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태선백화점은 이전에도 사람이 많았지만 택배 서비스가 시작되고 몇 달이 지난 지금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미리 연락하긴 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마중나오기 힘든 상황인 것 같았다.
VIP용 엘리베이터는 특별한 카드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안내데스크로 향했다.
안내데스크에도 줄이 길어 꽤 기다려야 했다.
바쁜 와중에도 직원의 목소리가 밝았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네. 저는 GB택배의 대표, 서강빈이라고 합니다. 서남순 사장님과 약속이 잡혀서 찾아 왔습니다.”
“네, 네?”
당황한 직원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가 허리를 숙였다.
“줄을 서 계신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안내데스크에 있던 세 명의 직원 중 한 명이 자리를 비우자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다.
“누군데 저래?”
“재벌이라도 되나 보지. 저 사람 때문에 더 기다려야 되는 거 아니야?”
줄 서 있는 사람들의 원성을 뒤로 하고 직원의 안내를 받았다.
직원이 VIP용 엘리베이터에 카드키를 찍고 내 옆에 섰다.
“위까지 안내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자리를 비우시면 안 되죠.”
“괜찮습니다! 이게 제 일입니다.”
“저는 정말 괜찮으니 돌아가세요.”
직원은 망설였지만 내 강건한 표정을 보고 결국 물러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에 도착했다.
그새 비서실 쪽으로 연락했는지 직원 한 명이 엘리베이터 앞에 마중 나와 있었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보내긴 했는데 북새통이라…”
“괜찮습니다. 태선백화점에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남순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고모, 안녕하세요.”
“강빈아! 목소리만 들어도 반가웠는데 얼굴을 보니까 더 반갑네.”
남순은 곧장 일어나 나를 소파로 안내했다.
“사업 얘기는 전화로 들었고. 디지털사운드는 입점했어. 혹시 위치 봤니? 꽤 신경썼는데.”
“감사합니다. 고모가 알아서 좋은 위치로 주실 줄 알았어요. 택배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불편한 건 없으셨어요?”
“불편한 거? 음…”
남순은 고민하다가 이내 말하기 시작했다.
“택배로 상품을 받은 고객이 단순변심으로 반품을 할 때, 상품이 훼손되어서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 아무래도 제품과 같이 동봉된 완충제를 빼는 경우가 있어서 그런 것 같아. 처음에는 당연히 그냥 환불해주었는데 이런 사례가 쌓이다 보니 손실이 생기네.”
아직 택배에 대해서 정립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였다.
전생에서는 공정위에서 정한 규칙을 따라 반품을 진행했지만 아직은 그런 것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까지 배송했던 상품들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을 것 같네요. 다만 앞으로는 반품을 할 수 있는 기간을 정하세요. 상품을 받은 날로부터 최대 일주일 정도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객이 반품을 원할 시 물건을 확인하기 위해 뜯은 포장을 제외한 완충제나 이중포장은 다시 해야 한다고 배송 전에 알려주세요. 그리고…”
그 외에도 전생에 내가 알고 있었던 반품 요령이나 환불 절차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했다.
남순은 수행비서를 불러 내가 하는 말들을 메모하게 했다.
“네 말대로 하면 확실히 그런 사고들이 줄어들겠다. 너는 대체 그런 생각들을 어떻게 하는 거니?”
“제 사업이니까요. 평소에 생각이 많습니다.”
남순이 내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젊은 애가 말하는 걸 보면 꼭 내 또래 같다니까? 네 덕에 걱정을 덜었네. 너는 뭐 필요한 거 없고?”
“이번에 입점한 디지털사운드 제품을 직접 사용해보고 체험해볼 수 있는 구역을 만들고 싶습니다.
“시연회 말하는 거지? 디지털사운드 매장 안에서 하는 거면 네 마음대로 해.”
“아뇨. 제가 하려는 건 조금 다릅니다. 태선백화점 안에서 MP3를 직접 사용해보고 음원을 넣는 방법을 배우고, 노래도 들어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체험 마케팅은 단순히 제품의 이해와 제품을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시연회와는 다르다.
아직 MP3파일을 휴대용 기기에 넣는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체험 마케팅을 진행하려고 했다.
직접 MP3파일을 기기에 넣어보고 음악을 듣는 과정을 해본다면 그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라운지가 필요하다는 거니? 미안하지만 태선백화점의 라운지는 VIP전용이어서 네가 원하는 체험공간은 할 수가 없을 것 같구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활용되지 않는 공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은 다른 공간으로 활용하려는 것 아닌가요?”
이미 황비서의 조사를 통해 물색해 둔 곳이 있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니? 그래서?”
“MP3 체험 공간을 만들고, 체험공간의 기간이 끝나면 설치했던 것들을 그대로 둘 수 있습니다. 소파나 테이블, 그 외의 필요한 것들을 설치하는 비용도 모두 제가 내겠습니다.”
어차피 빈 공간을 활용하려고 했던 남순에게는 전혀 나쁜 제안이 아닐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남순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내가 손해 볼 건 없네. 그래도 네가 라운지에 필요한 비용을 댄다고 했으니까 임대기간은 넉넉하게 줄게.”
“그래 주면 저야 감사하죠.”
남순의 수행비서가 가져온 계약서를 통해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을 체결했다.
“그럼 저 가보겠습니다.”
“그래. 언제든 놀러 와.”
남순이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
MP3에 대한 마케팅이 더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선백화점에서 나오고 MP3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은 거리를 다시 방문했다.
차에서 내려 임기사에게는 잠시 둘러보고 오겠다고 말했다.
