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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26화 (26/249)

#26화

호텔 방 안에 설치된 TV를 켜자 애니메이션 아이언맨이 방영되고 있었다.

지난 삶, 아이언맨 영화를 즐겨봐서 살짝 흥미가 생겼지만 이내 QBC로 채널을 돌렸다.

오늘은 픽앤픽의 밀폐용기가 처음 홈쇼핑에 진출하는 날이니까.

QBC에서 치른 픽앤픽의 홈쇼핑 데뷔전은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앤의 연출지시에 따라 쇼호스트는 음식물이나 음료수를 픽앤픽의 밀폐용기에 넣고 굴리기도 하고 이리저리 흔들기도 했다.

쇼호스트의 과격한 행동에도 밀폐용기 속의 액체는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정말로 놀란 것 같은 쇼호스트의 표정이 카메라에 그대로 비쳤고,

시청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첫 회 방송에서 기획했던 5000세트는 순식간에 매진되었다.

앤도 픽앤픽이 히트 칠 것은 예상했지만 이 정도의 결과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홈쇼핑에서 빠르게 마무리 인사를 했고 곧장 내 전화벨이 울렸다.

앤이었다.

“강빈 씨. 픽앤픽이 팔리는 것 보셨나요?”

앤은 홈쇼핑 결과에 많이 흥분했었는지 인사도 없이 대뜸 방송을 봤냐고 물었다.

“네. 팔리지 않으면 저라도 몇 개 구입할까 고민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었네요.”

수화기 너머로 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강빈씨도 참. 그건 그렇고 내일 저녁, 시간 괜찮으세요? 현아씨와 같이 식사하는 건 어떠세요. 매진의 기쁨을 함께 나눌 겸 해서요.”

“내일 저녁, 시간 괜찮습니다.”

앤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좋네요. 즐거운 만찬을 하죠. 꼭 와주셔야 해요. 개인적으로 강빈 씨한테 제안할 것도 있으니까요.”

제안이라.

앤이 제안한다는 내용이 대충 짐작은 갔지만, 굳이 지금 물어보지는 않았다.

듣자마자 거절해야 하는 거면 내일 있을 앤과의 식사가 어색해질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코리아타운에 괜찮은 한국 식당이 있거든요. 거기서 뵙죠.”

“한국 식당은 가본 적이 없는데 기대되는데요? 좋아요. 그럼 내일 봐요!”

앤은 기분 좋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끊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전화가 다시 울렸다.

앤이 다시 전화했나 싶었는데, 희수의 번호였다.

“서본부장님. 최희수입니다.”

“네, 대표님. 좋은 소식 축하드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박람회에서 알게 된 QBC 홈쇼핑 PD 앤이 저에게 전화가 와서 들었습니다.”

희수가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정말, 이렇게 잘 되리라고 생각도 못 했네요. 이 모든게 서본부장님 덕입니다.

서본부장님이 주신 도움은 현아에게 잘 들었습니다. 이 감사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정말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픽앤픽이 워낙 좋은 제품이었는걸요.”

“그렇게 말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안 그래도 저 역시 QBC 홈쇼핑 일정으로 빠르게 미국으로 들어왔습니다.”

홈쇼핑이 성공적으로 끝날 걸 예상해 빠르게 미국으로 들어온 듯했다.

다음 방송 계약을 따내려는 거겠지.

역시 꽤나 사업적으로 똑똑한 사람이었다.

하하호호 웃는 이야기는 이제 끝났고.

“서 본부장님.”

희수가 전화를 건 본론으로 넘어가려는 듯했다.

“현아에게 들었습니다. 저희 픽앤픽의 해외수출에 관하여 전담 계약을 제안을 하셨다고요?”

“네. 맞습니다. 제가 이번에 설립한 GB로지스틱스에서 독점으로 계약을 맺고 싶습니다.”

독점이라는 말에 희수가 한참 말이 없어졌다.

그러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본부장님이 해주신 걸 생각하면 당연히 계약하는 것이 맞습니다. 덕분에 저희 픽앤픽이 미국에도 진출하게 되었고, 많은 매출을 올리기도 했으니까요. 다만, 독점은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의 판매량을 이제 막 신설한 국제택배사에서 감당할 수 있을까요?”

“가능합니다. 계약 조건에 픽앤픽의 제품을 최우선으로 유통하는 것을 명시하겠습니다.”

“…..그렇군요.”

희수의 목소리가 밝지 않았다.

뭔가가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이미 나보다 먼저 접촉한 이가 있는 걸까?

“최대표님. 최대표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다만 한국에 택배사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해외에 나가 있는 국내 택배사는 아직 GB로지스틱스가 유일하고요. 한국과 미국을 경유하는 국내 택배사는 GB택배가 유일하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국내도 잡지 못하는 한국 택배 쪽에서 벌써 접촉했을 리는 없고,

홈쇼핑을 직접 본 미국의 택배사 측에서 빠르게 연락이 갔겠지

미국의 유명 택배사이니까 희수가 고민되는 걸 거고.

