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커튼을 걷자 아침의 기분 좋은 햇빛이 방을 비췄다.
밖을 내다보니 아침부터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운타운은 시애틀 내에서 중심지로 회사와 편의시설들이 집중된 곳이다.
맞은편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있었는데 1층에는 스타벅스도 보였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니 에릭이 커피 두 잔을 든 채 서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에 산책을 갔다가 사 왔어요.”
“잘 마실게. 들어와.”
에릭은 호텔 바로 옆 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온 에릭은 곧장 의자에 앉았다.
에릭이 원래부터 사교성이 좋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를 편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 좋았다.
“저 여기서 커피 한 잔만 마시고 갈게요.”
“그래. 어제는 시간 잘 보내고 왔어?”
에릭은 어제를 추억하는지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잘 보내고 왔어요. 미쉘과는 어릴 때부터 정말 친한 친구였거든요. 제프도 좋은 사람인 것 같고… 그리고 대표님 칭찬을 엄청 하던데요? 질투가 날 정도였다니까요.”
“하하. 그건 좀 미안하네.”
확실히 제프는 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제프는 나중에 아마존닷컴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업들을 크게 성공시키기 때문에 앞으로도 연이 닿아 있는 것이 좋다.
“그보다 호텔에 개인 컴퓨터가 비치되어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 했는데요?”
“나도 보고 놀랐어.”
한국의 어느 호텔에 가더라도 방 안에 컴퓨터를 볼 수 없었다.
심지어 정순이 운영하는 태선 호텔에도 컴퓨터는 로비에 몇 대 있을 뿐이었다.
한국에서 인터넷이 미진한 데 비해 미국은 벌써부터 흐름을 타고 나아가고 있었다.
“미국에서 컴퓨터 사업이 빨리 발전된다는 것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방 안에 설치된 컴퓨터는 성능이 조금 떨어져 보였지만 메일이나 간단한 웹서핑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비즈니스를 위해 호텔을 찾은 손님들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의자에 앉았다.
에릭도 흥미롭다는 듯이 의자를 끌고 와 내 옆에 앉았다.
‘GB택배 실적보고’
황비서에게 메일이 하나 와 있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경쟁사 중 하나인 좋은택배가 치고 올라왔다.
에릭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아직까지 GB택배와의 격차가 크긴 한데…”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얘기했다.
“그 한계를 없애기 위해서 미국에 온 거니까 지금 당장 걱정할 필요는 없어.”
“저는 걱정 안 해요. 대표님이 하는 일이니까요.”
에릭이 표정을 풀자 나는 살짝 웃었다.
“싱겁기는.”
간단하게 답장을 작성해 황비서에게 보냈다.
컴퓨터로 언제든지 비행기 예약을 할 수도 있었다.
아직 돌아갈 일정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행기 예약은 나중으로 미뤘다.
인터넷을 켜자 미국 웹사이트에 자동으로 접속되었다.
일본에서 일어났던 옴진리교의 실체라든가, 세계적인 화가 밥 로스의 사망, 그리고 홈쇼핑 채널 QBC의 간판 PD의 대한 인터뷰 등 국제적인 기사들이 보였다.
내가 필요할 것 같다고 계산한 정보들만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던 일들이었다.
그 외에도 사회적으로 꽤 이슈가 되었던 일들이 보였다.
한국 웹사이트로 들어가서 기사를 살피는데 낯익은 이름이 보였다.
“어, 저거 대표님이 관심 가졌던 회사 아니에요?”
[픽앤픽 한국에서는 부진, 미국에선 통할까?]
기사의 본문을 읽다가 에릭이 말했다.
“픽앤픽이 정말 인기가 없긴 한가 보네요. 대표님은 어떤 점을 보고 픽앤픽에 관심을 가지신 거예요?”
“기사에도 나왔듯 이번에 열린 세계 주방용품 박람회가 전환점이 될 거야.”
주방용품 박람회란 주방 및 생활용품을 비롯해 다양한 가정용품을 전시하는 박람회다.
한국은 물론이고 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유럽 등 20개 이상의 국가에서 2000개 이상의 전시 업체가 4일 동안 제품을 선보이는 행사이다.
에릭은 여전히 의문을 품은 채 물었다.
“한국에서는 안 먹혔는데, 미국이라고 다를까요?”
“픽앤픽이 한국에서 실패했던 이유는 주방용품을 납품하는 업체 중 인지도가 낮았던 이유가 커. 사람들은 주방용품을 살 때 모든 제품을 보진 않으니까. 게다가 동네 시장에 가면 흔하게 있는 용기들이 훨씬 싼데 뭐하러 픽앤픽의 제품을 구매하겠어? 육안으로는 장점을 볼 수 없으니까 성공할 수 없었던 거지.”
“그럼 대표님은 홍보만 제대로 된다면 픽앤픽이 성공할 것 같다는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픽앤픽이 갖고 있는 장점은 뛰어난 밀폐력에 있는데 외견상으로는 다른 제품들과 별 차이가 없어. 중요한 건 그 장점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알리는가야.”
“대표님은 박람회에서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군요.”
“응. 나도 그래서 그 박람회에 참여하려고.”
에릭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표님이 직접요? 같은 워싱턴이라고는 해도 거리가 꽤 되는데요?”
“픽앤픽도 한번 지켜보고, 그 외에 투자를 할 만한 곳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둘러봐야지.”
“그럼 저도 같이 갈게요.”
“그럴 시간이 없는 거 알잖아. 법인 설립하는 데 집중해야지. 사무실도 알아보고.”
