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진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나에게로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연회장 안에 울려 퍼졌다.
진태가 한마디를 하게 될 것이라고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거창하게 주목시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전혀 예상 못 한 준만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히려 영혜는 알고 있었다는 듯 침착한 표정으로 내 등을 두드렸다.
영빈이 말했다.
“강빈아. 회장님께서 오늘은 너를 주인공으로 만드시려나 보다. 범준이형 표정 보여?”
영빈의 시선을 따라가자 범준네 가족이 보였다.
재만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무대를 바라보는 듯했지만 연신 범준을 흘끗거렸다.
범준으 그런 시선이 불편한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저 자리에 오른다는 의미를 둘을 보며 잘 알 수 있었다.
창립기념회가 끝나고 된통 깨질 범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겨우 이런 걸로 주저앉지 마라. 서범준. 네 최악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
장손이라는 이유로 많은 것을 누린 범준.
손자들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계열사를 물려받은 범준이었다.
태선식품에서의 두각을 기대했지만 범준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니 오늘, 그를 대신해 내가 오른 거겠지.
옆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순과 눈이 마주쳤고 남순이 말했다.
“뭐해, 강빈아. 얼른 나가 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강단 위로 올라갔다.
내 움직임을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이렇게 많은 청중을 앞에 둔 것은 처음이지만, 한 증권사의 대표였기에 해왔던 축사들도 제법 많았다.
‘차라리 좋은 기회다. 내가 진태의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린다면, 앞으로의 계획들에 분명 도움이 될 거야.’
강단 위에 올라서자 진태가 나를 보며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태선그룹 창립기념회를 장식할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태선증권을 이끌고 있는 서준만 사장의 아들이자 제 손자, 서강빈입니다.”
연회장에 다시 박수 소리가 울렸다.
재만네 가족이 앉은 자리는 강단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 중 하나였기 때문에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범준의 손에 쥐어져 있던 한 장의 대본 종이가 힘없이 구겨져 바닥에 떨어졌다.
나와 눈이 마주친 범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
재만이 그런 범준을 보며 뭐라고 했지만 나한테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잦아들고 진태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태선증권에서 본부장 역할을 수행하면서 GB택배라는 회사를 자신의 힘으로 차리더군요. 이제 강빈이를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택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비록 태선의 이름을 쓴 것은 아니지만, 이 또한 태선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역시 진태는 뛰어난 사업가였다.
순식간에 GB택배의 성과가 태선의 일이 되었다.
내 이름을 건 사업체도 결국 태선그룹에 좋은 일이라는 거.
언뜻 보기엔 나에게 손해 보는 말이기도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내 것이 결국 태선그룹의 것이고, 태선그룹의 것 역시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담담하게 표정을 유지했다.
나란히 서 있는 진태와 내 모습을 기자들이 열심히 찍어댔다.
후계 구도에 없던 새로운 인물의 등장.
태선의 힘. 서진태가 인정한 손자.
GB택배의 서강빈. 태선그룹의 막내 손자.
오늘 열린 창립기념회의 메인 타이틀이다.
이제 내 차례라는 듯 진태가 천천히 자리를 내려갔다.
마이크 앞에 서니 많은 사람들이 한눈에 보였다.
여전히 퇴장한 진태 쪽을 바라보는 사람.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
갑자기 등장한 적에 대한 경계를 가득 품고 있는 사람.
그리고 여전히 별일 아니라는 듯 관망하는 사람.
나는 앞에 있는 마이크를 잡고 말을 시작했다.
“태선이라는 브랜드를 전 세계에 알린 천재적인 기업가, 서진태 회장님. 집단지성의 힘을 보여주신 10만 명의 진태인 여러분. 오늘은 우리들을 위한 날입니다.”
형식적인 말을 하게 되는 것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진태가 말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나를 향한 박수 소리가 들렸다.
특히 영빈이 열정적으로 박수를 치는 것이 보여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길게 연설할 생각은 없었기에, 빠르게 생각했던 말들을 내뱉었다.
그리고 연설의 마지막으로 예전에 들었었던 명언을 설파했다.
“... 마지막으로, 태선이 여러분의 그릇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행동하십시오. 태선이 온전히 담아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곧은 판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모두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허리를 숙여 청중들을 향해 인사했다.
