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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28화 (28/249)

#28화

김포공항에는 황비서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황비서는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는지 무척 수척해 보였다.

그럼에도 목소리엔 활기가 넘쳤다.

“본부장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황비서가 고생 많았어. 오랜만에 본부장 대행해보니까 어때?”

황비서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지시하신 일을 저는 그냥 따를 뿐이죠.”

“그래도 항상 열심히 해주니 내가 고맙네.”

“아닙니다. 좋게 일할 수 있도록 해주시 잖아요. 캐리어는 제가 들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캐리어를 황비서에게 넘겼다.

황비서와 함께 공항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영일제약 측에 미팅 잡았어?”

“대표님이 미국에서 돌아오시고 난 이후에 이사회를 소집하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대표님이 돌아오셨으니 늦어도 이번 주 안에는 이사회가 열릴 겁니다.”

똑부러지는 황비서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즈 환자들은 한국보다 해외에 훨씬 많았다.

세계적인 아티스트와 스포츠 스타들이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후, 그 관심은 꾸준히 이어졌었다.

에이즈의 치료제 개발이 해외언론 쪽으로 보도를 타게 되면서 엄청난 관심이 쏟아지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영일제약은 투자금에서 남은 200만 달러를 조지타운대학에 지급함으로써 에이즈 치료제 특허의 세계 독점판매권을 취득할 것이다.

“영일제약은 이제 시작이야. 앞으로 관련 자료나 기사들을 추려서 보고해.”

“네. 대표님.”

매출액의 5프로였지만 영일제약과의 투자로 얼마를 벌게 될지 상상조차 되질 않는다.

***

오랜 시간 미국에 다녀와서인지, 집에 오자 가족들이 다 같이 나를 반겼다.

준만이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느라 고생 많았다. 미국에서는 무슨 일을 하고 온 거냐?”

“어머, 여보. 강빈이 이제 막 한국에 왔어요. 그런 얘기는 나중에 천천히 해요.”

준만은 머쓱해 하며 머리를 긁었다.

그때, 방에서 나온 영빈이 나를 반겼다.

“요새 너무 열심히 일하는 거 아니야? 쉬엄쉬엄해.”

“젊을 때 더 열심히 해야지. 형은 요새 그림 잘 그려져?”

대답은 옆에 있던 영혜가 대신했다.

“영빈이 요새 공모전 나가느라 바빠. 상도 벌써 몇 개 탔어. 확실히 재능은 있나 봐.”

“그게 뭐 별거라고…”

쑥스러워하는 영빈의 모습이 귀여웠다.

전생의 나에게 자식이 있었다면 저 나이쯤 됐으려나?

영혜가 이어서 말했다.

“강빈이 일단 앉아서 TV라도 보면서 쉬어. 강빈이 온다고 굴비 준비했으니까 저녁 맛있게 먹자.”

“네. 어머니. 기대되네요.”

한껏 미소를 지어 보이고 소파에 앉았다.

그런 나를 보며 준만이 따라 앉았다.

“같이 뉴스나 볼까.”

TV를 켜자 뉴스가 흘러나왔다.

“금일 오전 ‘KD GUO 1’로 불리는 치료약 추출에 성공한 곳으로 알려진 영일제약이 진행하고 있던 에이즈 치료제가 2상 임상 시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영일제약은 이전에 …”

나는 어제 황비서의 메일을 통해 들었지만 준만은 흥미로웠는지 고개를 내밀어 뉴스를 봤다.

역시나 준만은 아직 나와 영일제약이 투자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다.

“에이즈 치료제가 우리나라에서 개발이 됐어? 우리나라의 기술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아직 2상이 끝난 거예요. 뭐 거기까지 성공했으면 다 된 거나 다름없긴 하지만.”

이어지는 영일제약의 내용은 나도 이미 보고받았기 때문에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다.

영일제약에 대한 보도가 끝나고 현 노동부장관이 뇌물수수 혐의로 사표를 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뉴스를 보면 기억하고 있던 내용과 생각지 못했던 내용이 섞여 있으니 재밌었다.

뉴스가 끝날 때쯤 되자 픽앤픽의 소식이 들렸다.

