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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30화 (30/249)

#30화

강빈이 서재를 나가고 얼마 안 되어 채규가 들어왔다.

채규는 태선그룹의 창립 멤버로서 진태와의 사이가 깊고 태선그룹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특히 후계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항상 중립을 지키고 날카로운 조언도 서슴지 않았다.

서재 깊은 곳에 앉아 있던 진태가 말했다.

“강빈이가 내 도움을 거절했네.”

“강빈 군이요? 지금까지 회장님의 호의를 거절한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채규의 말대로였다.

누구도 감히 진태의 도움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진태가 줄 수 있는 도움은 일반인이 상상하기도 힘든 것들이기 때문이다.

진태의 표정은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나도 모르게 옛 생각이 난다고 말했어.”

“회장님은… 거침없으셨죠.”

채규 또한 진태와의 과거를 추억하는지 시선이 잠깐 허공에 머물렀다.

진태가 말을 이었다.

“강빈을 보니 후계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나는군. 오랜만에 묻세. 자네 생각엔 누가 가장 태선에 어울리는 것 같나?”

채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허, 자네가 말인가?”

어쩌면 진태보다 태선가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것이 채규였다.

채규의 정보력과 영향력은 진태를 제외한 태선가의 누구도 무시 못 할 정도였다.

진태는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전에는 재만이가 가장 낫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도 후계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서재만 사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선전자에 이어 태선중공업을 도맡으면서도 한국 내 업계 1위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세계 10위권 안을 달리고 있고요. 하지만 그뿐입니다. 이미 회장님께서 일궈낸 것 아닙니까? 후계에 어울릴 뿐, 태선에 어울린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진태는 채규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후계에는 어울리지만 태선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진태가 보는 재만도 딱 그랬다.

재만은 타고난 사업가라기보다 경영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실제로 재만이 태선전자를 이어받은 후에 태선전자의 주가는 조금씩이지만 확실하게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채규의 말대로 재만의 한계가 거기까지인 것이다.

“확실히 재만이는 포부가 없어. 그 큰 밥그릇을 지키기 바쁠 뿐이지. 다른 아이들은 요즘 어떤가?”

채규가 주머니에서 낡은 수첩을 하나 꺼냈다.

익숙하다는 듯 수첩을 편 채규는 빼곡히 적힌 정보를 축약해서 읽었다.

“서남순 사장이 운영하는 백화점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강빈 군과 동업한 뒤로 꽤 매출이 오르더군요. 다른 사업을 구상 중인 것 같은데 서남순 사장이 안전한 것만 시도를 하는 편이니 실패할 가능성은 낮을 것 같습니다. 서영만 사장의 태선보험은 요즘은 매출이 조금 떨어졌지만, 가입 선물을 두둑이 주는 혜택을 가진 보험상품을 출시하면서 여전히 업계 1위를 지키고 있고요. 서동만 사장이 최근 중동 쪽에 건설 계약을 따내서 태선물산의 주가가 올랐습니다. 그리고 서정순 사장은 다양하게 시도를 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나쁘진 않지만, 크게 관심을 가질 정도는 아닙니다. 서준만 사장님의 증권사 역시 비슷하고요.”

“결론은 다 무난하게 제 할 일만 하고 있다?”

채규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진태는 의자를 젖혀 천장을 바라봤다.

진태의 자식들은 진태를 닮아 모두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지금은 고전하고 있는 정순 마저 뛰어난 머리 하나로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한 인재였다.

하물며 다른 자식들은 어떻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태선이라는 이름이 주는 힘에 너무 취해 있었다.

자식들에게 너무 쉬운 길만을 안내해준 것이 아닌지, 진태는 후회되었다.

말없이 진태를 바라보던 채규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 그리고 강빈 군이 해외에서 설립한 GB로지스틱스와 국내 GB택배에서 현재 화제가 되고 있는 픽앤픽과 독점 계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만 해도 예상되는 수익이 수십억 단위를 뛰어넘습니다. 해외에서 설립한 또 하나의 회사이자 투자회사인 GB인베스트먼트에서 투자한 아마존닷컴이 이번에 창업을 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매출이 10만 달러가 넘었다고 합니다.”

