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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27화 (27/249)

#27화

희수가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희수는 내게 우호적인 현아가 내가 말하는 조건을 최대한 맞추자 할거라 생각했나 보다. 그래서 일부러 현아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게 말을 꺼낸 것 같았다.

나는 먼저 조건을 물었다.

“대표님. 혹시,어제 구두로 말했던 것 외에 필요한 조건이 있으십니까?”

희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말씀드렸던 것처럼 최대표님 편의에 맞춰드리겠습니다. 말씀해보시죠.”

“사실… 계약을 한다고 해도 지금 당장 서본부장님 택배사에 지급할 돈이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QBC에서의 성공으로 벌어들인 돈은 고스란히 재투자에 들어갔을 테니.

미국 시장 진출을 확정하고 미국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저기 지금은 투자해야 될 곳이 많을 것이다.

나는 준비한 답을 말했다.

“그 말씀은 몇 달간 택배 수수료를 제외해달라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다만 시간이 필요합니다. 미국에도 장기적인 수출에 대비해 공장을 세우려면 자금이 필요해서요. 괜찮으시다면, 앞으로 세 달 동안의 계약금과 수수료를 추후에 지급해도 되겠습니까?”

희수의 말에 대한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지만 나는 고민하는 척 뜸을 들였다.

희수의 제안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고, 앞으로 내가 내걸 조건에 있어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예상하건대, 픽앤픽이 미국 시장에서 완전히 압도하기 시작할 때는 앞으로 반년 뒤였다.

그동안 픽앤픽이 수익을 내고 택배 수수료까지 지급하기에는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희수는 세달이라고 말했지만 공장까지 세우려면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GB로지스틱스와 GB택배가 픽앤픽의 제품배달을 독점 계약할 시, 반년 동안은 택배 수수료를 받지 않겠습니다. 대신 이후 계약금을 지불하고, 반년 동안은 기존수수료의 2배를 지급하세요. 이후에는 원래 수수료로 받겠습니다.”

희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 픽앤픽의 반년보다 이후 픽앤픽의 매출이 독보적으로 높아질 거라는 건 희수의 입장에서도 확실해 보일 것이다. 그렇다는 건 이렇게 계약을 하게 되면 희수가 내게 지급해야 할 수수료의 총량이 늘어난다는 것이고.

하지만 희수의 입장에선 당장의 택배 수수료를 감당할 여력이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미국의 택배사와 계약을 했었으면, 빚을 낸다거나 지어야 할 공장을 일단은 미룰 테니까. 그렇게 치면 지금 가장 생산을 해야 할 때를 놓쳐버리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

그러니 희수의 입장에선 내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재투자해야 할 곳에 조금 더 여유롭게 투자가 가능할 테니까.

누가 봐도 픽앤픽은 당장의 사업체 규모를 키우는 일이 더 급했다.

나로서는 크게 급한 것이 없으니 오히려 이후에 더 많은 수수료를 돌려받을 수 있는 것이 좋고.

“서본부장님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좋습니다. 조건변동은 제가 기입하겠습니다.”

계약서를 겹쳐 사인을 마치고 희수와 나누어 가졌다.

6개월 뒤, 2배가 된 택배 수수료가 들어오기 시작하면 수백억 원의 수익은 우스울 정도의 돈들이 나에게로 들어올 것이다.

때마침 자리를 비웠던 현아가 돌아왔다.

“뭐야. 대표님, 저 없는 사이에 계약을 마친 거예요?”

“응. 서본부장님하고 얘기 잘 됐어.”

나는 희수에게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표님과 둘 다 만족할 수 있을 만한 계약을 했어요.”

“그럼 다행이네요. 계약까지 하게 되고. 정말 인연이라는 게.. 다른 건 몰라도 강빈 씨는 저희 가족의 은인입니다. 앞으로 또 잘 해봐요.”

“네, 서로에게 이득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앤을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까지 시간이 남아, 기다리면서 픽앤픽의 사업과 택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약속 시간이 다 되자, 앤과 만나기로 한 한인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앤을 만나기로 한 곳은.

한인타운 안에서도 제법 큰 한정식 식당, 편애옥이었다.

우거진 소나무가 편애옥의 커다란 한옥 두 채를 감싸고 있어서 고풍스러운 느낌이 돋보였다.

희수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한인타운 안에 이런 한옥이라니, 오히려 이곳이 더욱 한국 같은데요?”

