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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7화 (17/249)

#17화

“에이즈는 80년대 초반 동성애자들에 대한 병으로 오해를 받으며 급속히 확산되어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에이즈가 처음 발견된 것은 1979년. 그러나 당시 보수주의를 표방하던 레이건 행정부는 이 병이 남성 동성애자 사이에 처음 나타났다는 이유로 1985년까지 공개석상에서 일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프로젝션TV에서 에이즈와 관련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연도는 프레디 머큐리가 사망한 지 3년이 채 되지 않은 해였다.

당시 프레디 머큐리의 사인이 에이즈였기에, 에이즈라는 병에 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뜨거워졌다.

셔츠의 단추를 마저 채우며 뉴스를 봤다.

“그러나 스타들의 잇따른 에이즈 감염과 사망이 이러한 분위기를 바꿔놓았습니다. 88년 올림픽 다이빙 다관왕 그렉 루가니스, 퀸의 리드싱어 프레디 머큐리, 특히 윔블던 우승 테니스 스타 아서 애시는 심장수술을 받았던 당시 수혈로 에이즈에 감염되어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큰 안타까움과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가까운 미래에 우리나라와 미국의 공동 연구를 통해 에이즈 치료제가 발명된다.

바로 한국의 영일제약.

미래에는 비타민 음료를 파는 제약회사로 더 유명해지지만 당시 영일제약의 에이즈 치료제 개발은 저명한 약학잡지에서 연이어 소개할 정도로 대단한 업적이었다.

온갖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정도로 에이즈 치료제의 개발은 대단했기 때문에 나 역시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영일제약에서 1999년에 미국 조지타운대학과 공동으로 에이즈 치료제에 대한 국제 특허를 출원한다.

영일제약의 에이즈 치료제는 한방생약에서 추출한 약물을 통해 기존 에이즈 치료제들과는 전혀 다른 작용기전을 가지고 있었다.

동물시험을 진행한 결과 다른 치료제들보다 효과가 뛰어났고 심지어 기존 치료제의 주된 문제로 삼던 독 성분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앞으로 몇 년 뒤면 에이즈 치료제가 특허출원을 하게 된다.

에이즈 치료제의 향후 전망을 생각하면 꽤나 투자하기 좋은 사업인데… 문제는 영일제약의 경영방식이다.

영일제약은 오너 중심으로 이루어진 폐쇄적인 경영방식을 취하고 있었기에 투자를 하고 싶어도 쉽지가 않았다.

연구 과정에 대한 보안이 중요하니 제약회사는 이런 경우가 많았고 애초에 투자자를 좋게 보지 않는다.

특히 영일제약은 완전한 가족경영이니 더욱 다른 회사의 투자나 개입에 회의적이었다.

넥타이를 마저 매며 고민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황비서가 다급하게 말했다.

“본부장님. 회장님께서 호출하셨다고 합니다. 본부장님 댁으로 바로 차 보냈습니다.”

바로 전화를 끝내고 집을 나섰다.

차는 이미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임기사가 차에서 나와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서둘러 가지.”

GB택배의 성공으로 진태가 부를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른 시기였다.

급한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차에 올라탔다.

고민을 하는 사이 진태의 저택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김집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강빈 도련님.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김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진태의 서재에 도착했다.

“회장님. 강빈 도련님입니다.”

“들여보내.”

한마디였지만 중후한 진태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문을 열자 안경을 쓰고 책을 읽고 있는 진태가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안경 너머로 진태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게 느껴졌다.

“그래. 용인 부지 빌려 가고 꽤나 많은 시간이 지났네. 그동안 잘 지낸 거 같더구나.”

진태의 반응을 보니 급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어떤 이유로 나를 불렀는지 아직은 모르니 일단 가볍게 감사 인사를 했다.

“네. 회장님께서 빌려주신 용인 부지 덕에 사업도 무사히 진행 중에 있습니다.”

“제법 겸손도 떠는구나. 아무리 봐도 내가 알던 손자 서강빈이 아니란 말이지.”

진태가 책을 덮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건지 그는 의자를 내 쪽으로 돌렸다.

“회장님께서 알던 서강빈은 죽었습니다. 앞으로 좋은 소식만 들려드리겠습니다.”

