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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22화 (22/249)

#22화

에릭과 계약을 마치고 카페 비타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생각이 맞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에릭과의 대화는 늘 재밌었다.

잠시 대화를 멈추고 시애틀의 거리를 보고 있는데, 에릭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맞다! 대표님. 이 근처에 친구가 사는데 같이 보고 가실래요? ”

“고향이 시애틀이라더니… 친구 누구?”

“미쉘이라구요. 어릴 적부터 친했던 친구예요. 남자친구가 사업을 해서 시애틀 사업환경에 대해서도 잘 알 테니까, 이야기 나누면 좋을 것 같은데요.”

에릭이 말하는 미쉘의 남자친구가 바로 제프 베조스다.

예상보다 빨리 제프를 만나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도 늦었고, 우선 정리해야 할 게 있었다.

“그래. 오늘은 시간이 늦었고 내일쯤 보도록 하지.”

미국 주식 투자에 대해 썼던 포트폴리오를 꺼내며 말했다.

“먼저 투자할 곳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알겠어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날 생각에 에릭은 들뜬 표정이었다.

에릭의 친구, 미쉘이 바로 내가 굳이 숙소가 있는 다운타운에서 여기까지 온 이유였다.

이제 곧 아마존닷컴을 창업할 제프와 그의 여자친구 미쉘은 이 근처에 살았다.

전생에서 에릭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당시 오랜 동네 친구였던 미쉘이 한국에 들어와 있던 에릭에게 연락을 보냈다.

자신의 남자친구가 아마존닷컴이라는 회사를 창업하는데 혹시 투자할 생각이 없냐고.

당시 에릭은 투자에 관심도 많고 괜찮은 투자처라고 생각은 했지만 투자금을 댈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거절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뒤, 아마존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크게 후회가 남았다고 나에게 하소연하곤 했다.

수도 없이 들은 이야기여서 나는 이 이야기를 줄줄 외우고 있었다.

내가 펼친 포트폴리오 안에는 애플, 스타벅스, 마이크로소프트 등 가까운 미래에 크게 급등하는 종목들이 적혀 있었다.

일정한 형식 없이 두서없이 적었지만 에릭은 다 읽고 나서 모두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가 생각했던 것들도 보이네요. 그런데 스타벅스는 의외인데요? 미국에 커피나 음료에 대한 붐이 일고는 있지만 이미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스타벅스에 투자할 가치가 있을까요?”

아직 스타벅스가 세계적으로 나가지 못한 시점이기 때문에 에릭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스타벅스의 진가는 세계시장에 진출했을 때 발휘될 거야.”

아직 아시아 시장에서는 커피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

스타벅스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에릭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다른 곳들은 어때, 어디가 가장 투자가치가 높아 보여?”

에릭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아마 애플은 지금 파산 위기일 거예요. 잡스가 떠나고 실무진의 마찰이 이유 중 하나겠죠. 개인용 컴퓨터인 메킨토시가 잦은 발열과 높은 가격대 설정으로 소비자들한테 외면을 받게 된 것도 크고요. 하지만 애플이란 기업 자체는 비관적으로 볼 수 없어요. IT계열 중 이미 자리를 잡은 몇 안 되는 기업이니까요. 닷컴주들이 오를 때 샀다가 적당한 시기에 팔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에릭의 말처럼 애플은 지금 상장폐지 직전까지 가 있는 상태이다.

IT버블과 더불어 기사회생에는 성공하겠지만 거품이 꺼지며 휘청거린다.

물론 이후에 아이맥을 시작으로 아이팟, 아이폰을 연달아 히트치며 주가는 끝없이 치솟는다.

이 모든 사실을 알 리 없는 에릭이 애플의 일시적인 성공을 예측하는 것이 놀라웠다.

“애플이 영원히 잡스를 저버릴 수는 없어. 그는 애플에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니까.”

“그렇다고 하기에 잡스는 미련이 없는 것 같던데요? 애플에서 쫓겨난 뒤에 주식을 몽땅 팔아버렸으니까요. 뭐 주주총회를 위해서 1주를 남긴 건 예외로 치고요.”

