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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34화 (34/249)

#34화

초인종을 누르자 그제서야 김집사가 나왔다.

“오늘 강빈 도련님이 오시는 걸 깜빡했군요. 죄송합니다.”

정중하게 사과하는 김집사의 모습은 그럴듯해 보였다.

‘내가 온다고 언질도 안 준 건가?”

몇십 년을 진태의 저택에서 일해온 사람이었다.

진태의 성격상 이런 사소한 실수도 용납했을 리 없다.

내가 했던 말이 별 게 아니라면 가볍게 넘기지 않겠다는 진태의 경고일 것이다.

“아닙니다. 서재로는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김집사의 옆을 지나쳐 마당을 걸었다.

여전히 서울 한복판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대저택이었다.

스프링클러에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가 무지개를 그리고 있었다.

열려있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채규가 거실 한쪽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 나를 봤다.

채규와는 판교의 땅을 받을 때 일면식이 있었다.

“이실장님. 오랜만입니다.”

“그래요. 오랜만에 보는군요.”

채규는 진태의 최측근이다.

진태가 창립기념일 이후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

“회장님께서는 잘 지내셨습니까?”

“하하. 회장님은 늘 한결같지요. 걱정되십니까?”

“안 된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채규는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은 매섭게 나를 파악하고 있었다.

“강빈 군이 한 말이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내게 전생의 삶이 없었다면 채규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거대기업의 회장이 집안 막내의 충고를 들으려고 할까.

그러나 진태는 자신의 일에 도움이 되는 말이라면 상대방이 누구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다가 청소부의 말을 듣고 경영진의 일부를 바꾼 일화는 전생에서 유명했다.

문제는 내가 할 말이 그를 얼마나 설득할 수 있는가이다.

“저는 확신을 갖고 한 말입니다.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서재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똑똑.

“회장님. 저 강빈입니다.”

“들어와.”

잠깐의 공백도 없이 진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서재는 잠잠했다.

진태는 금테 안경을 쓴 채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어떤 동요도 없이 강건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안부 인사는 나중으로 미루자꾸나. 나에게 할 말이 있지 않느냐.”

“회장님. 한성그룹의 정한수 회장이 공동 투자를 제안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한수가 치근덕거리며 제안했지.”

고개를 끄덕이는 진태의 얼굴에는 한수에 대한 믿음이 얼핏 보였다.

“정한수 회장과 공동 투자를 진행하시면 반드시 후회할 겁니다.”

진태가 나를 노려보았다.

어디 건방지게 자신에게 후회를 거론하냐는 거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태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강하게 나가야 했다.

내가 확신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진태는 나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를 그 자리에 올려놓으니까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으냐? 너를 앞에 세운 이유는 내가 괜한 기대가 생겨서 일뿐, 네가 대단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어찌 그리 오만해진 것이냐.”

“저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확신을 갖고 움직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회장님 앞에서 아무 이유 없이 그런 태도를 보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진태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 또한 한수의 비열함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수와 공동 투자를 진행하려는 이유는, 한수가 내건 조건이 나쁘지 않아서겠지.

한성그룹도 지금은 국내에서 알아주는 대기업이고.

그가 쌓아온 성공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세월을 부수려면 평범한 방법으로는 안 된다.

나는 조금 더 거칠게 나가기로 했다.

“한성그룹의 부채가 500프로를 넘겼습니다.”

“흔한 일이다.”

“맞습니다. 문제는 그 부채를 어떻게 발생시켰는지겠죠. 한성그룹의 부채가 어떻게 5조에 육박했는지, 회장님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한성그룹은 철강과 건설 쪽에 정경유착이 잘 되어 있어.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이후라면 모를까. 지금 문제 생길 일은 없다.”

대기업의 정경유착은 의례라고 하지만 이렇게 서슴없이 말할 줄이야.

나를 그만큼 신뢰하는 것인지, 내가 안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진태의 얼굴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한성그룹이 급격하게 부채를 늘리며 사업을 확장한 게 벌써 4년째입니다. 그중 실수익이 투자금을 넘긴 곳이 있습니까?”

내 말을 들은 진태가 코웃음을 쳤다.

“제법 조사는 한 모양이구나. 하지만 네 말대로 고작 4년이다. 투자를 늘리면 결국 수출을 증가시켜 적자를 상쇄시키는 법이야.”

“한성그룹으로 인해 최고 은행이 무너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진태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그가 말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말했다.

“최고 은행이 한성제철에 투자한 금액만 1조 원이 넘습니다. 그런데 그 돈이 어디로 갔습니까? 한성제철은 기껏해야 공장 한두 개 늘린 것이 끝인데 말입니다. 정한수 회장이 빼돌린 한성제철의 투자금은 그의 다른 사업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한성제철의 기업가치는 투자받은 금액만 해도 5조 원은 넘겨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회장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최고 은행은 환수받아야 될 투자금을 받지 못할 거고요. 아무리 재무구조가 탄탄한 최고 은행이라 할지라도 1조 원의 부채는 감당하지 못합니다.”

진태가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내가 이곳에 와서 떠들어댄 말은 진태도 모두 알고 있을 정보들이었다.

그의 얼굴에 호기심이 잠깐씩 비쳤을 뿐, 따로 반문하지 않은 것도 그 이유였다.

그럼에도 진태가 아는 정보를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내 말에 힘을 싣기 위해서다.