“하하. 그러게요. 저기 있는 우물은 요즘은 많이 사라졌는데.”

미국에 온 지 꽤 돼서 한국이 조금 그리웠는데 그래서인지 이곳의 분위기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한옥 안의 룸으로 들어갔다.

앤이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앤이 일어나 우리를 차례로 반겼다.

“강빈 씨! 정말 보고 싶었어요.”

“저도 그렇게 헤어지고 앤 씨를 다시 뵙고 싶더군요.”

우리는 서로를 보며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나에 이어 희수, 현아까지 앉자 앤이 말을 꺼냈다.

“픽앤픽이 성공할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반응이 뜨거울 줄은 몰랐습니다”

희수가 말을 이었다.

“앤 씨의 연출 능력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성공할 제품을 소개했을 뿐이죠. 그보다 오늘 이렇게 자리를 만든 이유는 픽앤픽을 다른 프로그램에 소개하고 싶어서예요.”

“다른 프로그램이요?”

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에 전복죽과 샐러드가 나왔다.

현아는 몹시 궁금했는지, 종업원이 음식들을 내려놓고 나가기도 전에 말했다.

“다른 방송국의 프로그램을 말하는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저희 방송국에는 픽앤픽이 참여했던 프로그램보다 더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있거든요. SV(Speciale Value)라는 프로그램이에요.”

“SV라면…”

현아와 희수가 놀라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SV는 말 그대로 특별한 제품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으로 QBC 내에서도 시청률이 꽤 높은 편에 속했다.

시청률이 가장 높은 저녁 시간대에 방영하는 프로그램으로 유명 연예인들이 패널로 참여하여 직접 제품을 사용해보기도 하고 후기를 남겨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프로그램.

상품성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하고, 기능이 검증된 우수한 제품들만 소개하기 때문에, SV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도가 높았다.

최근, SV에 출연했던 고무 재질의 식판은 편리함과 안정성을 갖춘 제품이었는데, 방송 직후 미국 전역에 엄청난 인기를 끌며 화제 몰이를 했었다.

희수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초대를 해주시면 저희는 꼭 하고 싶습니다.”

“좋아요. 픽앤픽이 SV에 출연하기로 결정했다고 방송국에 전달할게요.”

어느새 현아의 눈은 그렁그렁해졌다.

나는 현아에게 휴지를 건네주며 말했다.

“우선 먹고 더 얘기하시죠.”

“한국 음식은 처음 먹는데 맛있어 보이는데요?”

전복죽을 한입 떠서 먹어보니 편애옥이 유명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전복죽은 비린 향이나 과한 맛이 없이 깔끔했다.

앤도 한입을 떠먹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와 게살로 이루어진 계절 냉채가 나왔고 이어서 문어숙회, 궁중요리인 탕평채와 신선로, 그리고 신선한 육회와 굴비가 나왔다.

중간에 나온 김치는 백김치에 가까웠는데, 매운맛이 거의 없어 앤도 맛있게 먹었다.

종업원이 장어 양념구이를 나오는 것을 보고 앤이 지쳤다는 듯 말했다.

“음식들이 다 맛있기는 한데 정말 끝이 없네요? 원래 한식당이 이런 건가요?”

앤의 말에 희수가 넉살 좋게 받아쳤다.

“이곳이 특별한 겁니다. 앤 같은 손님을 초대할 때 오는 곳이죠.”

그 외에도 계속해서 음식들이 나왔지만 나도 배가 불렀기 때문에 반 정도는 남겼다.

마지막으로 과일들과 수정과가 나왔다.

수정과를 한입 마신 앤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뭐죠? 매워서 눈이 아픈데요?”

현아가 앤을 보며 웃음을 참았고 희수가 차분하게 말했다.

“한국의 전통차입니다. 생강과 계피를 끓인 물에 꿀을 넣은 차죠. 앤의 입맛에는 안 맞나 봅니다.”

말을 마친 희수는 종업원을 불러 식혜를 시켰다.

종업원이 곧바로 식혜를 가져왔다.

앤은 식혜를 마시며 매운 기를 없애고 나에게 말했다.

“강빈 씨. 주방용품 박람회에서의 퍼포먼스를 보고 정말 감탄했습니다. 저희 방송국으로 영입하고 싶을 정도였어요.”

