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김정필은 디지털사운드의 MP3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정필은 관련 분야의 대학교를 나오긴 했지만 1학년이 채 끝나기 전에 자퇴했었다.
그런 그가 연구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그의 선임이자 고등학교 선배 덕분이었다.
연구원이라고 해봤자 정필이 하는 일이라고는 농땡이 피우거나 가끔 선임이 요청한 자료를 찾는 것밖에 없었다.
눈치는 빨라서 남들이 볼 때는 일을 하는 척했고, 자신이 했던 일을 부풀려서 말하기도 했다.
능력도, 열정도 없는 정필이 디지털사운드에서 버티고 있는 이유는 바로 도박을 하기 위해서였다.
도박장을 처음 방문한 이유는 단순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친구가 재미있는 곳이 있다고 해서 따라간 곳은 지하에 위치한 불법도박장이었다.
‘한 판만 해보자.’
그런 마음으로 했던 슬롯머신에서 잭팟이 터졌다.
사람들이 환호하며 정필의 곁으로 모였다.
그러나 걸었던 금액이 적어 당첨금은 100만 원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짜릿한 기분에 몸을 떨고 있는데 친구가 정필의 등짝을 때렸다.
“좀 더 걸었어야지! 와, 누구는 하루종일 해도 안 걸리던데. 운 좋은 새끼.”
괜한 호승심이 생겼다.
정필이 잭팟으로 딴 100만 원이 사라지기까지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좀만 더 걸어볼걸.’
아쉬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갔지만 잭팟이 터지던 그 순간이 정필의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다음 날, 정필은 혼자 도박장을 찾아갔다.
이번엔 처음부터 슬롯머신에 걸 수 있는 최대 금액인 10만 원씩 걸었다.
‘한 번만 따면 회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떵떵거리면서 살아야지.’
그렇게 10만 원, 20만 원… 빠르게 돈이 사라졌다.
시계가 없는 도박장.
정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돈을 다 잃었을 때였다.
‘시발. 본전만 찾고 끝낸다.’
행운은 처음 잭팟이 터진 이후로 찾아오지 않았다.
바카라, 블랙잭, 섰다 등 판돈이 큰 다른 게임을 시작하자 잃는 돈의 앞자리가 바뀌기 시작했다.
결국 수중에 있던 돈을 다 잃고 빚을 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백만 원, 그다음은 천만 원.
빌렸던 돈을 잃자 더 큰 돈을 빌리기 시작했고 돈은 빌리자마자 도박으로 잃었다.
“야. 이번에 큰 거 하나 한 판 안 할래?:”
정필을 도박장에 이끈 친구가 말했다.
“큰 거? 뭐가 다른데?”
“기본 판돈만 천만 원이야. 잘 따면 5억도 벌어.”
“5억?”
5억이면 그동안 정필이 잃은 돈을 만회하고도 큰돈이었다.
하지만 정필은 수중에 이제 천만 원은커녕 백만 원도 남지 않았다.
“없냐? 없으면 말고. 이런 기회 별로 없는데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라.”
정필의 친구가 뒤돌아섰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정필이 그를 붙잡았다.
“야. 누가 없대? 돈 있으니까 그게 언젠지나 말해.”
“일주일 뒤. 장소는 그때 말해줄게.”
“알겠으니까. 그때 보자.”
친구는 인사를 하고 빠르게 사라졌다.
정필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전화기를 들었다.
***
“그렇게 입으시니까 이제야 대표님 같은데요?”
황비서가 감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거울 속에 비친 고급스러운 재단의 연미복을 입은 내가 비쳤다.
“아무리 바빠도 오늘 같은 날은 차려입어야지.”
그동안은 무난하고 깔끔한 정장만 입고 다녔다.
관리도 편하고 입기에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젊은 경영인의 밤’에 참석하는 날이다.
젊은 경영인의 밤은 공식적으로는 1년에 한 번씩, 그룹 총수들의 자제나 젊은 재벌 2세들이 모이는 날이었다.
그러나 애매한 기업 회장들의 자제나 재벌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도 뒷공작으로 참석하기 시작하면서 물이 흐려졌다고 불평하는 기존 멤버들이 많았다.
무리하게까지 이곳에 참석하는 이유는 전혀 뒷배가 없는 사람들도 운 좋게 재벌 중 하나와 인연이 트이기 시작하면 인생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 경영인의 밤은 주로 재계서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그룹의 자제들이 번갈아 가면서 주최했다.
“오늘 주최자가 창호형이라며? 어떻게 나올지 기대되는데.”
서창호.