“다음 소식은 미국에서 성공한 픽앤픽, 금의환향입니다. 한국에서는 부진했던 픽앤픽이 미국 홈쇼핑에 진출해서 단기간에 매진되었었다고 이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해외 명성을 업고 국내 시장에서도 픽앤픽을 연호하며 매장마다 매진을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과연 당사자의 반응은 어떨지, 픽앤픽의 최희수 대표의 인터뷰를 진행하겠습니다. 안 기자?”

이어서 희수의 얼굴이 방송에 비쳤다.

희수는 조금 어색한 미소를 하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선 감사를 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저희 픽앤픽이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는 이유는 태선증권의 서강빈 본부장님 덕이 큽니…”

갑작스러운 내 얘기에 당황해서 TV를 껐다.

같이 뉴스를 보던 준만은 물론, 옆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영혜와 영빈까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준만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게 무슨 소리냐?”

“아 별일 아니에요.”

“미국에 간 게 픽앤픽 때문이었어? 언제 주방용품까지 진출한 거야?”

“아닙니다. 픽앤픽은 제가 설립한 GB택배와 동업 관계에 있는 곳입니다. 저는 그냥 도움을 준 거고요.”

당황해서 해명하는 사이에 영혜가 와락 나를 껴안았다.

“우리 아들. 이제 TV에서도 좋은 모습으로 나오고 정말 달라졌구나. 엄마는 네가 자랑스럽다.”

하긴, 서강빈이 망나니 시절, 뉴스에도 여러 번 보도될 정도로 사고를 많이 치긴 했었지.

영빈도 영혜의 옆에 서서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준만은 묵묵히 나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찬장에서 반투명한 양주 한 병을 꺼냈다.

영혜가 질색하며 준만의 등을 쳤다.

“여보! 당신 술 줄이기로 했잖아요.”

“에이, 당신도 참. 아들이 좋은 일로 뉴스에 나왔는데 오늘 같은 날 아니면 언제 마시겠어?”

“전에 강빈이가 차린 GB택배도 뉴스에 나왔잖아요. 오늘이 처음도 아닌데 뭘 그렇게 난리예요?”

GB택배는 한국 첫 택배이고 그뒤로 열린 여러 사업들과 성과가 엄청났기 때문에 뉴스에 꽤 여러 번 보도됐었다.

인터뷰 요청도 꽤 들어왔었고.

준만이 술을 높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 그땐 강빈이가 집에 없었고! 오늘은 다 같이 있잖아.”

“에휴, 알겠어요. 대신 조금만 마셔요.”

영혜의 단호함에 준만은 반병만 마시기로 약속했다.

아주머니께서 밥이 다 됐다고 하자 가족들은 하나둘 식탁에 앉기 시작했다.

식탁에는 각종 반찬들이 즐비해 있었고 가운데에는 노릇하게 구워진 굴비 네 마리가 입을 벌린 채 누워 있었다.

준만이 먼저 굴비의 살점을 뜯어 입에 가져갔다.

“네 엄마가 법성포까지 직접 내려가서 구해오더라.”

“네? 어머니가 직접 갔다 오셨어요?”

영혜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럼. 우리 막내 먹이는 건데 그 정도는 갔다 와야지. 아들 먹일 건데 직접 가야지.”

“어머니. 아무리 그래도 아들이 택배사 대표인데 택배를 이용하셔야죠. 다음부터는 고생하지 마시고 저희 GB택배를 이용해주세요.”

광고에 나오는 연예인을 흉내 내며 말하자 영혜가 깔깔대며 웃었다.

영혜는 전처럼 굴비의 살점을 발라 내 밥 위에 올려놓았다.

“어머니도 드세요.”

“엄마는 알아서 다 먹고 있어. 우리 강빈이 많이 먹어.”

밥을 어느 정도 먹자 준만이 양주의 뚜껑을 땄다.

계피 향이 섞인 술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너희들도 한 잔씩 할래?”

“그럼 한 잔만 받겠습니다.”

“저는 안 마실래요.”

술을 즐기지 않는 영빈은 거절하고 나는 준만에게 한 잔을 받았다.

향처럼 계피맛이 나진 않았고 쓰면서 단맛이 났다.

오랜만에 술잔을 입에 댄 것 같다.

준만이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뭘 하고 온 거야?”

“해외에서 새로운 물류사업을 진행하고 투자회사를 차렸어요.”

영혜가 이어 질문했다.

“새로운 물류사업이라면 해외의 GB택배 같은 거야?”

