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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6화 (16/249)

#16화

“누, 누구세요?”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여자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싱긋 웃었다.

“태선증권 본부장 서강빈이라고 합니다.”

“태, 태선이요?”

여자는 당황한 채 손으로 입을 가렸다.

옆에 있던 다른 여자가 그녀를 툭툭 쳤다.

“서강빈이면 태선그룹 그 또라이잖아. 엮여서 좋을 거 없어. 그냥 가자.”

작게 말한다고 노력은 한 것 같지만 다 들렸다.

“다 들렸습니다. 말 그대로 엮여서 좋을 거 없을 것 같은데 그냥 가시겠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여자들은 허리까지 숙여가며 사과하더니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괴롭힘 당하던 여자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나는 걸치고 있던 자켓을 벗어 여자의 몸에 걸쳤다.

“가, 감사합니다…”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다시 침묵했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기다리겠지만 지금은 빨리 기술을 유출한 범인을 잡으러 가야 했기 때문에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괜찮으세요?”

“아… 네. 괜찮아요.”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여자가 말했다.

“아까 태선증권 본부장이시라고…”

“맞습니다. 저는 태선증권에서 본부장을 하고 있는 서강빈이라고 합니다.”

“아! 저는 최현아라고 합니다. 픽앤픽의 전무예요…”

최현아는 자신이 속한 픽앤픽이 부끄럽다는 듯 목소리를 줄였다.

픽앤픽.

밀폐력을 높이기 위해 뚜껑에 밀폐 날개를 단 새로운 형태의 용기를 고안해낸 곳이다.

이 용기가 출시를 시작하고 픽앤픽은 단 한 번도 업계 1위 자리를 놓친 적이 없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현아씨가 괜찮으시면 제 차를 타고 집에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현아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더 민폐를 끼칠 수는 없죠.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한테 연락 드렸어요. 아마 지금쯤이면 주차장에 와 계실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럼 주차장까지 같이 걸어요.”

주차장까지 함께 걸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현아는 내 얘기를 듣다가 종종 대답을 했다.

픽앤픽은 현재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곧 개발이 끝날 밀폐용기도 처음엔 고전을 면하지 못했다.

“홍보만 하면 될 것 같은데요. 투자자들은 없습니까?”

“네. 아무래도 이미 시장에 자리 잡은 기업들이 있어서… 저희 제품이 새롭지 않나 봐요.”

픽앤픽은 투자를 받지 못한 채 자력으로 일어서는 기업이다.

내가 그 성공을 조금 앞당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다가왔다.

“아빠!”

“현아야! 그런데 이분은 누구시니?”

현아의 아버지는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었지만 얼굴이 수척해 보였다.

“태선증권사의 본부장, 서강빈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자 현아의 아버지가 당황하며 손을 맞잡았다.

“태선증권이라면 그 태선의 계열사 아닙니까? 그런데 저희 딸과는 무슨 일로…?”

대충 둘러대려는데 현아가 말했다.

“제가 곤란한 상황에 있었는데 강빈 씨가 도와주셨어요.”

“무슨 상황인지는 나중에 들어야겠구나. 우선 감사드립니다. 저는 픽앤픽의 대표 최희수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희수와 나는 서로 명함을 교환했다.

나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오늘은 시간이 늦어 이만 가려고 합니다. 나중에 좋은 기회로 다시 뵙죠.”

“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도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희수가 인사를 하고 먼저 차에 탔다.

현아는 입고 있던 내 자켓을 꺼내어 내게 주며 말했다.

“강빈 씨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별거 아닙니다. 현아 씨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현아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차에 탔다.

그냥 놀러 나온 재벌집 도련님들만 가득할 줄 알았던 모임에서 뜻하지 않게 새로운 인맥을 만들 수 있었다.

“임기사. 최대한 빠르게 회사로 가 줘.”

“네. 알겠습니다!”

아슬하게 제한속도를 넘기지 않으며 태선증권사에 도착했다.

목을 조여왔던 넥타이를 풀며 복도를 빠르게 지나갔다.

집무실 문을 열자 황비서가 서둘러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황비서, 조사는 어떻게 됐어?”

