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서강빈 대표님. 제 명함입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명함에 적힌 이름은 오채욱. 대한미술관의 관장.
이 사람 말고도 쉴 새 없이 내미는 명함만 벌써 스무 장이 넘었다.
진태의 관심을 받고 있는 손자.
사람들은 이 타이틀에 열광했다.
받을만큼 받은 명함을 뒤로하고 나의 시선은 다시 한수로 향했다.
눈앞에서 한국의 금융위기를 자초한 남자가 내 앞에 태연히 서 있었다.
진태의 옆에 붙어서 쉬지 않고 말을 해대는 한수.
귀찮은지 몇 마디 던지면 그제서야 한마디 대꾸해주는 진태.
전생의 한수는 온갖 회사로 저지를 수 있는 비리를 다 저지른 뒤, 회사를 말아먹고 해외로 도주했었다.
그런 한수가 망할 줄은 몰랐던 건지 진태는 한성그룹과의 공동 투자를 기획했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사업이 진행되었던 건 아니었어서 징역까진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진태는 정경유착 관련자로 검찰 수사까지 받는 곤욕을 치렀었다.
피해는 제법 컸다.
IMF의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의 원망은 고스란히 태선으로 향했고, 태선그룹이 불매운동까지 일어나게 됐다.
태선은 창립한 뒤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하게 되었다.
“서회장님이 하는 말인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자는 대로 해야죠.”
금융위기 전체를 막을 수는 없더라도, 한수가 태선그룹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데 진태가 내게 다가왔다.
“이 친구가 나한테 자꾸 사업을 제안하는데 네 생각을 묻고 싶구나.”
한수는 이 상황이 어이없다는 듯 진태를 보며 말했다.
“어허, 아무리 사업을 좀 성공시켰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큰일을 젊은 애가 뭘 알겠어요?”
나는 그런 한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우선 어떤 사업인지 들어봐야 알 것 같습니다만… 이 얘기는 회장님과 둘이 있을 때 하고 싶습니다.”
내 말이 농담처럼 느꼈는지 진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지금 말해 보거라.”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창립기념회가 열린 오늘, 회장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 말에 한수와 진태, 둘 다 표정이 굳었다.
한수가 정색한 채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진태가 그런 한수의 한쪽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알겠다. 다음 주 금요일에 시간이 비니 내 서재로 오거라.”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진태는 여전히 굳은 표정을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진태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자리에서 나왔다.
뒤에서 한수가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
범준은 진태, 그리고 진태와 함께 있는 강빈을 보고 화가 났다.
작년에 태선식품을 물려받으며 저 단상 위에 올라갔을 때가 생각났다.
지금 강빈이 받던 관심은 원래 자신의 것이었다.
진태 곁으로 은근슬쩍 다가가 봤지만, 진태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기업의 사장이 범준에게 말을 걸었다.
“서범준 사장님 아니십니까? 저는 해신물산의 송경일 사장이라고…”
“미안한데 나 지금 당신과 이야기할 기분 아닙니다.”
“아… 죄송합니다.”
범준의 말에 경일은 민망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때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재만이 보였다.
지금 재만에게 가봐야 들을 말은 뻔했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재만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담배를 피웠으면 냄새는 빼고 들어와야 할 것 아니냐.”
범준은 말없이 바닥을 쳐다봤다.
재만은 두통이라도 느낀 듯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못난 자식. 강빈이 저놈이 받고 있는 관심은 네 것이었다.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저번에 네가 뭐라고 했어. 강빈이가 네 적수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냐.”
재만의 말은 질문이었지만 질문이 아니었다.
범준은 재만의 앞에만 서면 자신이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재만의 아내, 강숙이 말했다.
“범준아. 너는 장손이야. 회장님께서도 당연히 너를 눈여겨볼 거라고. 이번에 너를 저 자리에 올리지 않은 것은 경고하려고 그러신 걸 거야. 다음에…”
“당신은 가만히 있어.”
재만이 강숙의 말을 끊고 이어서 말했다.
“저 자리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작은 걸 뺏기다 보면 더 큰 걸 빼앗기는 법이야. 준만이 보고도 느끼는 것이 없어? 장손과 막내의 차이를 모르겠냔 말이야. 그런데 네놈은 뭐냐.”
범준이 발악이라도 하듯 대답했다.
“저도 이번에 성과를 올렸어요. 태선식품에서 만든 오향만두가…”
“닥쳐라. 네가 그딴 만두나 빚고 있을 때 강빈이는 미국으로 가서 자기 회사를 만들었더구나. 너도 회장님이 좋아할 만한 짓을 해오란 말이야. 이놈아…”
범준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범준이 일을 못 하는 것이 아니었다.
손주들 중 유일하게 물려받은 계열사, 태선식품도 꾸준히 매출이 상승하고 있었다.
강빈만 없었다면…
범준은 강빈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
차창 밖으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것이 보였다.
차 안에서 라디오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광복 50주년을 맞이해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변경한다는…”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서강빈으로 살아온 지 벌써 4년이 지났다.