진태에게 내 말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일단 나에 대한 신뢰를 주어야 한다.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한성그룹에 투자를 하겠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 것 같으냐?”

이제야 본론으로 넘어갔다.

내가 아무 지식도 없이 말하는 건 아니라는 걸 진태도 이제 알았을 것이다.

빙빙 돌려서 말을 할지, 비유를 해서 말할지 많은 고민을 했지만,

결국 나는 확실하고 명료하게 말하기로 결심했다.

“태선의 비자금을 위해서 아닙니까.”

내 말에 기분이 상할 법도 한데, 진태는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문어발식의 사업확장, 4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새로 창립한 계열사만 10개가 넘는다.

한성그룹은 정상적인 그룹이 아니다.

아무리 정경유착을 잘 형성했어도, 그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진태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투자를 명목으로 적당한 돈을 돌리고 스위스 은행에 맡길 생각이겠지만 그의 계획은 이루어질 수 없다.

“회장님의 투자를 받고 사업이 실행되기도 전에 한성그룹은 부도가 날 겁니다.”

“태선 그룹 최고의 임원들이 결정한 사안이다. 네가 그들보다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느냐?”

“저는 적어도 한성그룹만 보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한성그룹은 그저 한국 금융위기의 시작일 뿐입니다.”

내 말에 진태가 놀랍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물론 진태의 곁에도 곧 있을 외환위기에 대한 조언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반대편에 선 사람도 있다는 것이지만.

어쨌든 내가 한국의 금융위기를 거론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지식을 알고 있다는 걸.

그리고, 나만큼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는 걸.

“네가 너무 앞서나가는구나. 금융위기가 올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하지만…”

“그만. 이만 돌아가거라.”

진태는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 내 말을 끊었다.

창립기념회에서 연설했던 것처럼, 진태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예상은 했다.

그러나 진태는 자신이 내린 결정에 확신을 갖는 사람은 아니다.

성공을 눈앞에 두고도 늘 의심하고 완성된 계획을 엎기도 하는 사람이 바로 진태다.

지금은 내 말을 듣지 않더라도 다시 생각해 볼 계기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가보겠습니다.”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서재에서 나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이제 없다.

남은 것은 진태의 그 촉뿐이다.

***

해성이 쇼호스트를 섭외했다며 연락이 왔다.

만나기로 한 곳은 일전에 봤던 카페 리라였다.

해성은 먼저 도착해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서대표님!”

“오랜만입니다. 홍부사장님. 이제는 홍사장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하하. 대표님 투자 덕분에 제대로 된 채널을 운영하게 됐네요.”

나는 자리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해성이 먼저 사업에 대해 말을 꺼냈다.

“쇼호스트로는 김희선 씨를 섭외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김희선이라면 <李가사 크리스티>에 출현하며 톱스타의 반열에 오른 여배우였다.

그리고 이후 이어지는 작품들을 통해 한국 최고의 여배우가 될 것이다.

워낙 스타급 연예인이기 때문에 섭외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역시 李가사 크리스티가 방영됐던 SCB의 부사장 출신이다.

“홍사장님 능력이 뛰어나신데요? 김희선 씨라면 저도 이견 없습니다.”

“첫 방송이니까 무리 좀 했습니다. 그보다 제품선정이 문제인데… 화장품은 어떻습니까?”

홈쇼핑을 주로 시청하는 주류는 주부를 비롯한 여성들일 것이다.

해성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화장품을 제안했다.

그들의 불편함을 해소해주면서 소비 욕구도 해결해줄 수 있는 물건.

전생에서 화장품은 홈쇼핑에서 먹히는 제품이었지만 더 좋은 제품이 있었다.

“저는 화장품보다는 중저가 가방이 나을 것 같습니다.”

“가방이요? 화장품보다 나은 이유가 있을까요?”

“일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연예인이 그 제품을 실제로 사용하는 것을 홍보할 겁니다. 길거리에서 자연스럽게 찍힌 사진이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는 화장품보다는 가방이 사람들의 눈에 더 띄겠죠.”

해성은 방송국에서 일해온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해가 빨랐다.

“김희선 씨가 가방을 메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찍을 사진 기자들을 섭외하겠습니다.”

“진행이 빨라서 좋군요. 그리고 기사를 낼 때 제목에 ‘김희선 가방’이 들어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품질은 우수하면서 그렇게 비싸진 않은 가방이라고 설명을 덧붙이면 더 좋고요.”

“그러고 보니 SCB에서 김희선 씨가 가방을 광고했던 적이 있습니다. 가끔 가방이 문의가 들어와서 기억이 나는군요.”

뉴스를 제외하고는 TV를 거의 보지 않다 보니 이미 광고를 한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미 인지도가 있는 상황이라면 일은 더 쉬웠다.

“그 가방을 판매했던 회사가 어디입니까?”

“음… 아마 강남의류였을 겁니다.”

“강남의류 측에 연락해서 그 가방에 대한 저작권을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미 완성된 제품이라면 추가로 디자인하거나 제작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아낄 수 있을 겁니다. 저희가 판매할 가격은 20만 원이 넘어서는 안 됩니다. 홍사장님이 수익 계산하시고 적당한 가격에 저작권과 남은 재고까지 구매하세요.”

“알겠습니다.”

해성은 곧바로 대답했다.

“서대표님, 그럼 행복홈쇼핑의 첫 방송은….”

“첫 방송은 이날로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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