“재벌들에게 MP3 기술을 팔겠다고 한 사람의 인상착의를 디지털사운드의 직원들과 대조했습니다. 그 결과 김정필이라는 사람이 유력한 것 같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디지털사운드에 방문해서 확인하겠습니다.”

“고생했어. 내일 일정은 일단 다 오후로 미루지.”

황비서는 몇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꽤 자세하게 조사를 해주었다.

이 정도면 흥신소에서 일을 해본 적이 있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사무실의 전화가 울렸다.

사무실의 전화기는 GB택배와 태선증권사의 전화로 총 2개였는데 그 중 GB택배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았다.

“네. GB택배입니다. 무슨 일로 연락 주셨습니까?”

“안녕하십니까. 저는 독자적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김정필이라고 합니다. 혹시 대표님 계세요?”

김정필? 방금 황비서가 말한 그 김정필?

“제가 대표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네! 제가 기술을 팔려고 하는데요. 휴대용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장치입니다. 이 기술은 태선그룹에서도 탐을 내는 기술로서 …”

이후에 이어지는 말들은 MP3에 대한 설명이었다.

이론이나 구체적인 용어 없이 죄다 추상적인 말들 뿐이어서 왜 아무도 이 거래에 응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나저나 태선 이야기를 꺼낸 것을 보면 내가 MP3에 투자하는 것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내가 태선증권사의 본부장인 걸 모르는 건가?

“...입니다! 대표님, 어떠십니까?”

“그것참 흥미롭군요. 김정필 연구원님 말대로라면 이제 테이프도 들고 다닐 필요 없는 것 아닙니까?”

“하하! 제가 불철주야 연구에 매달린 보람이 있었죠. 지금도 사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니까요?”

“그런데 왜 저한테까지 이렇게 연락을 주신 겁니까?”

김정필은 생각이라도 하는 듯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그… 아무튼 사려는 사람이 많으면 좋은 것 아닐까요? 하하!”

“그렇군요.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채가기 전에 제가 먼저 계약을 하고 싶은데 내일 계약 가능할까요?”

“내일이요? 당연히 가능하죠.”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정필은 만날 위치를 정하고 내일 뵙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이 밝자 황비서와 함께 정필이 있는 카페로 갔다.

정필이 고른 카페는 지하에 있었는데 벽지에는 곰팡이가 누렇게 피어있었다.

“저 사람입니다.”

얼굴을 아는 황비서가 손으로 가리켰다.

남루한 행색의 30대 남자가 한쪽 모서리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정필에게 다가갔다.

“김정필 연구원님?’

정필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GB택배 대표님이시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역시 한 기업의 수장이시다 보니 좋은 기술을 알아보시네요. 여기 제 기획안입니다.”

정필이 기획안을 덥석 내밀었다.

기획안을 살피자 조대표가 나에게 주었던 것보다 디테일이 조금 부족했지만 그것만으로 기술을 상용화시키는 데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서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고 정필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바로 계약하실까요?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5천만 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하.”

옆에서 황비서가 굳은 얼굴로 정필을 보고 있었다.

나는 정필에게 내 명함을 주었다.

첫 번째는 GB택배 대표 서강빈의 명함.

“명함 디자인이 잘 뽑혔는데요? 하하. 그런데 이름이 들어본 이름인데…”

두 번째는 태선증권 본부장 서강빈의 명함.

조잘대던 정필이 말을 멈추고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범죄를 저지를 거면 확실히 해야죠.”

나는 김정필 같은 인간을 정말 싫어한다.

남이 이룬 것을 자신의 한순간 욕심으로 빼앗으려는 인간들.

“김정필 연구원님은 이름만 올린 것 아닙니까? 자기가 만든 거 아니라고 이래도 되는 겁니까.”

고개를 떨군 정필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정필은 어떻게든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는지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그때, 조대표가 카페에 도착했다.

“본부장님의 연락을 받고 급히 왔는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황비서에게 간략하게나마 사정을 들었는지 그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조대표와 간단하게 눈인사를 하고 황비서가 뽑아온 그의 자료를 읽었다.

“김정필. 서정대학교 1학년 중퇴. 현재 나이 35세이고 디지털사운드에 재직 중. 빚도 상당하시고. 최근에 도박장을 꽤 많이 다니셨나 봐요?”