“잡스가 애플에서 나오고 차린 회사 넥스트에서 만든 운영체제인 ‘NeXTSTEP’은 지금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 그가 다시 애플로 돌아가게 될 계기가 될 거야.”

에릭은 잠깐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설립할 회사들이 먼저니까 애플과 스타벅스에 10억씩 투자하고 이후로 꾸준히 투자하는 걸로 하자.”

“스타벅스도요?”

에릭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풀었다.

“크리스맨뱅크를 사라고 했을 때가 기억나네요. 그때도 저는 예측도 못 했던 일을 대표님께서는 해내셨죠. 이번에도 대표님을 믿고 가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에릭은 가치에 대한 분석도 뛰어나지만 언제 매수에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다.

기업명만 말하고 에릭에게 매수하라고 지시할 수도 있지만 그가 납득할 최소한의 설득은 해야 했다.

에릭의 모든 투자는 자신의 이해를 바탕으로 나오는 것이다.

***

시애틀에 오고 두 번째 날, 에릭과 나는 호텔을 나서 택시를 잡았다.

미쉘이 제프와 동거하고 있는 집은 시외에 외딴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얀색의 2층집으로 크진 않았지만 넓은 잔디밭 덕에 시원한 느낌이 있었다.

에릭이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열자 키가 크고 시원한 인상의 여자가 나왔다.

“에릭!”

“미쉘.”

문을 연 미쉘이 손뼉을 치며 반가움을 표현했다.

둘은 영어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야. 시애틀에는 대체 얼마 만이야?”

“그러게. 한 4년만인가?”

“5년이 아니고? 아무튼 너무 반갑다! 옆에 있는 분이 이메일에서 말했던…?”

나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서강빈입니다.”

“아! 에릭한테 메일로 들었어요. 에릭이 모시는 분이시라면서요. 미쉘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쉘이 환하게 웃었다.

“우선 안으로 들어오세요.”

에릭과 나는 미쉘의 뒤를 따라 집을 들어갔다.

집안은 커다란 카펫이 깔려있고 아늑한 분위기를 풍겼다.

“에릭, 손님 데리고 테이블에 앉아있어.”

“알겠어. 대표님, 저기 같이 앉아있죠. 저도 이 집은 처음이에요. 미쉘이 남자친구분과 동거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거든요.”

제프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가 지금 어디에 있을지 궁금했다.

잠시 뒤에 미쉘이 주전자를 들고 나타났다.

“비타에서 따로 구입한 원두로 만든 커피야. 네 연락을 받고 생각나서 사 뒀어.”

“아직도 기억하고 있구나. 안 그래도 오늘 비타에 들르고 오는 길이야.”

미쉘은 내 잔에 커피를 따라주었다.

“감사합니다. 향이 정말 좋네요.”

“아니에요. 에릭을 만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강빈 덕분이죠.”

둘은 꽤 오랫동안 근황을 주고받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대화가 즐거운지 에릭의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았다.

“미쉘, 결혼하기로 한 남자친구분은 어떤 사람이야?”

미쉘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지더니 얘기를 시작했다.

“제프는 멋진 사람이야.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잘나가던 회사를 그만두고 들어간 컴퓨터 회사에서도 실적을 쌓아서 부사장까지 됐었으니까… 그 자리도 관두고 이번에 사업을 시작했는데, 투자자를 찾지 못하고 있어.”

미쉘의 표정을 보고 에릭도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무슨 사업인데?”

“인터넷을 통해서 책을 주문하고 배송하는 사업이야. 사무실을 구할 돈도 아낀다고 차고에서 시작하고 있는데… 걱정이 많지, 뭐. 참, 너무 오랜만에 에릭을 만났다 보니 제 얘기만 자꾸 했네요. 강빈 씨는 에릭과 미국에 어쩐 일로 오셨어요?”

“투자처를 찾고 싶어서요. 말씀하신 남자친구 제프 씨의 일이 궁금해지네요. 인터넷 서점을 만든다는 겁니까?”

