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당연히 3분의 1을 가져갈 겁니다. 투자금이 100억 원을 초과할 수는 없으니 33.3프로가 되겠군요.”
3분의 1이 아무래도 크다 보니 해성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면서도, 어디에서든 쉽게 받지 못할 투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거절하게 되면, 다른 투자를 알아봐야 하고 시간이 지체되고,
또 다른 투자에서는 어떤 조건을 내걸지도 모르는 상황.
“홍부사장님이 걱정하시는 것이 어떤 문제인지 짐작은 갑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저는 경영권에 별로 손댈 생각이 없거든요.”
해성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정말이십니까? 경영권에는 손대지 않겠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전반적인 경영은 홍부사장님께 맡기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는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혹시 모를 사고에도 대비해야 하고요. 예를 들어 고객을 우롱한다든지…”
“네…? 하하…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모르는 일이죠.”
행복홈쇼핑의 가짜 보석 사건은 해성의 책임이라고만 하긴 그렇지만 그래도 사람 관리에 소홀했던 건 사실이니 경영권에 손을 대지 않지만 항상 지켜는 보고 있다는 경각심을 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 말했다.
해성의 당황하는 반응을 보니 말하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라에 들고 온 서류 가방 안을 살피며 말했다.
“계약은 어디서 하시겠습니까?”
“저는 상관없습니다. 서대표님이 편한 곳에서 하시죠.”
“그럼 여기서 바로 계약하시죠.”
“예? 계약서부터 작성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고 말했다.
“계약서는 이미 작성해서 가지고 왔습니다.”
“그 말은… 계약할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겁니까?”
해성을 보며 웃어주었다.
“혹시 몰라서 도장을 챙겨왔는데 쓸 일이 생기네요.”
해성 역시 웃으며 도장을 찍었다.
드디어 행복 홈쇼핑의 사업 계약의 첫 계단에 올랐다.
이제 그 두 번째 계단에 대하여 해성과 이야기하려 한다.
행복 홈쇼핑의 첫 판매 아이템은 90년대를 풍미했던 뻐꾸기시계였다.
수요가 많았던 제품이었기에, 첫 판매 제품으로는 적합하다고 예상했겠지만 부족한 투자금으로 인한 홍보 부족과 홈쇼핑이라는 낯선 문화로 주문량은 고작 10개 내외였다.
2000년대 이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홈쇼핑을 이용하게 되었지만, 아직 그러한 개념조차 인지되지 않은 상황인 지금은 모든 것이 다 도전이었다.
하지만 이 사업에 뛰어든 이상 2000년대까지 기다릴 순 없다.
홈쇼핑 채널의 첫 아이템부터 제대로 만들어 놓아야 한다.
“이제 몇 달 뒤면 개국이 될 겁니다. 혹시 생각해 둔 제품이 있습니까?”
“당연히 생각해 두었습니다. 뻐꾸기시계로 할까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해성의 생각은 확고했던 것 같다.
“확실히 뻐꾸기시계는 나쁘지 않은 제품입니다. 수요도 꾸준히 있고요. 하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럼 대표님께서 생각하신 것이 있습니까?”
“저는 이전에 MP3를 TV에서 간접광고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흥행했던 모래시계에서 최민수가 마음을 달랠 때 MP3로 음악을 들었죠. 그 방송을 타고 다음 날만 매출이 몇 배는 뛰었으니 그 효과는 홍부사장님도 아실 겁니다.”
“저도 그 장면 감명 깊게 봤습니다. 벤치에 앉아서 감상에 빠진 최민수… 아직도 생생하군요. 그럼 대표님은 MP3를 판매하자는 겁니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MP3를 판매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새롭게 접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연예인이 사용하는 제품으로요.”
“지금도 TV를 보다 보면 연예인들이 제품을 사용하는 광고들이 나옵니다. 새로울 게 있습니까?”
