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3월이지만 내가 가려는 시애틀은 일평균 6도 정도 되는 쌀쌀한 날씨다.
예약한 비행기의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어서 두툼한 코트를 입었다.
황비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본부장님, 저에게는 너무 부담되는 일입니다…”
“GB택배나 투자처들 정리는 끝냈어. 황비서는 관리 감독만 하는 거니까 괜찮을 거야.”
미국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낼 것 같았기 때문에 황비서에게 내가 하던 일을 일임했다.
황비서는 이미 본부장 일을 대행했었고 내가 없어도 잘 굴러가게 시스템을 만들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투자와 같이 중요한 일은 메일을 통해 연락하라고 했다.
게다가 픽앤픽의 미국진출도 얼마 남지 않아서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전에 준비한 자료는?”
내 말에 황비서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두툼한 봉투를 내게 주었다.
“GB인베스먼트와 GB로지스틱스 설립에 관한 조사와 대표님의 지시사항까지 모두 정리해두었습니다.”
나는 봉투까지 놓은 뒤 캐리어 가방을 잠갔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해.”
황비서가 열어준 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에릭이었다.
에릭은 허벅지까지 오는 크기의 노란색 캐리어 가방을 들고 있었다.
“대표님. 출발할까요?”
언젠가부터 에릭은 나를 본부장이 아닌 대표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애초에 에릭이 태선증권에 입사한 게 아니기 때문에 에릭이 본부장이라고 할 필요는 없었다.
편하게 부르라는 내 말에 에릭은 그냥 대표님이라고 부르겠다고 말했다.
“그래. 슬슬 가지. 황비서도 내가 준 자료 다 읽어보고 내 권한을 준 것이니까 필요한 일은 임원소집도 임의로 결정해. 중요한 안건은 나한테 메일로 보고하고.”
“네. 알겠습니다.”
긴장한 것이 티가 났지만 황비서의 꼼꼼한 성격을 알기 때문에 걱정되지는 않았다.
배웅을 나오려는 황비서를 제지했다.
“일도 많은데 나올 필요 없어.”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황비서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에릭과 함께 건물 밖으로 나오자 임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에릭과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대표님이 같이 시애틀에 가자고 연락이 왔을 때 너무 기뻤어요. 그래도 제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고 했을 때는 당황했다니까요.”
“지금 나한테 황비서만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으니까.”
내 말에 에릭이 미소를 지었다.
에릭과 시애틀에 같이 가는 이유는 에릭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도 있지만 더 큰 이유들이 있었다.
우선 에릭이 한국에 오기 전까지 줄곧 살았던 곳이 바로 시애틀이었다.
투자회사와 택배사를 차릴 때 현지인인 에릭이 도움이 될 것은 분명했다.
에릭이 기대감에 부푼 표정으로 말했다.
“고향에 가니까 기대되네요. 안 그래도 친구에게 시애틀에 간다고 메일을 보냈어요. 한국에 오고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거의 5년만인 것 같은데요?”
에릭을 꼭 데려가야만 하는 이유.
에릭은 아마존닷컴을 창립했던 제프 베조스와의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쯤이면 제프 베조스는 아마존닷컴을 창업하기 위해서 투자처를 찾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투자처를 찾지 못했던 제프는 자신의 아버지인 미겔 베조스에게 90만 달러, 친척과 친구들에게 110만 달러로 총 200만 달러의 창업자금을 투자를 받게 되고 비로소 창업할 수 있게 된다.
제프가 아직 투자자들을 물색하고 있을 지금, 내가 그의 좋은 투자자가 될 생각이다.
아마존닷컴은 상장 당시 주당 18달러에서부터 시작했었다.
그 뒤로 계속 성장하게 되는 아마존닷컴의 주가.
처음 투자 지분의 일부만 받더라도 미래가치가 엄청날 것이다.
생각하는 사이 차가 멈췄다.
“대표님.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래. 임기사도 휴가 다녀와.”
“하하. 열심히 일했던 대가를 이렇게 받네요.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임기사는 차에서 캐리어 가방을 꺼내주고 돌아갔다.
