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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29화 (29/249)

#29화

영일제약에서 이사회를 소집했다.

에이즈 치료제가 개발되었다는 소식이 뉴스에 보도된 지 이틀이 지난 후였다.

급하게 소집된 이사회였지만 영일제약의 회의실로 모이는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밝았다.

회의실의 문을 열자 임원들과 주요 연구진들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양쪽으로 길게 이어진 테이블의 가장 안쪽에 있던 부규가 손을 들며 말했다.

“강빈 군은 내 옆에 앉게.”

“알겠습니다.”

부규의 부름을 받고 걸어가는 동안 앉아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귓속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부규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오랜만이기는, 이렇게 금방 볼 줄 몰랐네.”

“그런가요. 좋은 일로 뵈니 기쁘네요.”

내 말에 부규가 작게 웃었다.

부규의 옆에는 그의 아들이자 영일제약의 현 대표, 최수혁도 앉아 있었다.

얼굴이 무척 야위었지만 밝게 웃고 있었다.

“강빈 씨 소식은 아버지께 들었습니다. 저희 회사에 투자해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닙니다. 최대표님은 처음 뵙네요. 반갑습니다.”

수혁과 나는 가볍게 악수를 했다.

“그보다 아버지는 어떻게 설득하신 겁니까? 제가 아무리 말해도 고집을 꺾지 않으셨는데…”

부규가 흘기자 수혁이 말을 흐렸다.

“그게 뭐가 중요해? 그보다 강빈 군. 자네 투자 덕에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만들 수 있었어. 고맙게 생각하네.”

“제 작은 투자가 보탬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아, 아.”

그때, 발표자가 마이크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최부규 명예회장님, 최수혁 대표님, 회사 운영에 신경 써주신 모든 임원분들과 불철주야 몸을 아끼지 않고 치료제 개발에 힘써주신 연구진 여러분, 그리고 서강빈 태선증권 본부장님. 오늘 대한민국을 비롯해 전 세계의 에이즈 치료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열린 영일제약 이사회에 참석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에이즈의 원인이 되는 HIV바이러스에 신규 감염된 사람만 100만 명가량이 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에이즈 암흑기’라 불리는 이 시대에 록 허드슨과 프레디 머큐리 등 세계적 유명인사를 포함해 수천만 명이 이 병에 쓰러졌습니다. 이에 영일제약은…”

이후 영일제약의 성과와 방향성에 대한 말이 이어졌다.

에이즈 치료제의 핵심인 ‘KD GUO 1’를 추출했던 강성일 수석연구원을 비롯해 임원들의 연설이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부규가 발표대에 올랐다.

“안녕하십니까. 영일제약의 명예회장직을 맡고 있는 최부규라고 합니다. 존경하는 연구진분들,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하신 귀빈 여러분. 그동안 못난 회사와 함께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후천면역결핍증후군, 줄여서 에이즈라 불리는 감염증은 현재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있습니다. 저희가 만든 치료제가 모든 에이즈 환자를 치료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노력이, 피땀 흘린 시간들이 에이즈 종식에 일조하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동안 고생해주셨던 것에 보답 받을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부규가 허리를 숙여 모두에게 인사하자 박수 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부규가 내려오고 발표자가 개발한 에이즈 치료제에 대한 영상을 틀었다.

사람들은 그 긴 영상을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부규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다들 신이 난 모양이야. 저 지루한 영상에 집중할 정도로.”

“그럴 만하지 않습니까. 영일제약의 기업가치가 비약적으로 오르고 있고 국내외 언론에서도 신약 개발을 주목하고 있으니 말이죠.”

“그렇지 않아도 문의 전화가 끊이질 않고 있어. 전화기를 몇십 대 더 들였는데도 부족할 지경이네.”

힘들다는 듯이 말하지만 얼굴은 기분 좋아 보였다.

연구원들은 저마다 고생했다며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3상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지원자들이 많네. 독성이 거의 없는 유일한 한방 치료제기 때문에 부담이 없기 때문이겠지. 2상이 문제였지. 3상이 실패할 일은 없으니 걱정은 하지 말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성공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한 적은 없었다.