희수는 조심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방금 전에 DEL택배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원래 수수료의 20퍼센트를 깎아주는 대신 독점계약을 맺자고 하더군요. 고마운 것도 잊고 제가 욕심이 났나 봅니다. 이쪽 업계에서 그 정도의 감면은 엄청난 거니까요.”

“이해합니다. 최대표님도, 저도 모두 사업가 아닙니까? 이득이 큰 쪽으로 몸이 향하는 것은 당연한 거죠. 그러나 저는 저희 쪽과 계약하는 게 저희에게도, 최대표님에게도 이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안했던 겁니다.”

DEL택배.

DEL은 수수료 감면을 통한 독점계약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하기로 유명한 미국의 택배사였다. 미국에서 3위 안에 드는 택배사는 아니었지만, 꾸준히 매출도 늘고 업계에서 이름을 알리고 있는 택배사다. 괜찮은 택배사가 수수료를 20퍼센트나 깎아준다는 조건까지 내걸었으니 희수가 고민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미국에 있는 DEL택배가 한국에서 만든 제품을 다시 미국까지 가져오려면 적어도 두 번을 움직여야 한다. 희수도 단순 수수료 감면만 생각한다면, DEL을 택하겠지만, 추가적으로 드는 비용 역시 무시하지는 못할 터. 희수의 머리는 빠르게 수수료 감면과 추가 비용 중 어느 것이 더 적을지를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고민을 끝낸 듯 한층 가라앉은 희수의 차분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 좋습니다. 서본부장님과 계약을 하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국내에 있는 GB택배와도 일반 계약이 아닌 독점으로 계약을 하고 싶습니다. 저희 제품을 우선 유통한다는 조건으로요.”

역시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수수료 감면과 같은 이득을 얻으려면 어쨌든, GB택배와 GB로지스틱스 둘 다와의 독점계약이 유리하다. 특히 국내 GB택배는 한국에서 내가 처음 시도했던 택배사업인 만큼 다른 택배사들 보다 훨씬 입지가 탄탄하고 안정적이다.

GB택배를 시작으로 줄줄이 시작했던 다른 택배사들은 아직 어설퍼 사전에 공시한 기간 내에 도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GB는 그런 점에서 미리 지시해 철저하게 운영해 왔었다.

희수 역시 국내의 GB택배와 독점 계약을 하겠다는 것이 GB택배의 그런 정확성에 대한 이미지까지 활용하여 픽앤픽의 성장에 도움이 되려고 하는 걸 거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QBC의 PD 앤이 내일 저녁을 함께하자는데 괜찮으십니까?”

“앤이라면 저도 오늘 촬영장에서 만났습니다. 좋습니다. 내일 저녁 식사 전에 계약도 하면 괜찮겠군요.”

“네, 그럼 내일 뵙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잠시만요. 현아가 바꿔 달라고 하는군요.”

잠시 뒤에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강빈 씨! 제가 먼저 연락드리고 싶었는데 통화 중이시던데요?”

“계속 전화가 와서요. 픽앤픽의 홈쇼핑 첫 진출과 매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다 강빈씨 덕분인걸요. 앤씨에게 연락받았습니다. 내일 즐겁게 식사해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네. 내일 봬요.”

연달아 세 명과의 전화를 끝냈다.

사업적 이야기도 오가다 보니 진이 빠졌고 허기도 졌다.

일단은 일부터 하자는 마음으로 컴퓨터를 켜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에릭이었다.

“대표님. 저녁 드셨어요? 피자 사 왔는데 같이 먹어요.”

“좋지.”

안그래도 배가 고팠는데 타이밍 좋게 에릭이 피자를 사 들고 들어왔다.

에릭과 함께 침대에 걸터앉아 피자를 먹기 시작했다.

에릭이 한껏 피자를 베어 문 채 내게 말했다.

“GB로지스틱스와 GB인베스트먼트 두 회사 모두 법인 설립했어요. GB인베스트먼트는 전에 말했던 대로 시애틀 중심부 쪽에 사무실 구했습니다. GB로지스틱스는 규모가 크긴 한데 건설사 쪽이랑 연결은 돼서 곧 공사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픽앤픽으로 바쁜 와중이었는데, 에릭은 내 지시 없이도 알아서 제 할 일을 잘하고 있었다.

내일 희수와의 계약 전에 법인 설립을 끝마쳤으니 덕분에 계약도 문제없이 이뤄질 것이다.

“고생했어. 할 일이 생각보다 많지?”

“생각보다요. 그래서 사람을 좀 뽑으려고요. 어떻게 알았는지 벌써 연락 온 사람도 있어요. 사무실에서 내일 면접 진행하려고요.”

“사무실은 준비 다 되어 있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그래도 다 갖춰놔서 면접 진행하는 데는 문제 없을 거예요.”

“잘했네.”

내 회사가 미국에서 운영되다니.

미국에 직원들까지 생기고.

신기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이렇게 착착 진행한 에릭이 새삼 고마웠다.

그제서야 고생한 에릭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밝은 표정이지만 고생 좀 했는지 얼굴을 꽤 피곤해 보였다.