눈앞에는 장대한 김포공항이 있었다.
“김포공항도 오랜만이네요. 퍼스트 클래스는 처음 타보고요.”
에릭의 표정에서 설렘이 느껴졌다.
“나도 퍼스트 클래스는 처음이네.”
“천하의 대표님이요? 유학도 갔다 오시지 않았나요?”
물론 재벌가의 자제인 ‘서강빈’은 타 봤겠지.
나는 말없이 캐리어 가방을 끌며 김포공항으로 들어갔다.
수속을 밟고 비행기에 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태선’의 사람으로 오지 않았지만 퍼스트 클래스의 손님의 대우는 남달랐다.
보안검색대를 통과하고 7번 게이트로 가자 승무원이 나와 에릭을 맞이했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승무원의 안내를 받고 퍼스트 클래스 좌석에 도착했다.
“좌석이 엄청 넓은데요? 누워도 되겠어요.”
“의자를 앞으로 접으면 침대로도 쓸 수 있어. 나중에 출발하면 누워.”
에릭이 신기한 듯 의자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에릭과 몇 걸음 떨어진 좌석에 앉아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이 항공사의 퍼스트 클래스는 의자와 침대가 독립되어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직까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일체형인 것 같았다.
비행기가 뜨고 에릭이 말을 걸었다.
“대표님. 최근에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닷컴과 관련된 주식이면 무조건 매수하기 시작했어요.”
“나도 들었어.”
IT 버블. 1995년부터 2001년 사이 일어난 투기, 투매 현상이다.
미국에서는 닷컴 버블이라고 부르지만 한국에서는 주로 IT버블이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제가 전에 닷컴주에 투자해야 된다고 했던 거 기억나시죠?”
“기억나지. 그게 우리 첫 만남이었으니까.”
“그때 대표님이 지금은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그럼 언제가 적기라고 생각하세요?”
닷컴주는 인터넷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벤처기업이 각광받으면서 한동안은 다시 꺼지지 않을 것 같은 활황기에 돌입했었다.
투자자들의 기대감은 당시의 기술을 넘어섰고 현실은 그들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에릭이 닷컴주에 투자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기대만 가지고 닷컴주를 샀고, 어떤 사람은 거품인 것을 알기에 닷컴주를 사지 않았다.
하지만 에릭은 사람들의 기대감과 더불어 닷컴주가 어디까지 부풀어 오를지 예측했기 때문에 닷컴주를 사자고 하는 것이다.
에릭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이제 곧 투자하게 될 거야.”
“기대가 되는데요.”
세계적인 기업 애플 또한 닷컴 버블의 영향으로 주가가 미친 듯이 폭등했었다.
애플은 1980년대 상장 당시만 해도 시가 총액을 무려 17억 달러까지 끌어올린 기업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애플은 IBM과 마이크로소프트 연합에 밀려 PC 시장에서 완전히 도태되게 된다.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회사에서 쫓겨나고 주가는 계속적으로 하락했다.
그러니 한번 주목 받았다가 잠깐 하락세를 맞은 지금이 구매할 적기다.
승무원이 에릭에게 다가갔다.
“기내식은…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승무원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돌아갔다.
에릭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제대로 쉰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늘은… 조금 쉬어도 되겠지.
***
시애틀 타코마 공항에 도착했다.
아무 걱정도 없이 잠든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직항이었기 때문에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몸은 어느 때보다 상쾌했다.
공항 앞에는 에릭이 예약한 ‘데이앤드 호텔’의 직원이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서비스가 좋네.”
“그럼요. 다운타운에서 가장 비싼 호텔이에요. 하하.”
에릭이 기분좋게 웃었다.
직원이 우리의 캐리어 가방을 받고 영어로 물었다.
“차량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숙소로 먼저 가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들릴 곳이 있어서 저희가 알아서 숙소에 가겠습니다.”
종업원은 알겠다고 대답하며 캐리어 가방을 끌고 사라졌다.