“임기사. 소리 좀 낮춰줘. 조용히 가고 싶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창문을 열어 빗소리를 들으며 약속장소로 향했다.
홍해성은 마음이 급했는지 창립기념일이 끝난 다음 날 태선증권사로 사업계획안을 보내왔다.
준비를 철저히 했는지 사업계획안은 꽤 치밀하게 작성되어 있었다.
어차피 시행할 거면 나도 빠른 것이 좋았기 때문에 시간이 비어있던 금요일에 만나기로 미팅을 잡았다.
해성과 만나기로 한 곳은 압구정에 있는 카페 리라였다.
통유리로 된 문 너머 앉아 있는 해성이 보였다.
우산을 접고 리라로 들어갔다.
해성이 일어나며 말했다.
“저희가 본 지 일주일도 안 지났는데 시간이 꽤 지난 것 같네요? 하하.”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해성은 이미 주문을 했는지 앞에 놓인 머그잔에서 김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주문을 받으러 다가온 종업원에게 따뜻한 원두커피를 시켰다.
최근에 다방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카페가 들어서면서 리라처럼 원두커피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 늘었다.
해성이 커피를 한입 마시더니 말했다.
“처음에는 무슨 맛으로 이 쓴 걸 먹나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달달한 믹스커피만 마셨거든요.”
“하하. 누구나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마실 이유가 없는데도 마시게 되죠.”
해성이 머그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먹다 보니 중독이 되더군요. 서대표님.”
해성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저는 홈쇼핑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홈쇼핑 채널을 보는 사람들은 지금은 향도, 맛도, 질감도 느낄 수 없습니다. 제 주변에서도 제가 그런 사업을 구상한다고 했을 때 안 될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요.”
“홍부사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해성이 눈을 빛냈다.
“저는 홈쇼핑이 잘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원두커피처럼요. 불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화면을 바라보다가 누군가는 구매를 할 겁니다. 그리고 제품을 받은 그 누군가는 알게 되겠죠. 시장에서 산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요. 아뇨. 더 괜찮다는 걸요.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그저 누워서 전화 한 통으로 물건을 사게 되는 편리함을 깨닫게 될 겁니다. 그리곤 애용하겠죠.”
해성의 말은 번지르르했다.
방송국의 부사장이라기보다 마치 영업사원처럼 보였다.
“별반 다를 게 없는데 왜 굳이 홈쇼핑에서 살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건…”
해성이 자신의 말에 당연히 내가 넘어갈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그에게 쉬운 투자자로 보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홈쇼핑의 장점은 겨우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사업계획안만 보고서 홍부사장님을 너무 신뢰한 모양이군요.”
해성은 당황한 듯 말을 잃었다.
“홈쇼핑이 이 원두커피처럼 잘 될 것이라고 하셨죠. 원두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쓴맛을 사람들에게 학습시키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몰라도 좋은 것’이라고 학습된 사람들은 커피의 향과 맛을 즐기죠. 홈쇼핑은 원두커피와는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에게 향도, 맛도 학습시킬 수 없습니다. 왜 홈쇼핑에서 사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합니다.”
“홍부사장님.”
“예. 서대표님.”
해성은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저는 홍부사장님이 개국할 홈쇼핑 채널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네?”
방금까지 전혀 투자할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해성은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면… 우선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해성이 보낸 사업계획안에 적힌 바로는 정부가 투자를 약속한 돈이 200억 원이었다.
그리고 해성이 추가로 개국하고 영업하는 데 필요한 돈이 100억 원.
경영권을 위해서라도 나에게 100억 원 전부를 투자받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홈쇼핑에서 있을 위기를 내가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나는 안정적인 지분을 가지고 와야 했다.
“저는 100억 원을 투자하고 싶습니다.”
“그건…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정부 측에 문의도 해야 하고…”
“정부 측에서는 이미 수익 지분을 약속받았기 때문에 관계없을 텐데요?”
해성이 몸을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내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홈쇼핑은 후에 매출 11조 원을 넘기는, 성공이 보장된 사업이다.
하지만 그 시작이 마냥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해성이 미국에서 보고 가져온 홈쇼핑이라는 개념은 한국에서 익숙하지 않았다.
방송국에서 일하며 쌓은 정부 쪽 인맥과 로비를 통해서 계약은 따냈지만, 해성은 남은 100억 원의 투자금을 채우지 못했었다.
해성 또한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계약 이행을 위해서 개국을 강행했었다.
정부가 약속한 200억 원에는 채널 개국에 필요한 비용, 방송국 부지와 건설에 대한 비용까지 합쳐진 돈이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 쓸 여유가 없었다.
그랬기에 시설, 상품, 장비, 쇼호스트 등 무엇 하나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로 시작된 행복홈쇼핑의 출발이 처참했다는 말도 있었다.
물론 몇 년 뒤, 홈쇼핑 사업 자체가 급부상하며 다시 살아나지만 투자금을 확보하지 못한 지금의 해성은 몹시 불안할 것이다.
해성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럼 혹시 지분은…?”
해성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