“네가 알아서 좋은 사람으로 뽑아. 그리고 시애틀에서 앞으로 시간을 많이 보낼 테니 집을 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회사와 가까운 곳이 좋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요. 호텔은 아무래도 제집 같은 느낌이 없다 보니 가끔은 불편하게 느껴지더라구요. 제가 머물 곳이니까 직접 알아볼게요.”

“그래. 네 마음에 드는 곳으로 골라. 매입은 GB인베스트먼트 자금으로 하고.”

에릭은 부담스럽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제가 지낼 곳인걸요. 괜찮아요. 다운타운 외곽 쪽으로 임대하면 그렇게 비싸지도 않구요.”

“아니야. 본가도 다운타운 안에 있는데 굳이 집을 구하는 거잖아. 나 대신 네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또 어차피 나중에 팔면 회수되니까 투자라고 생각해도 되고.”

“그럼…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대표님.”

망설이던 에릭이 투자라는 말에 마음이 편해졌는지 이내 천천히 답했다.

사실 에릭에겐 투자라고 말을 붙였지만, 회수할 생각은 전혀 없다. 에릭이 너무 부담을 가질까 싶어서 둘러댄 말이니까. 나중엔 에릭의 명의로 돌릴 예정이기도 하다. 한국에 들어왔던 녀석인데 나로 인해 다시 시애틀로 온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었다. 부모님이 계신 집은 거리가 있으니 매번 출퇴근하기도 힘들 테고. 그 정도는 해줘야지 오히려 내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피자를 다 먹자 에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들어가 볼게요. 좋은 밤 되세요.”

“그래. 너도 무리하지 말고 일찍 자.”

에릭이 나간 고요한 방.

나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필요한 기사들을 한참 동안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추 시차가 맞았는지 황비서에게 메일이 하나 왔다.

[영일제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에이즈 치료제의 2상 임상시험이 성공했다고 합니다.]

황비서가 보낸 메일에는 2상 임상시험이 성공했다는 제목과 함께 영일제약에서 내가 지급한 투자금을 어떤 식으로 활용했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약에 대한 전문용어들이 즐비해 있었다.

무슨 내용인가 싶었는데 다행히 황비서가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 밑에 적어놓았다.

요약한 내용에 따르면 그동안 구입하지 못했던 장비를 샀고, 시도하지 못했던 시험을 통해 빠르게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

황비서에게 곧 한국으로 갈 테니 영일제약과 관련된 자료들을 준비해 놓으라고 지시했다.

미국에서 계획했던 일들은 얼추 마무리되었다.

내일 밤에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를 한 번 더 확인했다.

***

다음날 QBC방송국이 있는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시애틀타코마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바로 왔기 때문에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로스앤젤레스의 LAX공항에는 현아와 희수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희수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서본부장님. 오랜만입니다.”

“타국에서 만나니 더 반갑군요.”

옆에 있던 현아도 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도 너무 반가워요.”

“하하. 그러게요. 우선 근처의 조용한 곳으로 가죠.”

우리는 한인타운에 있는 작은 카페로 향했다.

가는 길에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주방용품 박람회에서 내가 밀폐용기를 굴린 얘기를 하자 희수가 말했다.

“이미 현아에게 들었지만 서본부장님 입에서 직접 들으니까 더 믿기지 않는군요. 정말 큰 빚을 졌습니다.”

결국 희수가 하게 될 일이었지만 결과가 좋았으니 나는 그저 미소를 지었다.

웃고 떠드는 사이 어느새 한인타운에 도착했다.

로스앤젤레스의 한인타운은 1950년대와 1970년대를 거쳐 조성된 곳이다.

이곳에는 한국에 있는 식당들의 프랜차이즈와, 한국 상품을 파는 슈퍼마켓, 은행 등 한국인을 위한 업소들이 즐비해 있다.

전생에는 한국대학교의 분교도 세워졌었는데 아직은 없는 모양이었다.

택시가 멈춘 곳은 간판에 ‘심플’이라 적힌 카페의 앞이었다.

“아직 사무실이 마련되지 않아 죄송하네요. 그래도 이곳 차가 그렇게 맛있다고 합니다.”

“괜찮습니다. 차로 유명하다니, 저도 궁금한데요?”

심플에 들어가 통유리로 된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휑한 거리에는 띄엄띄엄 있는 건물 사이로 가끔 모래바람이 부는 게 한눈에 보였다.

희수와 나는 쌍화차를 시켰고 현아는 커피를 시켰다.

주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직원이 음료를 우리 자리에 가져다주었다.

현아가 커피를 한입 마시더니 말했다.

“이거 그냥 맥심 맛인데요?”

“맥심이 맛있긴 하죠. 쌍화차는 향이 좋네요.”

이후에도 이런저런 밀폐용기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나눴다.

조금 시간이 지났나, 현아가 갑자기 온 전화에 자리를 비웠다.

현아가 밖을 나가는 걸 보자, 희수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희수가 긴장한 표정으로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들었다.

“준비한 계약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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