전에 간단하게 강빈의 성과를 보고받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강빈은 진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규모의 투자들을 진행하고 성공시키고 있었다.

진태가 낮게 혼잣말을 했다.

“그놈이라면…”

***

그렇게도 가기 귀찮았던 태선의 창립기념회에 가는 날이다.

회사에서 업무를 마치고 바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가족들과는 따로 움직였다.

차의 앞 좌석에는 황비서가 앉았고 뒷좌석에는 혼자 앉았다.

“임기사, 되도록이면 천천히 가. 일찍 갈 필요 없어.”

“네. 대표님.”

괜히 일찍 가봤자 태선가의 사람들과 다정한 모습을 연출해야 한다.

아는 척을 안 하는 것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 테니 차라리 딱 맞춰 가야겠다 싶었다.

달리는 차 안, 창밖을 보며 진태에게 했던 말이 떠올렸다.

‘저는 방송국 분야의 사람들을 초대하면 좋겠습니다.’

‘방송국 사람?’

진태는 의외라는 듯 되물었었다.

방송국 사람을 만나려는 이유는 하나다.

필요하니까.

내가 곧 홈쇼핑 채널을 개국할 예정이니까.

“창립기념회에 초청된 방송국 관계자들 리스트 뽑아왔지?”

앞 좌석의 황비서에게 물었다.

“네. 읽어드릴까요?”

“아니야. 차 안인데. 내가 직접 읽지.”

황비서는 몸을 돌려 두 손으로 서류를 내밀었다.

황비서가 뽑아온 리스트를 쭉 읽었다.

리스트의 아래쪽에 내가 찾던 사람의 이름이 보였다.

‘홍해성.’

전생에서는 올해 하반기에 첫 홈쇼핑채널이 개국됐다.

바로 행복홈쇼핑.

그리고 행복홈쇼핑의 대표는 홍해성.

홍해성은 미국 유학 중에 홈쇼핑을 보고 사업적으로 괜찮다 싶어서 한국으로 건너와 이를 처음으로 들였다.

행복홈쇼핑은 한국 최초의 홈쇼핑이라는 메리트뿐 아니라 실제로 홈쇼핑 중에서도 인기도 좋았다.

이후 IMF 외환위기의 상황에서도 외국 자본을 유치하고 은행에서도 자금을 권할 정도로 드물었던 건실한 기업이었다.

나 역시 미국에서 진행된 픽앤픽의 홈쇼핑 진출에서 직접 홈쇼핑의 가능성을 몸소 느꼈고, 그래서 홍해성과 접촉해서 사업을 제안해 보고 싶었다.

홈쇼핑 사업을 시작할 건 확실할 텐데, 어떤 제안을 해서 홍해성이 함께하고 싶다고 느끼게 만들지가 관건이었다.

어느덧 태선호텔의 연회장에 도착했다.

이른 저녁이었지만 연회장에서 뿜어대는 빛들로 주변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차에서 같이 내린 황비서가 말했다.

“잘 다녀오십시오. 저랑 임기사는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아니야. 황비서도 퇴근하고 임기사도 먼저 들어가라고 해. 끝나면 알아서 갈게.”

“아닙니다. 오늘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자리기도 합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은근 고집 있는 황비서다.

황비서에게 손짓으로 알겠다고 흔들고, 곧장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호텔 종업원이 나에게 다가왔다.

미리 얼굴을 숙지 받았는지 곧장 나를 알아보았다.

“태선증권의 서강빈 본부장님! 자리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연회장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무대 위의 태선 임원인지, 각 계열사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형식적인 것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딱히 신경 쓰지 않고 마음대로 자리를 오가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연회장은 금색의 화려한 테이블이 불규칙하게 나열되어 있었고 테이블마다 금색 줄로 포인트를 준 고급스러운 검은 의자가 네다섯 개씩 붙어있었다.

종업원은 나를 가족들이 있는 자리로 안내했다.

나를 본 준만이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딱 맞춰왔구나.”

“네, 처리하고 와야 할 일들이 있어서요.”

딱 맞춰온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준만이 굳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영혜가 그런 준만을 가볍게 타일렀다.