“우연하게 잘 된 거죠. 그 정도는 아닙니다. 하하”

“아뇨. 강빈 씨는 영업으로 갔어도 분명 크게 성공했을 거예요. 현아 씨한테 강빈 씨가 무슨 일 하고 있는지 들었어요. 한국에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고 태선증권에서도 일하고 계신다면서요? 그 많은 일들을 해내는 것을 들었을 때 다른 사람이었다면 믿지 않았겠지만 강빈 씨는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많이 들었던 칭찬이지만, 뭐라 답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영입은 포기했지만 대신에 강빈 씨에게 동업을 제안하고 싶어요.”

“동업이요?”

대충 예상은 했지만, 동업이라니.

듣던 희수와 현아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앤을 바라봤다.

“네. 픽앤픽의 밀폐용기의 성공 가능성을 알아본 것도 강빈 씨라면서요? 앞으로 그런 제품을 발견했을 때 저한테 연락을 주시면 저는 그 제품을 소개해 돈을 벌고, 그 일부를 강빈 씨에게 지급할게요. 괜찮지 않나요? 나쁘지 않은 수익을 얻을 수 있으실 거예요. 이번에 제가 받은 인센티브만 얼만지 아세요?”

그렇겠지.

특히 이번 픽앤픽은 앤이 주방용품 박람회에서 직접 발굴해낸 거니까.

두둑하게 인센티브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 인센티브의 일부를 나에게 준다고 하면서 동업을 제안하는 거라니.

기분이 꽤 좋았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했던 건 내가 픽앤픽을 보며 구상한 사업이 있었기 때문.

나는 앤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둘러 거절했다.

“말씀을 감사하지만 저는 이제 곧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바쁜 일상을 보내야 합니다. 그래도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앤이 아쉬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안 되네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역시 쉽게 포기하지 않는 앤이었다.

앤이 말을 이으려고 하는데 나는 공항에 갈 시간이 되었다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죄송하지만 저는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LAX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해서요. 다들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래요. 한국에서 봅시다. 서본부장님.”

“강빈 씨, 조심히 가세요. 한국에서 봐요.”

앤이 여전히 아쉬운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언제라도 같이 동업할 생각이 생기면 연락 주세요.”

그런 그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편애옥을 나왔다.

***

곧장 도착한 공항.

퍼스트 클래스로 예약을 해뒀던 터라, 빠르게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나는 미국에서의 일들을 천천히 생각했다.

픽엔픽의 제품은 그 자체로도 잘 만들어졌지만, 어쨌든 홈쇼핑이라는 판매 수단을 잘 이용하여 성공의 길로 오를 수 있었다.

픽앤픽 만큼이나 미국에서 눈여겨봤던 것은 바로 홈쇼핑.

생각해 보니 아직 한국의 홈쇼핑은 시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몇 개월 뒤부터는 케이블 방송이 열리게 되면서 한국의 첫 홈쇼핑이 열리고

2000년대 초반이 되면 수조 원의 시장이 형성된다.

하지만 초기의 TV홈쇼핑은 시원하게 망한다.

최초로 판매한 상품이 만능리모컨과… 뻐꾸기시계였나?

만능리모컨의 판매량이 불과 10개 내외였다는 기사를 봤었던 것 같다.

TV홈쇼핑은 현재 대중들에게 익숙한 구매 방식이 아니다.

인터넷 쇼핑은 당연히 없었을 때였고, 물건을 실제로 보지도 않고 사는 것에 신뢰도가 없었다.

매력적인 상품도 없었고, 시청자 수도 적었기 때문에 큰 실적은 올리지 못했었다.

후에 사내 직원의 인터뷰에는 조금이라도 판매 수를 올리려 직원들을 동원해 제품을 구매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케이블 TV가 빠르게 보급되고 외환위기 사태를 겪으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오프라인 매장보다 저렴한 가격과 파격적인 할인, 그리고 집에서 간단하게 주문할 수 있다는 편리함이 연평균 70프로의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하게 된다.

내가 홈쇼핑 사업을 직접 하면서 초기 TV 홈쇼핑의 문제점을 개선시킨다면 그 성장세를 좀 더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신용카드의 보급률도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었고, 벤처 붐도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TV홈쇼핑에서 판매한 제품들의 배송을 GB택배에서 전담한다면, 내 사업체들로만 수익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지금이 바로 한국에서 TV홈쇼핑을 시작할 적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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