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희수가 초대한 곳은 명동에 이탈리안 레스토랑, ‘씨락’이었다.
씨락은 이전에 투자했던 목화제당과 제휴를 한 곳으로 현재, 다섯 개밖에 없는 패밀리 레스토랑 중 한 곳이었다.
씨락에 들어가자 가운데 테이블에 앉아 있던 희수가 나를 발견했다.
“서본부장님! 여깁니다.”
손을 든 희수의 옆에는 현아도 앉아 있었다.
자리로 가자 희수가 손을 선뜻 내밀었다.
나도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현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강빈 씨, 그때는 정말 고마웠어요.”
“하하.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어요.”
희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선 자리에 앉으시죠.”
내가 먼저 자리에 앉고 희수와 현아가 연달아 앉았다.
희수를 보며 말했다.
“꼭 한번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연이 닿아 다행입니다.”
“저도 서본부장님 같은 사람과 이렇게 연이 닿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그것보다 투자 성공을 한 것을 들었는데 정말 대단하시던데요?”
능청스러운 희수의 말에 나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너무 치켜세워주실 필요 없습니다. 최대표님도 한 기업의 오너시지 않습니까.”
“아직은 부족한 게 많은 회사입니다. 하하…”
희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픽앤픽이 미국 홈쇼핑에서 대박을 터트리기 전까지 힘든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사정이 좋지 않은 것 같다.
“패밀리 레스토랑이 생긴 지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원래도 와이프가 이태리 음식을 좋아해서 집에서 자주 해먹었습니다. 서본부장님은 어떠십니까?”
“최근에는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했는데, 저도 간만에 제대로 된 식당에 오니 기분이 좋습니다.”
내 긍정적인 반응에 희수가 밝게 웃었다.
“다행이네요. 그보다 메뉴는 경양식 위주로 시켰는데 괜찮으십니까?”
“네. 좋습니다.”
그때 종업원이 다가와서 스프를 테이블에 놓았다.
희수가 수저를 들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이 스프가 가장 맛있더군요. 우선 먹고 얘기하실까요?”
“그러죠.”
후추를 조금 뿌리고 스프를 먹기 시작했다.
따뜻한 것이 몸으로 들어오자 마음까지 훈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스프를 먹고 이어서 함박스테이크와 토마토 스파게티, 그리고 각종 튀김 요리들이 연이어 테이블에 놓였다.
“부족하시면 말씀하세요! 오늘 저녁은 제가 사는 거예요.”
현아가 나를 보며 당차게 말했다.
“네.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음식은 전혀 부족한 양이 아니었다.
전생에 갔던 레스토랑들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으로 많았다.
천천히 대화를 하면서 요리들을 먹었다.
제대로 된 밥은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자 종업원이 다가왔다.
종업원이 곧바로 테이블에 놓인 접시들을 치웠다.
“그보다 서본부장님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GB택배의 소문과 명성이 자자합니다.”
“맞습니다. 지나가는 트럭을 보고 생각났던 사업이었죠.”
“그말은 서본부장님께서 직접 고안하신 사업이란 말입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희수와 현아는 감탄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오가고 나는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낼 때라고 생각했다.
“최대표님. 혹시 지금 밀폐용기 사업을 진행 중이지 않습니까?”
희수의 목소리에서 놀람이 묻어났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사업하시는 분들은 이 분야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서… 이렇게 먼저 얘기를 꺼내주신 분은 서본부장님이 처음입니다.”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종업원이 식후 음료를 가져와 각자의 자리 앞에 놓았다.
희수가 이어서 말했다.
“현재 새로운 기법을 개발했습니다. 곧 상용화될 거구요. 그때가 되면 씨락보다 더 좋은 곳으로 초대하겠습니다. 하하.”
희수의 말에서 그가 얼마나 이 사업에 진심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진심과 달리 처음 픽앤픽에 대한 반응은 싸늘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희수의 기대를 무너뜨려선 안 된다.
“저도 기대가 되는데요? 픽앤픽은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겁니다.”
“서본부장님이 그렇게 말해주니 더 안심이 되는군요.”
희수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은 픽앤픽을 도와줄 수 없다.
