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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25화 (25/249)

#25화

나는 태연하게 밀폐용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오렌지 주스가 옷에 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밀폐용기를 주웠다.

밀폐용기 안에는 한 방울도 새지 않은 오렌지 주스가 출렁이고 있었다.

밀폐용기를 흔들며 앞에 있는 사람들과 마주했다.

나에게 화를 냈던 여자가 말했다.

“운이 좋았던 거겠지. 밀폐용기라고 해서 안에 있는 것을 완전히 막지 못한다는 걸 누가 몰라? 사과부터 제대로 해.”

“죄송합니다. 다소 과한 시범을 보인 것 같네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얼굴이 빨개진 여자가 더 격정적으로 나에게 소리 지르기 시작하자, 길을 가던 사람들이 멈춰 서서 나와 여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몇몇 사람들은 이 모습을 지켜보며 쑥덕였다.

“저 사람들 왜 저러는 거야?”

“자세히는 못 들었는데 동양인 남자가 지금 들고 있는 밀폐용기를 던졌다는데?”

“그러기엔 바닥이 젖어 있지도 않은데 여자가 거짓말치는 거 아니야?”

“아니야. 나도 분명히 던지는 걸 봤어.”

사람들의 반응은 내가 원하는 대로였다.

이어지는 실랑이에 사람들이 점점 몰려들었다.

현아가 질색한 채로 달려와 나를 흔들었다.

“뭐하는 거예요, 진짜! 다시 사과드려요. 빨리!”

현아가 내 손을 잡고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평소라면 이런 고지식한 현아의 태도가 답답하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도움이 되고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우리를 둘러쌀 정도로 많이 모여들었다.

눈앞의 백인 여자는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듯 허리에 두 손을 올린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됐다.’

나는 고개를 숙여 백인 여자에게 인사했다.

“놀라게 해드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일부러 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 오렌지 주스가 부인의 원피스에 튈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나는 밀폐용기의 뚜껑이 바닥에 가게 뒤집어서 흔들었다.

찡그린 얼굴로 나를 보던 현아는 그제서야 내 의도를 깨달았는지 맹한 표정을 지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나는 계속해서 밀폐용기를 흔들었다.

처음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사람들도 서서히 눈이 커졌다.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용하는 밀폐용기는 2면 결착 방식으로 완전한 밀폐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주방용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다.

한 방울도 새지 않는 밀폐용기는 그들에게도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화를 냈던 백인 여자도 표정을 풀고 당황한 듯 밀폐용기를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안에 접착제라도 붙여서 막아놨나?”

여자의 말에 나는 태연하게 밀폐용기의 뚜껑을 열었다.

뚜껑에 묻어 있던 오렌지 주스 몇 방울이 바닥에 뚝뚝 떨어질 뿐이었다.

여자는 홀린 듯 다가와 내가 들고 있는 밀폐용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현아는 그제서야 내 앞에 서서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밀폐용기는 저희 픽앤픽에서 자체개발한 제품입니다. 주스는 물론이고 스튜, 라자냐 등 어떤 음식을 담든지 전혀 새지 않고 완전하게 밀폐시킵니다. 또…”

아까의 모습은 연기였다는 듯이 현아는 청산유수로 픽앤픽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를 앞에 두고 밀폐용기를 살피던 백인 여자가 민망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저도 흥분해서 화를 내버렸네요. 미안합니다. 홈쇼핑 채널 QBC의 PD 앤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던 나는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서강빈이라고 합니다.”

내 손을 마주 잡고 있는 여자는 나중에 미국 최대 홈쇼핑 채널 QBC의 대표의 자리에 오르는 ‘앤 리베라’였다.

QBC의 생활용품 당당 PD인 앤이 주방용품 박람회를 찾을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며칠 전 호텔에서 QBC 간판 PD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었다.

주방용품박람회의 정보 수집 겸 클릭한 기사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앤의 사진이 보였다.

전생에 홈쇼핑 채널에 대한 투자를 진행했었던 기억으로 앤이 QBC의 대표였다는 것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앤을 QBC를 키워낸 인물로만 기억했는데 그녀가 PD의 자리부터 올라온 사실은 나도 몰랐다.

인터뷰의 내용은 사실 질문이라기보다 그녀에 대한 칭송에 가까웠다.

앤이 셀렉한 제품은 홈쇼핑 방송에 등장하기만 하면 완판이 나고 재입고에 대한 문의가 쇄도했다고 한다.

경쟁 홈쇼핑 채널인 HAN에서 이직 제안이 오기도 했을 정도로 앤의 사업 수완과 히트가 될 아이템에 대한 안목은 뛰어났다.

물론 앤이 옆의 천막에 있던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지만 사람들 사이 그녀를 향해 밀폐용기를 굴린 것은 의도된 것이었다.

앤은 밀폐용기를 받아 유심히 들여다보고는 나에게 돌려주었다.

밀폐용기를 받으며 앤에게 말했다.

“QBC라면 미국 최대 홈쇼핑 채널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앤씨의 인터뷰를 본 것 같습니다. 인터뷰 제목이 아마 QBC의 간판 PD였던 것 같은데 맞습니까?”

아까의 화났던 표정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앤이 부드럽게 말했다.

“제 인터뷰를 보셨나요? 그렇다면 아까의 행동이 더욱 민망해지는군요. 혹시 강빈 씨가 픽앤픽의 대표인가요?”

그녀의 시선이 현아에 잠깐 갔다가 나에게 돌아왔다.