이 당시 서방 의료법은 에이즈 바이러스를 공격하는 데 초점을 맞췄지만, 영일제약이 개발한 한방 치료제는 에이즈 바이러스를 저지하고 면역기능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더욱 여일제약의 신약개발이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지금, 특허권을 가져올 때라는 것도.

한껏 들떠있는 부규를 향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3상이 실패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영일제약은 반드시 에이즈 치료제로 성공하겠죠. 그러니 상용화되기 전인 지금, 조지타운대학교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특허권을 독점해야 합니다.”

내내 웃고 있던 부규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말도 안 되는, 파격적인 말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무슨 의미인지 파악했는지 부규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들은 이 열기에 취해 자축하기 바쁜데 자네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일리 있는 말이야. 자네가 생각하는 보상금은 어느 정도인가?”

“200만 달러입니다.”

나는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답했다.

실제로 영일제약이 조지타운대학교에 지급하는 보상금도 200만 달러였다.

명목상은 영일제약과 조지타운대학교의 공동연구였지만 치료약물을 추출해낸 것도, 투자금의 지분이 높은 것도 영일제약이었기 때문에 조지타운대학교도 만족할 만한 돈이었다.

부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생각과 비슷하네. 그렇지 않아도 수혁이를 미국으로 보낼 예정이었어.”

“좋습니다. 추가로 필요한 투자금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부규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벌써 말인가? 바쁜 사람을 잡을 수는 없지… 다음에는 내 집무실로 한번 찾아오게.”

“네, 방문하겠습니다.”

아쉬워하는 부규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여전히 시험 성공에 대한 열기에 휩싸인 회의실을 조용히 나왔다.

영일제약.

3상에 이어 최종 승인까지 받게 된다면 얼마까지 벌게 될까?

매출액이 앞으로 최소 1년에 1조 원 가까이 될 것이다.

내가 받게 될 돈은 5퍼센트인 500억 원.

거기에 더해 세계제약회사에 낸 특허권의 로열티까지 합치면 연마다 벌어들일 돈은…

한 1000억 되려나.

특허권 기간이 끝나기까지 벌어들일 돈이 감도 잡히질 않았다.

***

일요일이다.

오늘은 회사 대신 태선가로 향했다.

입구에 마중을 나온 김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여전히 화려했다.

벽에 걸려있는 온갖 화려한 그림들은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의 가격일 테고.

진태가 수집한 그림과 조각품들로 나중에 미술관을 세울 정도였으니.

서재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지만 나는 문을 살짝 두드렸다.

“회장님. 저 강빈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너라. 문은 답답해서 열어둔 것이니 그냥 두고.”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본 진태.

여전히 강인한 눈매를 갖고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안 본 사이에 더 젊어지신 것 같습니다.”

진태가 피식 웃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아부하는 말이 다른 놈들과 다르지 않구나. 오랜만이다. 잘 지냈느냐.”

“네. 저는 여러모로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바쁜 게 잘 지내는 거 아니겠습니까?”

진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듣기로도 바쁘게 지내는 것 같더구나.”

“회장님께서는 그간 별일 없으셨습니까?”

“늙은이가 별일이 뭐가 있겠어. 여생을 보내는 거지.”

여생이라.

그 말을 믿는 사람이 있을까?.

여전히 회장의 자리를 놓지 못하고 있는 진태였다.

각 계열사의 중요한 안건들의 최종승인자 임은 물론, 각종 문화재단의 이사장 일을 오더 내리고 있으며 딱히 일이라 할건 아니지만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위원 자리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회사를 세웠다면서. 한국에 있어도 되는 거냐?”

벌써 미국에 회사를 차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진태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태선가의 정보력이라면 이미 내가 세운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상세하게 보고 받았을 테면서.

나는 어차피 다 알고 있으실 거라 생각이 드니 그냥 간단하게만 말했다.

“작은 투자 회사입니다. 제 역할을 수행할 사람은 시애틀에 두고 왔습니다.”

“그래. 이번에도 태선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 네 이름으로 회사를 만들었구나. 집안에는 아예 욕심이 없는 게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망설여졌다.