개발이 덜 끝난 상태라면 연구자금을 지원해 줄 수 있었겠지만 픽앤픽은 이미 개발이 끝난 상태.
픽앤픽이 제품을 출시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어떻게 상품을 대중에게 알리고 상용화시키는지 일 것이다.
TV나 신문 등에 홍보는 할 수 있겠지만 한계가 분명 있다.
그런 한계를 뚫기 위한 방법
나는 그 방법을 알고 있다.
픽앤픽의 가능성은 한국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픽앤픽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을 상품이니까.
“최대표님. 앞으로도 이렇게 종종 식사 자리가 있었으면 하는데, 어떠십니까?”
“저야 좋죠. 대화가 잘 맞아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서본부장님도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만나서 반가웠어요. 강빈씨.”
희수와 현아를 먼저 보내고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
오늘도 태선증권사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각국의 언어로 통화하는 직원들과 모니터에 비친 자료들을 끊임없이 분석하는 직원들을 지나쳤다.
집무실에 들어가자 대화를 하고 있는 에릭과 황비서가 보였다.
“어, 본부장님! 오랜만이에요.”
“본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나도 가볍게 묵례로 대답을 대신했다.
“황비서는 일전에 말했던 조사 진행하고 에릭은 나랑 얘기 좀 하자.”
황비서가 나가고 나와 에릭은 소파에 앉았다.
에릭은 크리스맨뱅크 투자가 끝난 뒤에 다음 투자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은 잘돼 가?”
“네. 아직까지는 순조로워요. 미국진출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저도 열심히 해야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미국에 내 투자회사, GB인베스트먼트를 세울 것이다.
GB인베스트먼트는 에릭에게 맡길 것이기 때문에 그전까지 내가 알던 정보를 확실히 주입시켜야 한다.
“그리고 최근 내가 투자한 MP3는 어떤 것 같아?”
에릭은 잠시 고민 하더니 대답했다.
“저는 음악 듣는 취미가 없어서 쓸 것 같진 않은데요. 평소에 음악을 듣는 대중들은 분명 좋아할 거예요. 지금은 휴대용이라는 게 말로만 휴대용이잖아요?
“그렇긴 하지.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무게도 있고. 들고 다니는 사람도 별로 보이지 않았어.”
“네, 그러니까요. 워크맨 같은 경우엔 부피가 엄청 크진 않아도 테이프까지 들고 다녀야 하잖아요. MP3는 부피도 작고 테이프같이 추가로 들고 다녀야 할 것도 없으니까 좋은 사업 아이템인 것은 분명해요.”
확신을 가진 것처럼 얘기를 하는 에릭을 보니 나도 마음이 놓였다.
“아무래도 가격대가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요? MP3가 좋은 제품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수록 판매량이 급증할 것 같은데요. 판매금액은 정했나요?”
“아직. 나오면 알려줄게. 하나 선물해줄까?”
내 말에 에릭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 음악 잘 안 들어요. 지금 미국 시장 조사로 바쁘기도 하고요.”
최근 맡긴 미국의 투자 일로 에릭은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에릭은 힘들다고 투덜대긴 해도 미국진출에 기대감을 안고 있는지, 시키지 않아도 야근까지 해가며 철저하게 조사를 해오고 있다.
에릭의 말처럼 MP3는 출시와 동시에 세간의 관심을 받는다.
그러나 전생에서는 가격대 설정의 실패로 그 인기가 오래가지 않았다.
이후 MP3가 각광 받는 것은 몇 년 뒤의 일이었다.
면밀히 고민하고 조대표와 상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에릭이 걱정된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GB택배를 벤치마킹한 회사가 계속해서 생기고 있는데 알고 계셨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만 할 수 있는 사업은 아니니까. 오히려 생각보다 느리게 나타났어. 하지만 아직까지는 우리의 기술이나 시스템을 완벽히 따라 하진 못 할 거야.”
“다른 택배사들은 배달 과정에서 문제점이 많다고 들었어요. 체계화도 아직 GB택배처럼 정교하지 못한 것 같고요. 하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예요.”