태선물산의 사장이자 진태의 둘째 자식인 동만의 장남이다.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인물인지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황비서가 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황비서에게 남은 서류들을 맡기고 나갔다.
오늘의 주최지인 창호의 별장은 서울 외곽에 위치했다.
주변 숲과 잔디밭으로 넓게 트인 정경은 과연 재계서열 1위 자제의 별장다웠다.
한 층, 한 층이 일반 건물보다 훨씬 높았고 총 4층이었다.
정면은 모두 유리벽으로 되어 있었는데 1층에는 수영장과 고급스러운 느낌의 바가 보였다.
정문에서부터 고용인의 안내를 받고 들어갔다.
안에는 백 명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수영장은 꽤 넓었지만 수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다른 사람들은 한 손에 잔을 들고 돌아다니거나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재벌이 아닐 확률이 높아보였다.
고용인의 안내를 받으며 걸어가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여전히 망나니 서강빈으로 나를 쳐다보는 몇몇 사람들의 눈빛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러나 나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듯 눈을 마주칠 때마다 미소 짓는 사람들도 보였다.
아마 내가 한 투자로 벌었던 수익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테겠지.
그러나 사람들은 직접 말 걸 용기는 없었는지 다들 머뭇거리기만 할 뿐 다가오지는 않았다.
“본부장님. 이곳입니다.”
고용인이 정제된 손동작으로 안내했다.
“이게 누구야. 우리의 욕받이 강빈이 아니야?”
“망나니 새끼… 얼굴은 또 오랜만이네.”
앞에는 창호와 그의 동생 창훈이 있었다.
이미 술을 꽤 마셨는지 얼굴이 상기돼 있었다.
나를 욕받이라고 하는 것은 강빈이 망나니 시절, 집안의 욕이란 욕은 전부 독점했기 때문일 것이다.
“저 병신 새끼는 누굴 닮아서 저럴까 우리끼리 토론도 했었는데.”
“생각난다. 그때 우리가 결론 냈던 게 뭐였지?”
내 앞에서 대놓고 이런 태도라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정해졌다.
옆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내 눈치를 살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들도 태선가 사람이야? 나는 들은 게 없어서.”
술에 취한 창호가 딸꾹질을 하며 말했다.
“무슨 헛소리야? 하긴 내가 너처럼 사고 치지는 않지.”
“아니. 차라리 사고라도 치지. 소식을 들은 게 없어서 나한테 이런 친척이 있는 줄도 몰랐네.”
내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놈들.
재벌가의 뒤에 숨어 아직도 자신들이 어른인 줄 모르는 애새끼들과 어울릴 생각은 없다.
시비에 맞대응한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창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발. 뭔 개소리야! 이 망나니 새끼가. 평생 스포츠카나 몰면서 만족하고 살 것이지 어디서 주제넘게 대들어?”
나는 창훈의 옆으로 가서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받아먹기만 할 때, 나는 치열하게 내 몫, 내가 챙기고 있어. 그러니까 너나 잘 좀 해봐.”
“형한테 너? 이 새끼가!”
얼굴이 빨개진 창훈이 양주병을 들어 올리자 창호가 말렸다.
창훈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는지 창호는 이를 꽉 깨물고 있었다.
“창훈아. 형 쪽팔리게 하지말고 그만해라. 그리고 서강빈. 너 오늘 일 후회할 거다.”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몸을 돌렸다.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미래의 재벌 총수들을 만나고 싶어 왔던 자리였지만 내가 기대했던 인물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아직 여기에 올 정도로 크지 않았거나, 이런 자리에 관심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별장이나 한번 둘러보고 돌아가려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쳤다.
“야, 강빈아.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지냈냐?”
누구지?
이렇게까지 친근한 척을 하는 거 보면 강빈이 아는 사이.
아마 친구였을 것이다.
그리고 강빈의 친구라면 재벌 2세라도 개차반일 확률이 높다.
나는 일부러 무시하고 반대쪽으로 등을 돌려 걸어나갔다.
“야, 야! 왜 모르는 척 해. 머리 바뀌어서 못 알아보냐? 나 장수야.”
관심 없다고 하려고 뒤돌아보자 장수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활짝 웃으며 자신의 얘기를 했다.
며칠 전에 음주운전을 했는데 걸려서 사람을 바꿨다느니, 연예인 중 누구랑 연락하는데 잘 될 것 같다느니.
왜 강빈과 친구를 했는지 알 만한 소리를 해댔다.
“... 그나저나 너 뭔 사업해서 크게 성공했다던데? 아버지가 너랑 연락하래서 했었는데 전화는 왜 안 받냐. 나도 그 사업에 끼워주면 안 되냐?”
