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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9화 (19/249)

#19화

영일제약 건물에 들어가자 알큰한 한약 냄새가 진동했다.

처음엔 코를 막았지만 곧 적응되어서 괜찮았다.

영일제약의 선대회장인 부규는 국내 제약산업 발전에 초석을 다진 1세대 제약인이었다.

많은 고난을 겪고도 원칙을 지키는 정도경영의 표상인 인물이기도 했다.

부규가 죽기 전에 했던 말 중 유명한 말이 있다.

‘회사를 경영하며 돈을 얻었다면 그건 조금 얻은 것이다. 명예를 얻었다면 많이 얻은 것이다. 하지만 신용을 얻었다면 그건 모든 걸 다 얻은 것이다.’

이런 말을 남길 정도로 돈과 명예보다는 사람들과의 신용, 화합을 중시했던 사람이다.

‘한방의 과학화’를 창업 이념으로 설립한 영일제약은 다양한 의약품과 건강음료를 개발해낸 곳이다.

영일제약이 이룬 것 중 가장 큰 업적인 에이즈 치료제 완성은 2년 뒤의 일이다.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방들은 외부인인 내가 들어갈 수 없었다.

그 외에 다른 직원들도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안내데스크에 있는 직원에게 부규의 집무실을 물었다.

“회장님 사무실은 제일 위층 안쪽에 있습니다.”

계단을 올라 부규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노크를 하자 안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노쇠한 남자가 보였다.

허리가 조금 굽고 머리가 하얗게 세었지만 강렬한 눈은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집무실은 한 기업의 대표의 방이라고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검소했다.

진열장에는 사치품 하나 없이 영일제약에서 만들어 온 약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오래되어 낡은 가구 중 하나인 책상 흔하게 볼 수 있는 브랜드의 것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진태 회장님 손자 서강빈이라고 합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부규가 미소를 지었다.

“진태에게 자네가 나를 만나고 싶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놀랐네. 우선 앉지.”

나는 고개를 숙여 다시 한번 인사하고 소파에 앉았다.

세월에 풍파된 소파는 앉는 자리가 눌려있었다.

전생의 내 집무실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내 표정을 봤는지 부규가 호탕하게 웃었다.

“좀 오래 되긴 했지. 이렇게 한 자리에 계속 있다 보면 익숙한 게 더 좋아. 직원들도 매번 바꾸라고 성화지만 있던 게 편한 걸 어떡하나.”

부규는 내 생각보다 훨씬 검소한 사람 같았다.

“아닙니다. 제 표정이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닐세. 무슨 일로 왔는가? 자네가 온다는 얘기만 들었지, 자세한 사정은 듣지 않았네.”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 얼마전 에이즈 관련 뉴스를 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에이즈에 감염되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더군요. 영일제약에서 에이즈 신약에 대해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의미 있는 일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되어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감정을 호소하는 것이 진태에게는 아무 의미 없겠지만 부규 같은 사람은 달랐다.

일선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평생을 의료 소외계층을 위해 노력하고 연구해온 사람이 부규였다.

부규의 그런 심성을 알기 때문에 직원들이 상여금까지 반납했다고 회고록에서 읽었다.

“그래. 자네 말대로 우리 회사는 에이즈 관련 신약 임상시험에 힘을 쓰고 있어. 아직 시간이 꽤 걸릴 테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지.”

부규는 담담하게 자신이 하는 일을 말했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서 그의 고집을 느낄 수 있었다.

부규가 말하는 최선은 말 그대로 그의 최선이었다.

신약개발로 자금난에 시달리면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대표의 자리를 물려받은 아들이 그를 설득하려고 수없이 노력했지만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결국 그의 집념이 에이즈 신약을 만들게 되었다.

“제가 그 연구에 더 힘을 드리고 싶습니다. 현재 영일제약이 처한 상태도 잘 알고 있고, 에이즈 신약개발에 투자…”

“그만.”

신약개발 투자라는 말을 들은 부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졌다.

그의 이런 반응을 예상못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이미 수많은 투자제의가 들어왔어. 거기에 자네 하나 추가된다고 다를 건 없네. 아니면 자네는 그들과 다르다는 건가? 서회장의 손자라서?”

나는 좀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저도 조건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투자자들과는 조금 다른 조건일 겁니다.”

“말해보게.”