당찬 포부와 같은 말을 꺼내자, 진태의 얼굴에 약간의 미소가 보였다.

“그래. 네 말대로 예전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아. 네 사업이야기는 다 들었지만 그래도 직접 듣고 싶어서 불렀다.”

직접 듣고 싶다.

진태는 내가 내 사업에 대해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것 같았다.

여기서 내가 어떻게 말하는지에 따라 진태의 판단이 갈리는 것이 확실했다.

“오픈 첫날에 만 이천 건의 주문을 시작으로 매출이 꾸준히 오르고 있습니다. GB택배와 처음으로 협업했던 태선백화점 또한 매출이 연일 상승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그런 이야기 말고 달리 할 말은 없고?”

진태가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했다.

“매출 상승을 본 다른 전자회사, 백화점, 식료품 회사 등 많은 기업들에게 동업을 하자는 제안이 왔습니다. 다른 곳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제안하는 회사들도 있었지만 아직은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용인부지 의외에 별다른 지원을 받지 않고 있는 내가 다른 유리한 조건들도 거절했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 됐을 것이다.

진태는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GB택배의 수익성은 누가 봐도 뛰어납니다. 이제 저희 회사를 벤치마킹한 회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겠죠. 제가 다른 회사와 동업을 하고 그들의 제안을 받는 순간, 그들은 제가 만든 시스템을 알려 들 것입니다. 동업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요구를 마냥 거절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언젠가 그들은 지금 제 위치를 따라잡겠지만, 그때는 저도 지금의 위치보다 더 위에 있을 겁니다.”

지금도 GB택배를 벤치마킹한 회사들은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그런 회사들은 시스템이 엉망이었고 수익모델을 모르기 때문에 적자가 계속해서 누적되고 있었다.

진태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한 말을 지켰구나. 그럼 나도 약속을 지켜야지. 김집사.”

서재 밖에 서 있던 김집사가 들어왔다.

손에는 서류철이 들려있었다.

“용인 땅이다. 네가 오기 전에 이미 네 이름으로 명의이전 했다.”

김집사가 나에게 서류를 건네주었다.

진태의 말대로 용인 땅은 내 이름으로 돼 있었다.

역시 성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확실하게 보상하는 사람이 진태였다.

나는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일부러 말을 흐리자 진태가 나를 흘겼다.

“바라는 것이라도 더 있는 게야?”

“사실… 예. 있습니다.”

진태의 표정이 금세 차가워졌다.

“욕심이 많다! 용인 부지 하나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게냐? 이 이상은 못 준다.”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한 명, 만나고 싶습니다.”

진태가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 행동은 그가 무언가 고민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이런 진태의 반응을 원했기 때문에 나는 처음부터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

진태는 나를 지그시 응시한 채 침묵했다.

나도 구태여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의 침묵이 부정을 뜻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수 분이 지나고 진태가 말을 꺼냈다.

“네가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누구냐?”

“영일제약의 최부규 명예회장입니다.”

사실 부규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황비서의 조사에 따르면 부규는 대표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지금은 명예회장직을 하고 있지만 매일 출근하고 있었다.

그의 출근길이나 퇴근길에 대기하고 있을 수도 있고, 태선증권의 투자 명목으로 미팅을 잡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는 부규에게 투자할 수 없다.

내가 지금 진태에게 원하는 것은 그의 이름으로 부규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부규와 진태가 친밀한 사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중에 발간 될 진태의 자서전에는 부규와 경영 철학에 대해 나눈 대화도 적혀 있었던 것을 본 적이 있었으니까.

“별것도 아니구나. 고작 그런 일을 부탁이라고 하는 것이냐?”

“영일제약은 폐쇄적이고 외부의 투자를 받지 않는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회장님의 중개로 만남이 성사된다면 다른 이야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진태가 피식, 웃었다.

“똑똑하구나. 최회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 이미 약속도 지켰으니 해줄 이유는 없지만, 네 성과가 약속했던 것보다 내 기대를 충족했으니 이 정도는 들어주마. 부규한테는 미리 언질해둘 테니 연락은 네가 알아서 하거라.”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여 오래 인사했다.