“그걸 다 어떻게…”

정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 그래도 아무에게도 팔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제 기획안을 안 받아줬어요. 앞으로 절대 안 그러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내가 조대표를 쳐다보자 조대표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정필 씨. 제가 능력도, 기술도 없는 정필 씨를 그동안 왜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예? 그건…”

“정필 씨의 선배 기훈 씨가 부탁했거든요. 비록 대학교는 중퇴했지만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기술은 일하다 보면 늘 거라고. 그런데 이게 뭡니까?”

정중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조대표의 표정은 이미 격앙되어 있었다.

내가 조대표를 대신해 말했다.

“정필 씨에겐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다시는 유출하지 않겠다는 계약서와 MP3에 대한 권리 주장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포, 포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번째는 뭡니까?”

“이미 제가 계약한 상황에서 정필 씨는 기술을 유출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불법도박장도 매일같이 가신 정황, 사진으로 다 갖고 있습니다.”

정필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고 나는 그런 그에게 싱긋 웃어주었다.

“즉, 법대로 하자, 입니다.”

“버, 법대로요?”

“네. 기술 유출에 얼마나 다들 민감한지 알고 계시죠? 게다가 정필 씨는 불법도박까지 했네요. 지금 정필씨 빚에 벌금까지 추가하면 감당 가능하겠습니까? 당장 교도소 들어가면 사채업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정필 씨를 기다리겠네요.”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점차 깨닫는지 그의 표정은 시시때때로 변하였다.

“그래서 정필 씨 선택은 뭡니까?”

“처, 첫 번째로 하겠습니다.”

정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필은 멍하니 계약서를 보다가 간신히 계약서를 작성했다.

조대표는 이 상황에 두통이 왔는지 이마를 짚으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정필이 계약서를 다 쓰고 나와 조대표가 같이 확인했다.

문제없이 계약서가 마무리되었다.

정필에게 어떤 법적인 제재는 가해지지 않겠지만 그는 다시는 MP3사업에 발붙이지 못할 것이다.

이 바닥의 소문은 금방이다.

기술유출은 기업들이 가장 민감해하는 단어 중 하나고.

정필은 고개를 들었지만 조대표의 눈은 마주치지 못하며 말했다.

“대표님… 도박에 미쳐서 빚더미가 쌓이고 생각난 게 이런 방법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보잘것없는 저를 받아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조대표는 여전히 차갑게 정필을 보고 있었다.

“앞으로 자네와 다신 볼 일 없을 거야. 지은 죄를 반성하면서 살게.”

정필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카페를 나갔다.

한참 말이 없던 조대표는 고개를 숙여 진심 어린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본부장님 아니었으면 디지털사운드는 이대로 주저앉을 뻔했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디지털사운드는 이제 저의 일이기도 합니다. 저희 모두를 위한 일이었으니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내 말에 조대표가 눈시울을 붉혔다.

“본부장님… 앞으로 MP3 사업 잘해봅시다.”

조대표와 나는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

쾅!

정필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주먹으로 벽을 쳤다.

들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게 걸렸다.

태선증권사의 본부장과 GB택배의 대표가 같은 사람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친구가 말한 ‘큰 판’이 있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돈을 구해야 한다. 돈을…’

얼마 전부터 돈을 빌렸던 사채업자들이 자신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때렸던 것을 생각하자 몸이 떨렸다.

‘시발. 천만 원만 있으면 되는데… 한 판이면 만회할 수 있다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정필은 결국 다시 불법도박장으로 갔다.

불법도박장 입구에는 정필을 이곳으로 이끈 친구와 같이 도박을 하던 사람들이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필은 아는 척을 하려다 말고 그들이 하는 대화를 들었다.

“어, 그 새끼 이번에도 돈 들고 온다고 했다니까. 키키. 진짜 대가리가 나빠도 그렇게 나쁠 수가 있냐?”

“아.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번엔 천만 원 들고 온다고 했다고?”

“응. 저번에 몇백 꼬라박더니 이제 눈에 뵈는 게 없는 거지.”

대화를 듣자 정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술을 팔고 돈을 챙겼더라도, 결국 도박으로 다시 돈을 잃고 기술까지 잃었을 것이다.

이후에 있을 막대한 배상까지 생각하면…

차라리 강빈에게 걸린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친구에 대한 배신감과 차라리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동시에 들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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