부규는 여전히 관심 없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진태의 소개로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나는 쫓겨났을지도 모르겠다..

“영일제약이 에이즈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지금 당장 60억을 투자할 수 있습니다.”

“그건 다른 투자자들도 마찬가질세. 투자를 받고 주도권을 잃은 제약회사가 무너지는 것을 내가 얼마나 봐왔을 것 같나.”

“... 저는 연구에 실패할 시 영일제약에 위약금을 단 한 푼도 청구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영일제약의 경영권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않도록 계약서에 명시하겠습니다.”

사실 에이즈 치료제 개발은 수많은 시도 끝에 성공한 우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지금은 부규조차 이 연구가 성공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을 것이다.

이득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감으로 하고 있다는 말이다.

부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자네는 이번 연구가 성공할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쪽 분야에 대한 자세한 지식은 갖고 있지 않지만, 에이즈라는 병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부규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수 분의 시간이 지나고 부규가 입을 열었다.

“조건은?”

“에이즈 치료제가 개발되고 국제 특허를 내게 된다면, 매출의 단 5퍼센트만 저에게 주십시오.”

제약사의 영업이익률은 15퍼센트 정도다.

매출액의 5퍼센트는 순이익에 비해 큰 편이 아니다.

그러나 에이즈 치료제의 개발에 성공하고 전 세계적으로 유통이 시작되면 가져올 이익은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크다.

5퍼센트를 강조해서 말했지만 부규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부규의 웃음소리가 집무실에 울렸다. 그리곤 말했다.

“그 할애비에 그 손자구나. 어떻게 해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 좋아. 계약하지. 단, 자네가 말했듯 신약 개발에 실패하면 자네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 60억을 허공에 날리는 셈이지. 그래도 괜찮은가?”

“만약 실패를 하더라도 저는 60억을 날렸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돈을 보고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영일제약이라는 회사의 신념을 보고 투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규는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는 오늘 작성할 텐가?”

“저는 상관없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작성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수 분이 흐르고 부규의 비서가 계약서를 갖고 왔다.

계약서를 작성하면서도 부규는 흥미롭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투자금은 적어도 내일까지 계약서에 명시된 계좌로 보내겠습니다.”

“알겠네.”

나는 들어올 때처럼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부규는 생각했던 대로 쉽지 않은 상대였다.

사업은 보통 돈과 돈의 이해관계가 얽혀 이루어지는 것인데 부규가 원하는 것이 돈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좋은 결과를 얻어서 다행이었다.

***

영일제약에 투자를 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부규에게서 따로 연락은 오지 않았지만 투자금이 없어서 멈춰있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것이다.

TV에서 우연히 에이즈에 관련된 뉴스를 본 것이 행운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MP3의 성공을 위해 어떤 마케팅을 펼쳐야 될지 고민되었다.

과거 디지털사운드는 한샘미디어와 계약을 했었다.

한샘미디어의 브랜드 인지도와 함께 효과적인 마케팅을 펼쳐주겠다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한샘미디어는 마케팅적으로 전혀 소질이 없었다.

MP3의 기능적인 측면과 부가적인 장치 없이 휴대가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했어야 했지만, 가격을 강조하는, 이해하기 힘든 마케팅을 펼쳤다.

돈이 없는 학생들은 살 생각도 하지 못했고, 직장인에게도 부담스러운 가격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이전에 판매되었던 가격보다는 싸게 팔되 기능적인 측면을 좀 더 살리는 쪽으로 연출하는 것이 필요했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리고 황비서가 들어왔다.

“전에 요청하신 워크맨에 대한 자료입니다. 브리핑 시작할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곧이어 황비서가 브리핑을 시작했다.

“워크맨은 일본의 소니에서 만든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입니다. 녹음 기능을 제거하고 재생기능에 초점을 두어 휴대용에 맞춰서 출시한 제품입니다. 출시한 지 십 년이 넘었고, 전 세계 판매량은 1억 대를 넘어섰다고 합니다. 기존 일본제 워크맨은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90년대에 들어와 말레이시아, 중국에서 저가형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판매가격은 9만 원으로 책정되어 있습니다.”

워크맨은 2000년대에 이르러서도 꾸준히 사랑받던 음향기기였다.

디지털사운드에서 개발하게 될 MP3에 비해 휴대용도, 실용성도 떨어졌지만 저가형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판매량이 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워크맨이 9만 원이라면 MP3는 얼마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아?”