“먼저 카페를 가고 싶다고 하셨죠? 제 단골집이 있는데 그곳으로 모실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캐피톨 힐로 향했다.
시애틀은 지리적으로 봤을 때 작은 도시에 속하지만 독특한 지역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 지역마다 다른 느낌을 준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잡은 숙소가 위치한 다운타운은 큰 도시의 느낌이다.
항상 활발한 느낌을 주며 늘 사람들로 붐빈다.
해변을 따라서 여객선 터미널과 대관람차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곳이었다.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캐피톨 힐은 다운타운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예술가의 거리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곳은 대학가가 펼쳐져 있고 다양한 쇼핑거리와 특유의 분위기가 좋은 곳이다.
택시에서 내리고 에릭이 먼저 앞장서서 걸어갔다.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지나가는 에릭은 감상에 젖어 보였다.
“여기예요!”
에릭이 멈춰선 곳은 고전적인 느낌을 풍기는 건물이었다.
문 위에 있는 네 개의 유리창에는 빨간 글씨로 V, I, T, A가 적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커피의 산미가 코를 자극했다.
밖에서 볼 때는 별로 커 보이지 않았는데 내부가 꽤 넓었다.
“주문은 에릭이 내 것까지 알아서 해줘.”
“네. 여기는 콜드브루를 꼭 마셔야 돼요. 대표님 것까지 두 개 주문할게요.”
신이 난 에릭이 카운터로 쪼르르 달려갔다.
나는 먼저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전생에서도 에릭은 커피에 대해 진심이었다.
에릭이 한국에 들어오면 늘 스타벅스를 찾았던 것이 생각났다.
미국의 세계 최대 커피 체인점, 스타벅스가 시작한 곳도 시애틀이었다.
스타벅스는 이미 미국에서 매장만 200여 개가 넘을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아직 성장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스타벅스의 진가는 곧 있을 세계시장 진출에서부터 나타나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에릭이 콜드브루 두 잔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
입구에서 맡았던 산미가 다시 느껴졌다.
진하면서도 부드러운 질감이 마음에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고 에릭도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한국 법인을 설립하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데 미국은 얼마나 걸리지?”
“음… 편차가 있기는 한데 보름 정도로 예상하시면 돼요.”
보름이면 한국보다 길긴 해도 문제는 없다.
나는 미리 캐리어 가방에서 꺼내둔 봉투를 에릭에게 줬다.
“전에 말했던 GB로지스틱스와 GB인베스트먼트 설립에 대한 자료야. 대표는 나지만 실질적인 인사와 관리는 에릭, 네가 맡아줬으면 좋겠어.”
에릭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경영에 관해서는 많이 공부했지만 직접 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해봤는데요. 대표님과 함께하는 일이기 때문에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고마워. 쉬운 일이 아닌 만큼 너의 가치에 맞는 연봉을 주고 싶어. 너는 네 가치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해?”
내 말에 에릭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에릭은 저번 수익분배에서 3억 7천만 원을 받았다.
월평균급여 수준이 82만 원인 때였다.
3억 7천만 원이란 돈은 사회초년생이 상상할 수 없는 돈이었기에, 에릭이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생에서 펼쳤던 에릭의 활약들을 돌이켜보면 그 정도의 대가는 당연한 것이다.
그가 괜히 미국증권사 두 손가락에 드는 뱅가드의 대표가 된 것이 아니다.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연봉으로 3억을 주지. 그리고 커미션으로 투자 수익의 1퍼센트를 줄게.”
“네? 저한테 그만한 실력이…”
“있어. 그리고 추가로 GB로지스틱스와 GB인베스트먼트에 대한 급여는 따로 지급할게.”
에릭이 몸을 떨다가 결심한 듯 내 손을 꽉 잡았다.
“받은 가치에 걸맞는 사람이 될게요.”
에릭의 눈이 밝게 빛났다.
그는 왜 이렇게 높은 연봉과 커미션을 주는지 묻지 않았다.
투자받은 가치에 대해선 반드시 그 이상으로 되돌려주는 것.
그것이 에릭 장이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