고 그의 재산을 눈여겨보고 있는 사람은 그의 자식들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자산을 어떻게 운용하는가에 따라 국가 수준의 경제 상황이 변동하기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정부의 압박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수가 비자금 마련을 위한 공동 투자를 제안해 온 것이다.
“한수… 그 녀석에게 입조심 하라고 단단히 일러야겠군.”
“사실 그게 끝이 아닙니다.”
“뭐?”
채규는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더니 조심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최근 정한수 회장이 베트남과 필리핀 등을 비롯한 동남아 쪽에 섬을 매입하려는 정황을 발견했습니다. 아마 해외 도피를 위한 거처를 마련하려는 것 같습니다. 최종학 사장 쪽에 들어온 의뢰라고 하니 확실할 겁니다.”
최종학이라면 재벌가의 궂은일들을 도맡아 하는 조직 하방회의 수장이었다.
하방회는 청부 일을 주로 하며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의뢰자를 누설하지 않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돈만 제대로 준다면 명의를 돌려 해외의 섬을 매입하는 것도 쉬운 일일 것이다.
진태의 자식들조차 모르는 사실이지만, 최종학은 오래전부터 진태의 사람이었다.
“이 썩을 놈이…”
한 달 전, 강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한수 회장과 공동 투자를 진행하시면 반드시 후회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