황비서가 고민을 하다가 이내 대답했다.

“MP3가 워크맨보다 뛰어난 제품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국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기라는 점은 동일합니다. 때문에 워크맨보다는 비싸게 책정을 하더라도 가격대 자체는 큰 차이가 없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황비서의 생각도 나와 같았다.

워크맨보다는 비싸지만 소비심리를 자극시킬 합리적인 가격을 설정해야 된다.

“10만 원 정도가 적당하겠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격대 설정은 조대표와 상의하면 끝날 것이고 이제 남은 것은 마케팅이었다.

그리고 마케팅과 관련해서 좋은 효과를 봤던 사례가 있었다.

“남순 고모님께 전화 연결해.”

황비서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나갔다.

남순에게 직통으로 전화를 할 수도 있었지만 사업에 관해서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태선백화점 측을 통해 연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뒤, 내 책상 위에 있는 전화가 울렸다.

“서남순 사장님과 연결되었습니다. 본부장님과 연결할까요?”

“바로 연결해.”

삐, 하는 소리가 울리고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네?”

“고모, 그동안 잘 지내셨죠?

“나야 뭐 늘 일에 치이지. 너는 어때?”

“저도 그렇죠, 뭐. 사업 쪽으로 관심을 두면서 증권사 일도 하려니 너무 바쁘네요. 백화점은 요즘 어떠세요?”

“어떠긴. 너랑 동업한 뒤로 매출이 계속 오르고 있어. 택배빨 떨어지면 매출 떨어질까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네.”

남순은 들뜬 목소리로 내 공을 치하했다.

“고모가 잘 되는 게 저한테도 좋은 거 아니겠어요? 하하.”

“입 발린 말도 잘하네? 그런데 우리 조카께서는 오늘 왜 연락을 했을까. 나 또 기대해도 되는 거야?”

역시 남순은 눈치가 빨랐다.

“딴 건 아니고 제가 이번에 투자한 사업이 하나 있는데요. 아무래도 백화점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떤 사업인데?”

남순의 목소리에 궁금증이 잔뜩 배어 있었다.

이번에도 내 사업 아이템으로 백화점의 매출을 올릴 수 있을까 기대하는 눈치였다.

“MP3라고, 음악 파일을 재생할 수 있는 기기입니다. 개발은 다 끝났고 출시를 앞두고 있는데요. 고모네 백화점에서만 일정 기간 독점으로 입점시키고 싶어서요.”

“어머. 태선백화점에 독점으로? 근데 강빈아. 태선백화점에 입점하는 것 자체가 원래는 어려운 일인 거 알지?”

알고 있다.

서류심사부터 시작해 평가절차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는 거.

입점하고 싶다고 너도나도 할 수 없는 곳이 백화점이라는 거.

게다가 아직 출시조차 하지 않은 제품이다.

절차대로 심사기간을 가진다면 얼마나 걸릴지는 나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태선백화점의 주인인 남순의 힘이라면 그런 절차는 필요 없을 것이다.

나는 요점만 툭툭 남순에게 말했다.

“고모가 태선백화점의 사장님이시잖아요. 그리고 이번 사업도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입점하는 한 달 동안 수수료로 30프로를 낼게요.”

30프로.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남순에게는 좋겠지만 MP3의 수익적인 측면에서는 굉장히 악조건이다.

하지만 애초에 태선백화점에서 입점이 그 잠깐의 수익을 바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

GB택배의 사례처럼 MP3 자체를 알릴 홍보를 위한 수단이었다.

“30프로나?”

“네. 아무래도 고모가 신경 써주시는데 저도 도리를 해야죠.”

“30프로 주면 너는 뭐 남는 게 있니?”

남순에게는 전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기 때문에 반응이 긍정적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30프로 드려도 될 만큼 자신 있습니다. 홍보 잘 되면 고모도 가져갈 수 있는 게 커지잖아요. 좋은 위치로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남순의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호호. 얘도 참. 당연하지. 자리는 걱정하지마. 고모가 좋은 곳으로 하나 킵해둘게.”

“네. 세부적인 계약서는 작성해야 하니까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우리 사이에 무슨. 그래도 조카 얼굴 보고 싶으니까 한번 와.”

간단한 인사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내가 이제 태선백화점에 가는 것은 남순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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