박수 소리를 들으며 강단에서 내려오자, 앞에 있던 재만이 말했다.
“말을 제법 잘하더구나. 하지만 자만하지 말거라.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큰아버지의 말을 명심하겠습니다.”
내가 태연하게 대답하자 재만은 더욱 열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보는 눈이 많다고 생각해서인지 그저 나를 노려만 보았다.
그 외에도 자리까지 걸어가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연설 잘 들었습니다.”
“GB택배 이용하고 있어요! 혹시 시간 되시면…”
“이건 제 명함입니다. 꼭 연락 주세요.”
태선의 계열사 임원부터 다른 문화, 정치 쪽의 거물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보였다.
영혜가 웃으며 먼저 나를 반겼다.
“강빈이 너. 연설 강의라도 들은 거야? 어쩜 그렇게 말을 잘하니?”
“하하.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했는걸요.”
표현을 하지 않는 준만도 한마디 거들었다.
“짧지만 강렬하더구나. 마무리도 좋았다. 어떠냐 달라진 사람들의 시선이.”
“그러게요. 저 자리에 한 번 올라갔다고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달라지는군요.”
“당연하지. 아무나 올라가는 자리가 아냐. 회장님이 아끼는 사람이라는 걸 태선에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다.”
무뚝뚝해 보이는 말투와 달리 준만은 살짝 들떠 보였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호응해주었다.
옆에 앉아 있던 영빈 역시 흐뭇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 형 박수 소리가 제일 크더라. 고마워. 형.”
“아니다. 동생이 잘되는데 안 그러냐?”
웃고 떠드는 사이 내가 내려간 무대에는 케이크 커팅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삼단의 케이크는 1미터도 넘을 것 같은 거대한 크기였다.
“나도 갔다 올게.”
준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대로 향했다.
진태와 각 계열사들의 사장들이 모여 커팅식을 진행하는 모양이었다.
뒤이어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강빈아 저긴 회장님이랑 사장님들이 가는 곳이야.”
“저는 밖에서 바람 좀 쐬고 오려구요.”
“아 그래. 난 또 저기까지 가려는 줄 알았어. 엄마가 오버했네. 다녀와. 너무 오래 비우지는 말고.”
영혜는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네.”
입구 쪽으로 걸어가던 중 방송국 관계자들이 모여있는 테이블이 보였다.
진태에게 초대해달라고 말한 보람이 있었다.
어떻게 말을 걸까, 고민하던 찰나에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하하. 축사 잘 들었습니다. 정말 감명 깊더군요.”
머리를 어깨까지 기르고, 화려한 무늬의 넥타이가 범상치 않았다.
“네. SCB의 홍해성 부사장님이시죠?
이 사람이다.
내가 굳이 진태에게 언질을 줬던 것도, 그리고 지금 일부러 바람을 쐬고 오겠다며 이곳을 지나쳤던 것도 다 이 사람 때문이다.
“저를 알고 계십니까? 이거 영광이군요.”
“제가 방송 쪽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말을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를 주목하고 있는 시선들도 있었고 웅성대는 소리 때문에 시끄러웠다.
입구를 손짓하며 말했다.
“나가서 얘기하실까요?”
“좋습니다.”
밖으로 나오자 여름밤의 시원한 공기가 불어왔다.
해성이 먼저 말했다.
“사실 제가 먼저 연락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홍부사장님이요?”
“네. 서대표님께서 여러 사업들에 투자한다는 소식을 들었거든요.”
역시 SCB 정도 되는 대형방송국의 부사장 자리에 위치하다 보니 정보가 빠른 모양이었다.
“그 말을 홍부사장님께서 계획하시는 사업이 있다는 것으로 들어도 되겠습니까?”
“네. 맞습니다. 서대표님. 얼마 전에 미국의 주방용품 박람회에 다녀오시지 않았습니까?”
“네. 뉴스를 보셨나 보군요.”
얼마 전에 희수가 나에 대해 언급했기 때문에 내가 주방용품 박람회에 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하하. 뉴스를 보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안 것은 아닙니다. 저도 주방용품 박람회에 다녀왔습니다. 픽앤픽의 제품을 관심 있게 보고 있었거든요. 직접 찾아가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해성이 픽앤픽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픽앤픽이 미국 홈쇼핑에 진출해서 대성공을 하는 것을 보고 이거다 싶었습니다.”