“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아직 그런 곳이 없으니까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내 질문에 미쉘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쉘의 어두운 표정에 고민하던 에릭이 말했다.

“인터넷 주문 배송이면 확실히 가능성 있는 것 같아. 어떻게 시작할지만 고민해보면 좋을 텐데…”

에릭이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친구의 일이기 때문에 섣불리 물어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에릭에게 들었겠지만 저는 투자자입니다. 미쉘. 당신의 남자친구와 대화를 해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미쉘의 얼굴이 밝아졌다.

“강빈도 제프가 하는 일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제프는 아마 차고에 있을 거예요. 필요하면 당장 부를게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잠시 양해를 구한 미쉘이 밖으로 나갔다.

에릭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대표님… 혹시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안 그러셔도 돼요.”

“너 때문이 아니야. 미쉘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가능성을 봤어.”

가능성을 본 정도가 아니다.

물론 에릭이 봤을 때 이미 상장을 한 애플, 스타벅스와 달리 아마존닷컴은 상장은커녕 창업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 중순에 시작하는 아마존닷컴은 이후 미국의 4대 테크기업 MAGA 중 하나에 들 정도로 엄청난 성장을 하게 된다.

지금 투자를 통해 초기지분을 확보만 한다면 다른 곳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의 미래가치를 얻을 수 있다.

한때 롤모델이기도 했던 제프는 아마존닷컴을 창업한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을 내기도 했다.

그 책을 몇 번을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그때 당시 나에게는 존경스러웠던 인물이 바로 제프였다.

제프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자기 방 출입문에 사이렌 경보장치를 만들어내는 등 아이디어와 기술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고등학생 때 이미 플로리다 대학에서 주최한 대회에서 수상을 하기도 했으며 만점에 가까운 점수로 컴퓨터과학과를 졸업했다.

인텔의 오퍼를 거절하고 뱅커스 트러스트에 입사하게 된 그는 불과 26세에 최연소 부사장의 자리를 달았다.

이후 30세가 되었을 때, 그의 연봉은 100만 달러였다.

미쉘과는 아마 이때 사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지금 제프가 일하고 있을 차고에는 불과 컴퓨터 3대와 소수의 직원들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투자도 없이 주어진 것만으로 제프는 아마존닷컴의 소프트웨어를 개발해냈다.

투자자를 구하지 못하고 친척들과 친구에게 손을 뻗은 이후에는 시애틀의 작은 사무실을 열게 된다.

10명 남짓한 직원들로 시작한 아마존닷컴은 창업과 동시에 미국 전역과 세계 45개 도시에서 주문이 쏟아져 들어왔고, 창업 두 달이 되었을 때는 한주 판매액이 2만 달러에 이르게 된다.

제프는 물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성공의 시작이었다.

온라인서점으로 시작한 아마존닷컴은 점점 여러 종류의 제품들의 중계거래를 진행하며 몸집을 불렸고 이미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이베이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을 해낸다.

이후 제프는 언론사, 식품 연쇄망, 민간 우주개발 회사 등 수많은 사업체를 거느린 기업인이 된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쉘이 돌아왔나 보네요. 제프도 있을까요?”

들려오는 발소리는 한 명의 것이 아니었다.

“제프도 같이 왔나 보네요.”

구겨진 곳은 없는지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한때 나의 롤모델이 불과 몇 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먼저 거실에 들어온 사람은 미쉘이었다.

“다행히 제프가 차고에 있었네요.”

그리고 그의 뒤로… 한 줌의 머리 없이 빛나는 두상을 가진 제프가 보였다.

미쉘이 기대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프. 이분이 한국의 투자자래요.

“저를 찾으셨다고요.”

“네. 반갑습니다. 한국 GB택배의 대표이자 곧 미국에 설립할 GB인베스트먼트의 대표, 서강빈입니다.”

내가 내민 손을 잡고 그가 느긋하게 나를 쳐다봤다.

짙은 쌍꺼풀이 덮은 그의 커다란 눈은 맑았지만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곧 아마존닷컴을 창업할 제프 베조스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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