겨울이었지만 한낮이어서 그런지 춥지는 않았다.
앞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가 들려왔다.
골목을 돌자 전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던 음반가게가 보였다.
노래는 음반가게 앞에 진열된 워크맨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유심히 워크맨을 살폈다.
간단한 디자인에 색상의 종류도 많지 않았다.
사람들이 음반 기기를 구매할 때 당연히 음질에 대해 따질 것이다.
그러나 디자인이나 희소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을 자극시킬만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고민을 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들려온 노랫말에 멈춰 섰다.
“오 그대여. 가지 마세요.”
‘난 알아요’의 가사였다.
지금 서태지와 아이들의 앨범이 음반시장에서 차지하는 지분은 상당했다.
일명 ‘서태지와 아이들 신드롬’을 이용해서 관련된 디자인을 하고 포스터를 만들어 팔아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또, 태선백화점에서 론칭하는 한 달 동안 한정판으로 콜라보하는 것이라고 하면 더욱 폭발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다.
회사에 돌아오자 황비서가 서류를 들고 찾아왔다.
“고생하셨습니다. 서남순 사장님과는 이야기가 잘 되셨나요?”
“MP3가 론칭되는 한 달 동안 라운지에 대한 권리도 확정받았어.”
“말씀하신 대로 되셨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준비한 자료는 준비됐어?”
며칠 전 황비서에게 MP3의 PPL을 맡길 방송국과 드라마에 대해 알아 오라고 지시했다.
“본부장님께서 요청하신 자료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지상파 방송 3사에 모두 문의한 결과, 비용은 세 곳 다 크게 차이 나지 않았습니다. 시청률마다 비용은 달라집니다. 하지만 시청률의 상승폭보다 비용의 상승폭이 낮아서 시청률이 높은 방송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때 당시의 PPL은 미래보다 훨씬 과감했다.
작년에 방영했던 ‘파일럿’은 항공사의 명칭과 로고가 극 중에서 고스란히 나오기도 했다.
실제 항공사의 사장이 항공사 사장 역으로 특별출연하며 화제를 모았다.
“아직 방영되지 않은 방송 중 시청률이 가장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게 뭐지?”
“SCB의 ‘모래시계’입니다.”
모래시계.
평균시청률 50프로를 돌파했던 역사적인 드라마다.
아직 방영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사람들의 관심이 들끓고 있었다.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최민수의 표정이 떠올랐다.
MP3 자체가 아직 생소한 사람들이 많을 테니 상황에 맞는 자연스러운 장면이 필요했다.
“최민수가 벤치에 앉아서 MP3를 들으며 쓰린 마음을 달래는 장면은 어떨까?”
황비서는 잠시 고민하더니 괜찮을 것 같다고 얘기했다.
“PPL은 메인스폰으로 드라마 전 화에 걸쳐서 붙이거나 한화에만 붙일 수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캐스팅이 화려하다 보니 다른 방송에 비해 가격이 높습니다. 메인스폰은 1억 원 정도이며 한 화에 등장시키는 것은 3천만 원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1억3천만 원을 투자하겠다고 전해. 메인스폰으로 붙이되, 아까 내가 말했던 장면을 추가하는 조건으로.”
“네. 본부장님이 말씀하신 조건으로 계약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황비서가 자리를 떠났다.
전생에서 M3P는 한번의 큰 실패를 겪고 다시 출시된 이후 크게 히트친 제품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처음부터 성공할 것이다.
음악을 들으며 고뇌에 빠진 최민수와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군 서태지와 아이들의 포스터가 사은품으로 나간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될까?
***
시간은 빠르게 흘러 3월이 되었다.
그사이 부산 등 5개의 직할시가 광역시로 변경되었고 GATT의 후신으로 세계무역기구가 출범되었다.
내가 있는 서울시에서는 가뭄 극복을 위해 수요일 절수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GB택배는 경쟁사들이 올라오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진 독보적으로 시장을 점유하고 있었다.
이전에 남순에게 택배반품이나 환불요령등에 관해서 정보를 알려준 것도 크게 작용했다.
경쟁 택배사들은 철면피 영업을 계속하다가 이제야 GB택배의 영업방식을 따라가고 있었다.
시장을 먼저 점유했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의 격차가 좁혀지지 않는 이유는 투자금의 차이였다.
저번에 200억 원을 추가로 들여 건설한 각지의 물류센터와 영업소들은 배달에 걸리는 시간을 크게 줄여주었다.
경쟁사들은 가격을 낮춰가며 분전했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웃돈을 주더라도 GB택배를 이용했다.
내가 갖고 있던 정보로 택배가 체계화하는 시간을 압도적으로 줄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독점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벌어들이는 수익도 예상을 웃돌았다.
황비서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매출액만 벌써 4400억 원에 다다랐습니다. GB택배의 영업이익만 벌써 220억 원이 넘습니다.”
홍보와 입소문, 택배의 편리함을 알게 된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GB택배는 미친 성장을 보였다.
게다가 아직 물류회사의 수익구조가 확립되지 않은 시기였다.
전생에서는 영업이익이 2프로도 넘기 힘들었지만 5프로 정도를 챙길 수 있었다.
나로서도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황비서에게 말했다.
“MP3는 어떻게 돼가고 있지?”
“70만대가 팔렸고 매출액은 711억 원입니다. 디지털사운드의 지분이 30프로에 회수 받은 마케팅비를 합치면… 92억 원이 넘습니다.”
MP3로 92억 원, GB택배로 220억 원, 그리고 내가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돈이 96억 원.
드디어 미국진출을 위한 투자금 약 400억 원이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