“사람들은 광고를 보면서 연예인이 그 제품을 사용한다고 생각할까요? 생각은 하더라도 확신을 갖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대표님의 말은 연예인이 사용하는 제품을 그대로 판매하자는 말인가요? 그런 제품들은 가격이 상당할 텐데요… 아니면 혹시?”
해성이 내 말을 알아차린 듯 눈을 크게 떴다.
“네. 연예인이 사용할 제품을 우리가 미리 정해놓는 겁니다. 연예인이 어딜 가나 그 제품을 들고 다니게 만들어서 미리 화제성을 확보하는 거죠. 기자들을 섭외해서 그 제품을 부각하는 기사를 내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요.”
“확실히 그런 방법이라면 시작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겠군요. 쇼호스트도 제품을 광고하는 연예인으로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해성이 방송국에서 부사장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라 그런지, 광고에 대해 얘기할 때는 확실히 이해하는 속도가 빨랐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쇼호스트 역할을 할 연예인과 그 연예인이 사용할 제품에 대해서 정하면 되겠군요.”
홈쇼핑이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쇼호스트의 역할을 맡은 연예인에 대한 믿음이었다.
초기 홈쇼핑 채널의 쇼호스트는 면접을 통해 일반인을 뽑았다.
그렇게 뽑힌 쇼호스트들은 말도 유창하게 잘하고 진행도 무리 없이 해냈지만 문제는 인지도였다.
안 그래도 낯선 홈쇼핑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나오니 사람들이 관심이 있을 턱이 없었다.
“저도 한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대표님께서도 생각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쇼호스트 역할을 맡을 연예인을 정해야 기사를 내고 미리 화제성을 키울 수 있습니다. 개국까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 빠르게 선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하. 서둘러 생각해 보겠습니다.
해성이 경외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품을 광고할 쇼호스트로 생각해둔 연예인이 있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해성이 더 나은 사람을 생각해올 수도 있고, 너무 간섭하는 느낌도 주고 싶지 않았다.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어쨌든 해성은 행복홈쇼핑을 잘 이끈 오너였다.
계약서를 정리하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제안하겠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시죠.”
“방송을 진행할 때 화면에 상담 전화번호도 같이 송출시키세요. 그리고 고객들이 원하는 요청사항을 쇼호스트가 진행할 수 있도록 전달하세요. 물건을 표현할 때 최대한 오감을 동원해서 표현하게 하도록 하고요. 고객들의 요청을 들어주는 쇼호스트를 보며 고객들은 생동감과 시각적인 효과 이상을 경험할 수 있을 겁니다.”
해성이 감탄한 듯 말했다.
“실시간으로 고객들의 반응이 적용되겠군요.”
해성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해성이 이어서 말했다.
“서대표님이 투자에 대한 감이 뛰어나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아이디어가 넘쳐나시는 분일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말씀하신 사항 잘 반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홍부사장님이 잘 해내실 거라고 믿습니다. 이만 일어날까요?”
“그러시죠.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해성과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앞에서 황비서가 내 실적에 대해 보고하고 있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오늘은 진태를 만나기로 한 금요일이기 때문이다.
한수와 진태의 사업을 어떻게 막을까 고민해보았지만 아직까지도 떠오른 해결방안은 아무것도 없었다.
“... 태선백화점에서 MP3 임시매장에 대한 계약이 만료되었고 다시 계약을 했습니다. 수수료는 대표님께서 말씀하셨던 20프로로 확정 지었습니다. 대표님. 대표님?”
“응? 아, 생각할 게 좀 많아서. 듣고 있었어. MP3의 신버전에 대한 개발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어?”
“어제 디지털사운드 측과의 미팅에서 들은 바로는 앞으로 한 달 정도면 될 것 같다고 합니다.”
“그래. 디지털사운드에서 진행하고 싶은 마케팅이 있으면 진행하라고 해. 저번 마케팅에서 기능적인 측면은 충분히 알렸으니까 이제 신버전에 대한 기대감 정도만 심어주면 돼.”
황비서가 수첩에 빠르게 메모하며 대답했다.