진심으로 GB택배를 걱정해주는 에릭을 보며 피식 웃었다.
“경쟁사들이 GB택배를 따라잡으려면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할 거야. 그것 때문에 투자를 받지 않은 것이기도 하고. GB택배의 평판은 계속 올라가고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경쟁사들과 경합하며 수익이 줄어들 것이다.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GB택배를 독보적인 기업으로 키워내서 차별화해야 한다.
“에릭. 내가 택배사업으로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으로 미국에 투자하고 싶어.”
에릭은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투자회사를 세우려는 거죠?”
“맞아. 내 이름을 내건 투자회사, GB인베스트먼트를 미국에 세울 거야. 그리고 물류회사, GB로지스틱스도. 정확한 내용은 빠른 시일 안에 줄게. 우선 내가 말한 두 회사의 사업자로 등록해줘.”
“네. 알겠어요. 그런데 물류회사요?”
에릭이 의문을 갖는 것도 당연했다.
GB택배는 이제 막 시작한 회사다.
한국에서도 완전히 자리 잡은 것은 아닌데 벌써 미국진출이라니 의아했을 것이다.
“미국에서 만들 물류회사의 주요 업무는 공장에서 협약을 맺은 상품을 미국으로 가져가고 미국의 상품들을 한국으로 다시 가져오는 게 될 거야.”
“하긴. 가속화되는 인터넷 발전과 달리 그것에 발맞춰서 기획하는 것들은 별로 없어요. GB로지스틱스가 그 시발점이 되면 좋겠네요.”
***
영일제약은 갖은 자금난과 경영난에 시달렸었다.
대표인 부규와 직원들의 노력 끝에 신약을 개발하고 겨우 살아남은 중견기업이었다.
그러던 와중 몇 년 전, 수석연구원 강성일이 ‘KD GUO 1’이라 불리는 치료약 추출에 성공했다.
영약제약의 오래된 연구실에서 사람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에이즈 치료제의 상용화에 성공하게 된다면 감히 예상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수익을 얻을 것이다.
미국의 조지타운대학과 공동으로 연구하기로 협약까지 맺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다.
임상 1상까지는 성공했으나 성공확률이 가장 낮다는 2상으로 넘어가면서 연구는 지지부진했다.
전 직원을 동원해 에이즈치료제 연구에만 쏟아부었기 때문에 수익은 거의 없었다.
영일제약의 직원들과 연구원들은 상여금까지 반납해가며 일에 몰두해주고 있었다.
“못난 회사를 만나 자네들이 고생하는군. 내가 할 말이 없네.”
탄식하는 부규를 보며 오히려 연구원들이 그를 위로했다.
“전 회장님이 어떤 마음으로 이 연구에 몰두하시는지 저희 모두 알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희는 이 연구가 에이즈 치료제의 한 획을 그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결의에 찬 직원들을 보며 마음이 흔들렸다.
올해, 부규의 나이가 70, 아들에게 대표 자리를 물려주었지만 아직까지 경영의 실세는 부규였다.
가족경영을 고집하던 부규였지만 이번만큼은 힘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에 진태에게 연락이 왔다.
“부규야. 네가 만나줬으면 하는 사람이 있다.”
부규가 진태와 처음 마주한 곳은 진태가 열었던 기업대표 모임이었다.
그곳에 참여한 기업대표들은 두 부류였다.
진태에게 아첨하거나 감히 말을 걸 생각도 하지 못했다.
부규는 그 자리에 신물이 나 밖으로 나와 담배를 물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신에게 관심 없다는 느낌을 풍기는 부규에게 흥미를 느낀 진태가 따라 나왔다.
둘은 그 자리에서 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고 서로가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 진태와는 가끔 낚시를 하거나 만나서 대화를 하는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그런 둘 사이에는 암묵적인 룰이 하나 있었다.
서로에게 부탁하지 않을 것.
진태는 돈과 권력으로 빚어진 관계가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부규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부규 또한 진태라는 사람, 자체에 반한 것이기 때문에 가볍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천하의 서진태였다.
그가 먼저 약속을 깨고 부탁을 했다.
“누군지 궁금해지는군. 한 번 만나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