“하지만…”
에릭은 못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나도 에릭과 같이 가는 것이 편하겠지만, 에릭은 지금 법인 설립으로 일정이 빡빡하다.
“자, 이럴 시간 없잖아. 가서 일하자 일.”
“어쩔 수 없죠.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에릭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방을 나갔다.
픽앤픽은 박람회에서 한 바이어의 눈에 들어 미국 홈쇼핑 진출의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그 기회는 내 것이기도 하다.
나는 그 과정에서 픽앤픽과 GB로지스틱스와의 독점계약을 따낼 거니까.
***
주방용품 박람회는 워싱턴 내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에 가는 길을 어렵지 않았다.
택시는 세 시간을 달린 끝에 박람회 바로 앞에서 멈췄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네. 좋은 관람 되세요.”
택시에서 내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박람회는 야외에서 개최되었지만 다행히 날씨가 좋아서 진행하는 데 무리는 없어 보였다.
널찍하고 각진 천막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이 장관이었다.
바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주로 정장을 입었는데 아마 바이어일 확률이 높았다.
관광객으로 온 사람들은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제품을 직접 사용해보기도 하는 등 박람회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개최된 곳이 미국이었기 때문에 주로 영어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간간이 다른 나라의 언어가 들려오기도 했다.
주방용품 박람회였지만 CD플레이어를 판매하기도 했고, 앤틱한 가구들도 눈에 띄었다.
천막들마다 앞에 표지판이 걸려 있었는데 회사명과 제품, 그리고 구분을 위한 것인지 알파벳과 숫자가 적혀 있었다.
구분을 해놓지 않으면 원하는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박람회는 넓었다.
최현아에게 픽앤픽이 받은 일련번호를 들었기 때문에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른 제품들을 구경하며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픽앤픽의 천막이 보였다.
[픽앤픽, G-27]
천막 앞에는 최현아가 나와서 영어로 연신 홍보를 하고 있었다.
“저희가 개발한 이 밀폐용기는 4면 결착이고, 어… 또 그렇기 때문에 음식이 잘 안 새요. 그리고…”
희수가 직접 오지는 못하더라도 임원 중 한 명을 보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현아가 박람회에 참여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최현아는 영업인으로서 영 젬병이었다.
한국에서 연이은 실패 때문인지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사람들과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고 목소리도 작았다.
전생에서는 희수가 박람회 마지막 날에 참석해 극적으로 바이어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었다.
현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현아씨. 오랜만입니다.”
“어, 강빈씨!.”
현아는 타국에서 만난 내가 반가웠는지 밝은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사업차 미국을 방문했다고 이야기를 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업체에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제품을 시연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특히 옆에 있는 천막은 잘 눌어붙지 않은 프라이팬을 고급스러운 디자인을 함으로써 차별화를 한 곳으로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었다.
나와 현아와 몇몇의 직원들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픽앤픽의 천막과 대비되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홍보가 잘 안 되시나 봐요?”
현아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하하… 아무래도 밀페용기는 이미 사용되고 있다 보니까… 여기까지 와주셨는데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민망하네요.”
“회사를 홍보하는 것인데 현아 씨가 민망할 게 뭐가 있어요. 한 명이라도 더 붙잡고 제품에 대해 설명하셔야죠.”
자신감 없는 현아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엄하게 말이 나왔다.
현아는 개의치 않다는 말투로 이어서 말했다.
“신기술을 개발하고 저희 가족은 당연히 시장에서 성공할 줄 알았어요. 소비자들의 반응이 이렇게까지 냉담할 줄 몰랐죠. 아빠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했어요. 잘 해내야 하는데… 쉽지 않네요.”
담담하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 속에 담긴 말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판매자조차 자신의 제품에 자신이 없는데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사겠습니까? 저는 전에 현아 씨가 픽앤픽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잘못 봤나요?”
이 정도 말했으면 발끈할 줄 알았는데 현아는 오히려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현아 씨가 들고 있는 거 저한테 줘 보실래요?”
“네? 상관없긴 한데… 알겠어요.”
현아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밀폐용기를 나한테 주었다.
나는 밀폐용기를 받으며 물었다.
“그리고 혹시 마실 거 있어요?”
“목마르시면 저기 오렌지 주스가 있어요. 제품을 구경하러 오신 분들한테 나눠주려고 세 묶음을 사 왔는데… 오는 사람이 없으니까 거의 남아있네요.”
오렌지 주스는 6개들이 세 묶음이 천막 앞에 쌓여 있었다.
나는 성큼성큼 다가가 비닐을 뜯고 오렌지 주스를 꺼냈다.
옆으로 다가온 현아가 나에게 종이컵 하나를 건넸다.
“괜찮습니다. 마시려고 뜯는 게 아니니까요.”
“네? 그게 무슨.”
밀폐용기의 뚜껑을 열어 오렌지 주스를 부었다.
밀폐용기는 유리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스가 차는 것이 눈에 보였다.
주스가 가득 차고 나는 뚜껑을 닫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현아를 무시하고 사람들이 몰려든 옆의 천막으로 굴렸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그냥 보고 계세요.”
밀폐용기는 사각형이었기 때문에 몇 바퀴 구르지 못하고 엎어져 있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픽앤픽의 밀폐용기는 강화유리였기 때문에 이 정도 충격으로는 깨지지 않는다.
놀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밀폐용기는 한 여자의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오렌지 주스가 옷에 튀기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이 원피스가 얼마짜리인지는 알아?”
그리고 난 이 여자가 누군지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