“늦은 것도 아닌데 왜 그래요, 당신. 강빈이 오느라 고생했어. 앉으렴.”

자리에 앉고 보니 옆자리의 영빈이 긴장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툭 쳤다.

“왔냐.”

편하게 말하는 듯한 영빈이지만, 얼굴은 긴장이 많다.

그래도 준만이 시킨 대로 똑바로 옷을 갖춰 입고 왔다.

“강빈아! 준만이도 오랜만이네. 영빈이도 있고. 호호. 올케는 더 예뻐진 것 같아.”

옆테이블의 남순이 다가와 넉살 좋게 가족들에게 인사했다.

준만이 나 대신에 답했다.

“누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누구 덕에 잘 지냈지. 호호.”

영혜가 말을 이었다.

“그 누구가 강빈이죠?”

“올케도 잘 아네. 강빈이가 태선백화점에 굴러온 복덩이라니까.”

“고모가 강빈이 덕을 톡톡히 봤나 보네요.”

집안 행사처럼 편안하게 말하는 남순의 말에 영빈도 긴장이 풀렸는지 남순에게 말을 붙였다.

“그럼. 요즘 덕분에 행복해. 그보다 강빈이는 창립기념회에서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맞습니다. 창립기념회에는 처음 와봐요.”

“생각했던 것보다 별거 없지?”

“네, 고모가 있으니 낯설지가 않네요. 안 그래도 고모 한번 찾아뵈려 했었는데, 곧 태선백화점에 차린 임시매장 만료일이 가까워지잖아요.”

남순이 알고 있다는 듯 툭 내 어깨를 쳤다.

“맞아. 만료일이 다음 달이었지? MP3 체험장이 백화점에 생기고 나서 매출이 더 올랐더라. 체험해보기 위해 방문한 손님들이 다른 매장에 방문하기도 하고.”

“민폐 끼친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내가 겸손을 떨자 남순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MP3체험장이랑 디지털사운드 매장이 임시가 아니라 정식으로 태선백화점에 입점했으면 좋겠어.”

태선 백화점에서 독점적으로 판매하고 난 뒤 많은 수익을 냈다.

이후에 덕분에 태선백화점 외에도 매장을 지속적으로 늘렸다.

그래도 처음이 컸는지 지금도 매출 중에서는 태선백화점이 가장 컸다.

태선백화점에 있어서도 나쁘지 않은 수익을 가져다주니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태선백화점에 정식 입점하게 되면 저야 좋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수수료 말하는 거지? 음… 얼마가 좋을까.”

“20퍼센트로 가시죠. 다른 매장들은 그 정도 받잖아요? 저라고 특혜받을 수는 없죠.”

“그럴까? 그럼 지금 계약이 만료되기 전까지 내 사무실로 와 줘.”

“알겠어요. 고모.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만족스런 거래를 했다는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남순이 자리로 돌아가고, 마이크 소리와 함께 진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순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벌써 임원 소개까지 끝난 것이다.

낮고 중후한 진태의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웃고 떠들며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서둘러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진태의 축사였다.

“우리 태선그룹이 벌써 창립 5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태선이 국내 재계 서열 1위가 될 수 있게 도와주신 임직원들의 노고를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도 저를 믿고 태선을 가꾸어 나갑시다. 자랑스러운 태선인이 되어주십시오…”

태선의 힘.

진태의 축사에 사람들은 모두 진태의 말을 집중했다.

몇몇 이들은 진태의 말을 따로 적기도 했다.

자리에 앉지 못한 일부 직원들은 뒤에 서서 그런 진태의 축사에 두 손을 모으고 감격 받은 눈을 하고 있었다.

권력의 힘은 봐도 봐도 대단했다.

점점 진태의 말이 끝날 것 같을 때, 사람들이 이제 슬슬 집중력이 떨어질 때.

진태가 말했다.

“...하여 저는 오늘 한 사람을 이 자리에 올리려 합니다.”

진태에게 꽂혔던 시선이 일순 한곳으로 향했다.

“저희 태선증권의 서강빈 본부장. 이 자리에 올라와 이 무대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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