“네. 전달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오전 영일제약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임상시험 결과에 대한 보고였는데 아직까지 이상은 없다고 합니다. HIV 면역력 성장에 대한 기대치를 조금 더 높여도 될 것 같다고 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일제약 측은 이제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보고하지 않아도 괜찮아.
“네. 이상 반응이 나타날 경우에 보고드리겠습니다.”
국내에 투자했던 기업들도 착착 진행되고 있었고,
에릭을 통해 전해 받은 미국에서 진행했던 투자들도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마존은 이미 엄청난 기세로 성장하고 있었고, 물류센터가 완성된 GB로지스틱스의 빠른 배송도 현지에서 인기를 몰고 있다고 한다.
어제 연락이 온 에릭은 GB로지스틱스에서도 계약문의가 하루에도 몇 건씩 들어온다고 전했다.
황비서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대표님. 오후 2시입니다. 임기사한테 대기하라고 전하겠습니다.”
진태가 만나기로 했던 시간이 오후 3시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얇은 자켓을 입었다.
밖으로 나가자 뜨거운 여름 햇살에 눈이 찌푸려졌다.
태선증권사 바로 앞에 임기사의 차가 세워져 있었다.
임가사가 나와 앞 좌석의 문을 열었다.
“고마워.”
미리 에어컨을 켜두었는지 차 안은 시원한 공기가 맴돌고 있었다.
차량용 컵홀더에는 반쯤 언 생수병이 보였다.
물을 마시며 임기사에게 말했다.
“고마워. 임기사.”
“하하. 날씨가 너무 덥지 않습니까.”
시원한 공기를 느끼며 차창을 보다가 에릭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수출주도를 위한 것은 알겠지만 현 정부의 고환율정책은 국가 부채를 천문학적으로 늘리고 있어요.’
1996년 우리나라는 OECE 국가에 가입될 정도로 소위 말하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대기업들의 부채비율은 평균 400프로에 이르렀고 심각한 기업은 1000프로 가까이 되기도 했다.
투자의 증가가 결국 수출을 증가시켜 적자를 상쇄시킬 것이라는 인식이 강할 때였다.
재계 서열 14위, 한성그룹은 그 상황을 이용해 외환위기를 더욱 촉진시킨 정경유착의 상징과도 같은 기업이었다.
사업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을 포함해 정계, 금융계에 로비를 했고 약 5조 원의 불법 대출을 받았다.
5조 원에 이르는 돈을 투자받은 기업은 한성제철이였으나 한성그룹의 회장, 정한수는 이 돈의 대부분을 다른 사업에 투자를 하다가 걸리게 된다.
진태의 덜미가 잡혔던 것도 그중 하나의 사업이었다.
한성제철이 부도처리되고 그 여파로 한성철강과 한성그룹은 줄줄이 부도되었다.
당시 최고 은행은 재무구조가 탄탄했던 은행이었지만, 한성그룹의 부도로 1조 1천억 원의 부채를 떠안게 된다.
한성그룹의 부도를 시발점으로 각 은행은 자금 회수에 나서게 되었고, 부채비율이 높고 단기성 채무가 많던 기업들이 줄줄이 파산을 하게 되며 대한민국은 IMF 외환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멀리서 진태의 저택이 보이기 시작하자, 진태와의 마지막 만남이 생각났다.
‘우선 어떤 사업인지 들어봐야 알 것 같습니다만… 이 얘기는 회장님과 둘이 있을 때 하고 싶습니다.’
진태와 한수 앞에서는 일부러 세게 말했다.
그 둘이 그래도 지금은 꽤 신뢰하고 있는 동업자일 테고,
그 정도는 이야기해야지 진태가 내 말을 귀 기울여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도 진태가 하는 일에 부정적으로 말한 적은 없었으니까.
“대표님. 도착했습니다.”
차에서 내렸다.
평소처럼 약속 시간까지 20분 정도 여유를 남기고 도착했다.
그러나 오늘, 마중 나온 이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