“네. 비슷해요. 아까 인터뷰했던 최희수 대표와 동업한다는 것도 이쪽 일이에요.”

준만의 빈 잔에 한 잔을 올렸다.

“택배는 스케일이 더 커진 거고, 해외에 투자회사는 왜 차린 거냐? 해외 쪽으로도 아는 게 있는 거야?”

“네. 제가 눈여겨본 곳들이 있어서요. 재미교포 출신의 친구가 있어서 해외 쪽은 앞으로 그 친구가 맡기로 했어요.”

영혜가 반색하며 말했다.

“어머, 그럼 우리 아들은 계속 한국에 있는 거야?”

“그래야죠. 한국에 일도 많은걸요. 왔다갔다 하겠지만,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당분간은 한국에 머물러야죠.”

“그럼 집에 일찍일찍 좀 와. 늦게 오지 말고. 저녁은 그래도 집에서 먹어야 하지 않겠니?”

“네. 노력할게요.”

영혜는 그런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갑자기 준만을 흘겼다.

“네 아버지는 네가 없을 때, 그렇게 네 칭찬을 하더니 네 앞에선 막상 별말이 없네.. 당신, 강빈이한테 직접 칭찬도 하고 그래요!”

준만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영빈이 호주머니에 MP3를 꺼내 흔들며 말했다.

“강빈이 네가 준 MP3도 잘 사용하고 있어. 워크맨이랑 다르게 밖에 나갈 때도 편하고 진짜 좋더라. 이걸 네가 투자한 회사에서 개발했다는 게 잘 믿기지가 않아.”

“새 버전 나오면 출시하기 전에 선물로 줄 테니까 기대해.”

영빈의 마음에 꼭 들었나 보다.

MP3는 출시되자마자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선물했었다.

영혜와 준만은 필요 없다고 사양하더니 역시 잘 쓰지 않는 것 같고.

그래도 영빈은 잘 쓰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오랜만에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새삼 내게 가족이 생겼다는 게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듯 준만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한숨을 쉬던 준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참, 중요한 이야기를 빼먹을 뻔했네. 다음 주에 태선그룹 창립기념회 있는 거 잊지 않았지? 다른 때면 몰라도 이번 창립기념회는 50주년이니까 다들 잘 준비해서 오도록 해. 그리고 강빈이 너는 그동안 나온 적이 없잖아. 이번엔 꼭 와야 한다.”

“네. 아버지.”

태선의 창립기념회라…

태선의 창립기념회는 태선그룹 산하의 임원들뿐만 아니라 각 그룹들의 대표, 정계 쪽의 유망한 사람들이 대거 참석하는 자리였다.

전생에서도 장필준을 통해 나 역시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갈까 했다가도 가서 내가 뭘 하겠냐 싶어서.

권력을 가진 이들을 보며 똥개처럼 살랑살랑 꼬리만 흔들어야 되는 자리일 텐데.

그래서 안 갔다.

글쎄 이번에는…

생각에 빠진 나를 영혜가 불렀다.

“강빈이는 사업 시작했으니까 눈도장 찍어야지. 네가 잘하고 있으니까 회장님께서도 좋게 보고 계실 거야. 그리고 영빈이. 이번에는 꼭 정장 입어야 돼? 운동화 말고 구두! 알겠지?”

“알겠어요. 대신 정장 색은 제가 정해도 되죠?”

영빈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50주년을 맞이한 창립기념회면 이 전의 태선

나의 사업 규모도 어느 정도 커졌으니 나를 보는 시선들이 달라졌겠지

가게 되면 제법 귀찮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진태를 떠올리며 다짐했다.

‘태선가에서 슬슬 내 입지를 키워야 돼.’

그때 집안에 전화 소리가 울렸다.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전화를 받더니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서사장님! 회장님 비서라는데요?”

“뭐? 이실장님?”

준만이 빠른 걸음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예. 이실장님 전화 받았습니다. 예예. 예. 예? 알겠습니다. 제가 전하도록 하죠.”

전화가 진행될수록 준만의 표정이 긴장에서 당혹, 부담에서 결연함이 엿보였다.

전화를 끊은 준만의 얼굴이 나를 향했다.

“강빈아.”

“네. 아버지.”

“이번 주 일요일에 회장님댁으로. 호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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