현아는 여전히 몰려드는 사람들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제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저는 픽앤픽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현아 씨와 그냥 아는 사이일 뿐입니다.”

앤은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와서 보니 아까 강빈 씨의 행동은 다 의도된 것처럼 보이던데요? 그 정도의 사업 수완을 가진 사람이면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가요?”

“하하. 모든 게 의도된 것은 아닙니다. 저는 한국에서 택배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알고 있어요. 88년도의 올림픽이 개최된 곳이 한국의 서울 아닌가요?”

“맞습니다. 한국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군요.”

앤이 그 당시를 회상하는 듯 미소를 지었다.

“네. 그 당시에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택배사를 운영하신다면서 이곳에는 무슨 일인가요?”

“아, 저는 픽앤픽과 인연이 있어서 홍보를 잠깐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PD님께서 직접 발품을 팔고 계신 겁니까?”

앤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직접 물건을 보고 영입하는 것이 실적이 좋더군요. 저에게 따로 연락을 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제 성에 차지는 않거든요. 제가 직접 발품을 파는 것이 인센티브가 더 높기도 하고요.”

앤의 꾸밈없는 말에 나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앤이 이어서 말했다.

“혹시 이 제품. TV에서 판매해 볼 생각 없나요? 성공은 제가 보장할게요.”

“하하. 앤씨. 저는 픽앤픽과 관련이 없다니까요. 현아 씨를 불러올 테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저도 모르게 자꾸 강빈 씨가 대표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알겠어요.”

현아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여전히 눈앞에 고객들을 상대로 상기된 채 말하고 있었다.

내가 다가갔을 때는 나처럼 오렌지 주스를 넣은 밀폐용기를 뒤집어 흔들고 있었다.

“이거 보세요! 제가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다고 말했죠? 거짓말이 아니라…“

“현아 씨. 잠깐 나 좀 봅시다.”

“어, 강빈 씨! 대박이에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저희 제품에 관심을 가져주고 있어요. 이 정도라면…”

“대박은 따로 있습니다.”

현아의 마음이 들뜬 것을 알겠지만 앤을 더 세워두고 있을 수는 없었다.

현아는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내 뒤를 따라왔다.

현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강빈 씨. 아까는 죄송하고 고마웠어요. 저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또 저를 구해주셨네요.”

“아직 끝이 아닙니다.”

앤이 여전히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현아 씨. 여기는 홈쇼핑 채널 QBC의 PD님이신 앤 리베라 씨입니다. 앤씨. 여기는 픽앤픽의…”

그러고 보니 현아가 픽앤픽에서 무슨 직급을 가지고 있는지 잊었다.

내가 뜸을 들이자 현아가 말했다.

“최현아 전무예요. 반가워요. 아까는 놀라게 해드려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앤이 현아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닙니다. 덕분에 좋은 제품을 알게 된 것 같아요. 현아 씨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픽앤픽의 밀폐용기를 QBC에서 판매하고 싶은데 괜찮으신가요?”

“네? 저희 밀폐용기를 홈쇼핑에서 판매한다는 얘기인가요?”

현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뜬 채 나와 앤을 번갈아 보았다.

“맞아요. 아까 강빈 씨의 퍼포먼스를 보고 이 제품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지금까지 팔았던 어떤 제품보다 강한 확신이 들더군요.”

꾸밈없이 말하는 앤이라면 저것도 빈 말은 아닐 것이다.

현아는 고민도 없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수락할게요. 일정은 언제든지 괜찮습니다.”

현아가 품에서 명함을 꺼내고 앤과 교환했다.

“세부 계약 내용과 함께 방송 일정은 이메일로 보낼게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알겠어요. 곧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말을 마친 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리고 강빈 씨. 다음에 밥이라도 먹으면서 얘기를 해보고 싶군요. 아까는 정말 흥미로웠어요. 꼭 한번 연락 주세요.”

“저도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뵙도록 하죠.”

앤은 나에게도 자신을 명함을 건네고 돌아서 출구로 향했다.

멍하니 앤이 사라진 자리를 보던 현아가 내게 말했다.

“강빈 씨. 아직도 믿겨지지가 않네요. 미국 최대 홈쇼핑 채널에서의 홍보라니… 이게 다 강빈 씨 덕분이에요.”

“현아 씨 연기도 일품이더군요.”

“저는 연기가… “

“결과만 좋으면 된 것 아니겠습니까?”

픽앤픽 통을 굴린 것은 사실 내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며칠 뒤에 희수가 와서 했을 일이었다.

QBC보다는 작은 규모의 홈쇼핑채널이지만 어쨌든 픽앤픽이 대박을 터트리는 것은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다만 그 공을 내 몫으로 돌렸을 뿐이다.

“아빠에게 바로 연락을 해야겠어요. 강빈 씨. 정말 고마워요. 강빈 씨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뭐든지요?”

“그럼요. 부탁할 거라도 있나요?”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제가 이번에 미국에도 택배사를 창업합니다. 홈쇼핑에 진출한 이후 픽앤픽의 주문량은 감당할 수 없이 많아질 겁니다. 픽앤픽의 수출과 배송사업을 제 GB로지스틱스에서 전담으로 맡을 수 있게 해주세요.”

사실 이건 부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아직 한국과 미국을 경유하는 택배사는 없다.

제 곧 GB로지스틱스가 창업되면 GB택배-GB로지스틱스로 이어지는 유일한 연결다리가 생기는 것이다.

“오히려 제가 부탁하고 싶은걸요? 아빠한테는 잘 얘기해볼게요.”

현아가 밝게 웃었다.

이미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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