욕심이 없다고 하면 나를 배포가 없는 놈으로 볼 것이고, 욕심이 있다고 하면 내 이름을 걸고 만든 GB회사들을 태선의 이름으로 돌리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에둘러 대답했다.

“언젠가는 태선의 이름을 빌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회장님께서 저를 인정하기 전까지 태선의 이름을 쓰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 이름을 건 회사들을 키워 인정받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질문과는 동떨어진 대답이구나.”

진태는 내 대답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

진태가 원하는 대답을 하게 된다면, 나에게 또 어떤 이야기를 할지 모르니.

아무 말 없는 나를 지켜보던 진태가 웃었다.

“네 대답이 맞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또, 제 답이 회장님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뭐, 나쁘지는 않은 대답이야. 그럼 그건 됐고. 고지식한 부규를 잘도 구 삶았더구나.”

“회장님이 소개해주신 덕분입니다.”

“부규는 내 지위를 의식하지 않는 유일한 놈이야. 그런 영일제약에 투자를 했던 건 오롯이 네 능력이다.”

진태가 칭찬하는 일은 거의 없다던데.

그런 진태에게 인정을 받은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번에 부탁을 들어줬더니, 능력을 잘 발휘하는 것 같아 내가 또 도와줄 일이 있는지 물으려고 불렀다.”

하긴. 나는 그동안 진태의 저택에 올 때마다 무언가를 얻어갔으니까.

처음에는 용인 부지, 그다음은 부규의 소개.

진태가 나를 자신의 서재로 부른 것은 내가 한 성과를 인정하고 무언가 보상을 하려는 심리일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은 진태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 도움을 받았을 때는 내 기반이 없었고, 두 번째 도움을 받았을 때는 진태의 도움 없이는 진행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나도 안정이 되었다.

굳이 진태에게 또 무언가를 받아낸다면 거기에 대한 성과를 보여줘야 하고, 결국 진태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의 결과를 내게 강요할 수도 있으니까.

“없습니다. 그저 제 작은 성과가 회장님의 즐거움이 되었으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진태의 표정이 묘해졌다. 놀란 것 같으면서도 살짝 미소가 지어지는 게...

지금껏 태선가의 사람들은 진태의 눈치를 보며 계열사를 받아먹기에만 바빴지,

자신의 힘을 다해 사업을 개척한 이는 없었다.

진태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나뿐일 테고.

“혼자의 힘으로 이루려는 너를 보면 가끔 옛 생각이 난다. 나도 한때 그랬던 적이 있었지. 그래서 네놈이 어디까지 갈까, 어디서 고꾸라질까 참 궁금하단 말이지. 지켜볼 테니 어디 잘해보거라.”

지켜보겠다.

준만을 통해서 진태가 내게 했다는 걸 이미 들었던 말.

하지만 실제로 들으니 그 느낌이 달랐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게 끝이 아니라는 듯 진태가 말을 이었다.

“다음 주에 있을 창립기념회가 있다는 거 알고 있지? 내 거기 단상 위에 널 세울 게다.”

창립기념회에서?

“제가 혹시 축사라도 하는 겁니까”

“그렇지. 태선가에 다리 대고 있는 사람들은 다 모이는 자리이니 특히 신경 써서 오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살짝 부담되는 자리이지만 일단 알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다음에 들려오는 진태의 말.

“다들 오는 자리이기도 하고, 너도 처음 제대로 와서 인사를 나누는 자리일 테니, 네 사람들도 불러라. 아니면 뭐 불러줬으면 하는 사람이 있느냐?”

창림 50주년 기념행사.

태선가의 사람들이 다 모이는 사람.

대한민국 정계, 예술계, 법조계 어디든 오고 싶어도 쉽게 올 수 없는 자리.

그런 자리에 진태가 나에게 누군가를 초대할 권리까지 주겠다고..?

갑자기 엄청나게 많은 권한을 부여받은 것 같았다.

그러면서 내 머릿속을 요즘 차지하고 있는 그게 떠올랐다.

어떤 특정 사람이 아닌 한 분야.

진태를 향해 조심스레 던졌다.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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