진태는 내가 나가기도 전에 읽고 있던 신문을 다시 펼쳤다.

서재의 방문을 닫고 나오는데 문틈 사이로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진태의 모습이 보였다.

GB택배에서 내가 고집한 경영이 마음에 든 것일까?

아니면 절친한 부규의 이름을 내 입에서 들은 것에 흥미를 느꼈던 걸까?

부규와 연을 이어주는 것은 진태의 말처럼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일 것이다.

그러나 진태는 아주 사소한 일도 쉽게 베푸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그가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황비서가 우산을 든 채 진태의 저택 앞에 서 있었다.

“눈도 오는데 차에서 기다리고 있지.”

“이것도 제 일입니다.”

황비서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오는 것을 보고 임기사가 나와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내가 차에 타고 곧이어 황비서는 앞 좌석에 탔다.

“어디로 갈까요?”

“회사로 가지.”

차를 타고 가고 있는데 황비서가 말을 꺼냈다.

“아, 본부장님. 오늘 아침에 픽앤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급하게 회장님댁에 오다 보니 이제야 말씀드리네요.”

“픽앤픽에서?”

“네. 최희수 대표가 직접 연락이 왔습니다. 본부장님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희수가 먼저 연락이 온 것은 의외였다.

젊은 경영인의 밤에서 그와 접촉은 했지만 디지털사운드의 기술유출 건 때문에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나와야 했다.

조만간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쉽게 풀렸다.

“날짜는 잡았나?”

“아직입니다. 최희수 대표가 본부장님이 편한 시간에 연락 주시면 된다고 전했습니다.”

시간까지 나에게 선택권을 준 것을 보면 나에 대한 호의가 상당한 것 같다.

현아에게 사정을 다 들은 모양이었다.

픽앤픽에게 어떤 투자를 할지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희수의 연락이 반가웠다.

픽앤픽에서 곧 개발하게 될 4면 결착 플라스틱 밀폐용기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된다.

전생에서 사람들은 밀폐용기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대신 ‘픽앤픽’이라고 불렀다.

상처에 붙이는 밴드를 그냥 밴드라고 지칭하지 않고 ‘대일밴드’라고 하는 것처럼.

“금요일까지는 거래처 미팅이 잡혀있고… 토요일에도 일정이 잡혀 있었나?”

“토요일에는 조상민 대표님과 점심 약속이 있으십니다.”

“그럼 토요일 저녁으로 약속잡지.”

“네.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황비서는 수첩을 꺼내 내가 한 말을 메모했다.

내가 아는 미래의 픽엔픽은 꽤나 성공하는 주방용품 기업이된다.

하지만 이런 성공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 험난한 길을 걸었다.

픽엔픽의 제품은 제품성은 뛰어났지만, 픽엔픽 브랜드 자체의 사업성이 높지 못하여 저조한 매출을 보였다.

엄청난 개발이라며 호기롭게 한국시장에 진출했지만, 브랜드의 가치가 낮다 보니 매출은 계속해서 떨어지고 최희수는 큰 실패를 맛보게 된다.

이후 외국 시장으로 눈을 돌려 진출하기 위한 국제 전시회도 참여하지만 외국 바이어들은 픽엔픽 제품의 우수성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전시회에 나간 픽엔픽은 용기에 액체인 주스를 넣고 뚜껑을 닫은 뒤 바이어들 앞에서 용기를 굴리기 시작했다.

픽엔픽용기의 주스는 단 한방울도 세지 않았고, 처음에는 관심 없던 바이어들도 한 명씩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 한 외국의 홈쇼핑 업체와 연이 닿게 되었고 픽엔픽은 미국 시장에 진출하게 된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미국 시장에 진출한 뒤, 픽엔픽은 본격적으로 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매출량은 증가했고, 무려 연평균 성장률이 147프로까지 올랐다.

물론,지금의 픽엔픽은 아직 성공하기 전의 작은 회사일 뿐이다. 그리고 나에겐 이들이 성공하게 된 사건과 이유를 알고 있다. 나는 그들의 성공에 발을 올려 볼 생각이다.

그리고 이제 GB택배도 더 성장할 때가 왔다.

나는 GB택배를 한국에서 만족하지 않고 세계적인 회사로 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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