기왕 듣는 거 쓸만한 얘기라도 있을까 봐 듣고 있었는데 그럼 그렇지.
미래에 도움이 될만한 사람이 있을까 싶어 굳이 다른 일 제쳐두고 이곳까지 왔는데, 시간이 아까웠다.
앞으로 젊은 경영인의 밤에 참석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래. 생각해 보고 연락할게.”
그 말을 끝으로 하고 나가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낯익은 단어가 들렸다.
“너 MP3? 그게 뭔지 아냐?”
“MP3? 그게 뭔데?”
술에 취해 얼굴이 벌게진 남자가 큰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나는 자연스럽게 소리의 근처로 가 이야기에 집중했다.
“며칠 전에 누구한테 전화가 왔는데 나보고 기술을 사가라더라. 휴대용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하는 장치라면서 뭐라 뭐라 설명하는데 우리가 뭐 알아듣겠냐? 일은 아랫사람들이나 하는 거지. 그리고 그렇게 돈이 되면 지가 직접 팔 것이지, 나한테 그걸 왜 팔아? 욕하고 그냥 끊어버렸지. 다른 애들한테도 물어보니까 절반은 그런 연락받았다더라. 사기꾼 맞는 것 같은데 너도 혹시 그런 연락 받았냐?”
설마 조대표가?
아니다.
부족한 자본금에 열심히 투자 받을 곳을 찾아다녔던 조대표가 이제와서 내 뒤통수를 쳤을 리는 없을 것이다.
일단 남자의 얘기를 더 들어봐야 될 것 같다.
“나는 그런 연락 못 받았어. 그래서 그 사람이 한 말 더 있어?”
“아니. 그러고 끝이야. 무슨 이름도 모르는 회사에서 기술을 판다는데 우리가 자원봉사자인 줄 아나?”
나는 그 남자한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누구… 아!”
남자는 나를 알아봤는지 반색했다.
“강빈아. 이게 얼마 만이냐. 반갑다.”
“아, 그래. 반갑다. 그런데 혹시 그 사람 번호 알아?”
눈앞에 있는 남자도 강빈의 친구인 것 같다.
“그 사람 번호? 재벌도 아닐 텐데 휴대폰이 있긴 왜 있냐. 그것보다…”
“미안하다. 내가 지금 좀 바빠서 먼저 가 볼게.”
하긴, 몇 년 뒤엔 휴대폰이 대중화되지만 아직까지는 재벌의 전유물이었다.
그 뒤로도 남자가 나를 붙잡았지만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밖으로 나갔다.
며칠 전 조대표와 계약했을 때, 조대표가 이런 식으로 뒤통수칠 사람은 아니었다.
50억 원이라는 투자금을 받았는데 5천만 원이라는 푼돈에 연연할 이유는 없다.
조대표에게도 연락받은 적이 없으니 아직 기술이 유출됐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황비서가 있는 본부장실로 전화를 걸었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본부장님은 지금 부재중…”
“황비서. 급한 일이니까 잘 들어. 지금 디지털사운드의 기술이 유출됐어. 재벌들을 상대로 MP3의 기술을 팔겠다는 사람이 있을 거야. 얘기를 들어보니 보안에 신경 쓴 것 같지는 않아. 좀만 털면 나올 거야. 지금 바로 조사 시작해.”
“네. 알겠습니다!”
급하게 전화를 끊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임기사가 있는 주차장은 꽤 걸어가야 했다.
별장을 나와 빠르게 걸어가고 있는데, 윽박지르는 소리가 여러 차례 들렸다.
“출신도 없는 년이 왜 나대? 여기 온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아야지.”
‘출신 보니까 쥐뿔도 없더만 주제에 감사한 줄을 알아야지.’
전생에 들었던 말이 기억이 났다.
그놈의 출신은 이 나라에서 모든 것을 가로막는다.
구석에 몰려 있는 여자는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가 뭐라고 재벌들한테 꼬리를 쳐? 어딜 건방지게… 기껏해야 주방용품이나 파는 데가!”
주방용품?
주방용품점이라면 생각나는 이름이 있었다.
신개념 밀폐 용기를 개발해내 독보적으로 1위를 내달렸던 기업.
“저는 그런 적 없어요…”
“어디서 말대답이야. 그래서 니네 회사 이름이 뭐였지? 엄청 웃겼는데. 피잼피?”
여자를 둘러싼 무리가 깔깔대며 웃었다.
나는 그 사이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픽앤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