“한국의 홈쇼핑채널 개국 말입니까?”
“맞습니다. SCB 같은 대형 방송국에서도 간접적으로 제품을 홍보할 수는 있지만 한계가 분명하거든요.”
해성이 한 호흡을 쉬었다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저는 한국에 최초로 홈쇼핑 채널을 개국하려고 합니다. 서대표님께서 투자해주실 수 있습니까?”
해성의 표정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홍해성은 분명 사업적으로 소질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홈쇼핑 사업에서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사실 ‘행복홈쇼핑’은 예전에 큰 사고를 저지른 이력이 있다.
인조 유리로 만든 가짜 보석을 진짜처럼 홍보해 판매한 사실이 소비자 단체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당시 행복홈쇼핑이 성장궤도에 올라가고, 매출량이 급증하게 되면서 몇몇 직원들이 실적에 욕심을 부려 그저 매출이 좋을 것 같다는 이유로 가짜 보석을 제대로 검수도 하지 않은 채 방송을 통해 판매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해성은 검찰에 조사도 받는 등 나름의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후 해성은 담당했던 직원들을 해고하고 곧바로 대국민 사과까지 했지만 초기에는 돌아선 소비자에 적자를 면치 못했다.
하지만 청렴하고 질 좋은 제품들을 잘 찾아내 꾸준히 판매하면서 잠깐 주춤했던 행복홈쇼핑은 다시 성장궤도에 올랐다.
적자를 면치 못했던 케이블TV 채널에서 유일하게 3년 연속 흑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해성의 진심 어린 사과와 빠른 대처, 소비자 중심의 경영 방식으로 행복홈쇼핑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안된다.
해성이 그런 일을 애초에 못 알아보지 않도록,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내가 투자할 홈쇼핑은 오로지 성공만이 있어야 한다.
일단은 신중하게 그를 평가하고 우위에 선점하기 위하여 곧바로 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생각해 보고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GB택배 측으로 사업계획안을 보낼 테니 잘 살펴봐 주십시오.”
해성은 태선증권사가 아닌 GB택배 쪽으로 보낸다는 말을 했다.
그의 말은 나의 투자들이 태선증권을 통한 것이 아니라, 개인 투자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을 뜻하기도 했다.
그의 말에 동조해 나는 GB택배의 명함을 해성에게 건넸다.
해성도 자신의 명함을 주며 말했다.
“서대표님과 좋은 인연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군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연회장에서는 케이크 커팅식이 이제 막 끝났는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사람들은 와인 잔을 들고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샴페인이라도 뿌려댔는지 바닥 곳곳이 끈적했고, 종업원들이 바닥을 닦고 있었다.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진태가 나를 불렀다.
“어디 갔다 오는 게냐?”
“바람 좀 쐬고 왔습니다. 축사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진태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쓸데없는 겸손은 무슨.”
진태와 가까이에 있다 보니 주위에 온통 진태와 한마디라도 해보려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여러 기업의 대표들은 물론 정계의 인사들과 문화계의 거물들까지.
이미 자신의 세계에서 정상에 위치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진태에게 연신 굽신댔다.
그런 그들을 사이에 두고 진태가 나를 다시 소개했다.
“다들 인사하게. 이놈이 내 손자야. 하하. 아까 들어서 알겠지만 사업을 하고 있네.”
“대단하신 분들밖에 없는 것 같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서강빈입니다.”
나와 진태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시선이 집중되었다.
주변에 있던 노년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남달리 큰 풍채에 왼쪽 볼에 있는 큰 점이 시선을 끌었다.
“서회장님이 이렇게 챙겨주는 사람은 처음 보는데? 강빈이라고 했지?”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 남자의 얼굴 왠지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얼굴에 저 큰 점… 분명 전생에서 알고 있던 사람 같은데…
“택배인가 뭔가 하는 사업이 잘 된다고 들었네. 재벌가의 손자가 혼자서 새로운 사업을 한다니! 성공하겠어.”
“하하… 감사합니다.”
그래.
생각났다.
전생에서 한국경제를 뒤흔들었던 시초, 한국 외환위기의 스타트를 끊은 사람.
재계서열 1위인 태선그룹마저 위험에 빠뜨렸었던 한성그룹의 회장, 정한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