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고민은 길지 않았다.
수익 중에 200억 원을 택배사업에 재투자하기로 결심했다.
바로 윤성건설사사무소의 신소장과 연락했다.
전화로 현실적인 문제들을 계산하며 각 지역에 영업소를 더 확대 설치하고, 물류센터를 더 건설할 계획을 짰다.
“예. 하하. 본부장님이 믿어주시는 만큼 빠르게 일처리 하겠습니다.”
신소장과 전화를 끊고 에릭을 불렀다.
에릭은 크리스맨뱅크 주식을 팔고부터 시키지도 않았는데 GB택배에 출근해 일을 했다.
“어, 본부장님? 아니 이제 대표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하하.”
“편한대로 해. 이름 불러도 되고.”
“에이, 어떻게 이름만 불러요?”
전생에서 에릭은 나를 형이라 부르며 따랐었다.
이름을 부르기 어려워하는 에릭을 보며 조금은 씁쓸해졌다.
“크리스맨뱅크 수익이 371억인 거 알지? 네가 받기로 한 1프로, 3억 7천만 원 네 계좌에 넣었어. 나중에 확인해봐.”
에릭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크리스맨뱅크의 주식이 10배 가까이 오를 것을 알면서도 1프로의 수익을 에릭에게 주기로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에릭은 앞으로 나와 끝까지 함께 갈 사람이다.
물론 나는 에릭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만 에릭은 아직 나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런 에릭에게 내가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게다가 에릭과 내가 앞으로 벌어들일 돈은 수백억, 수천억을 넘어 감히 상상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의 돈이다.
에릭에게 지금부터 그 꿈을 그리게 해주고 싶었다.
“현실감이 없는데요. 하하… 이게 제가 받을 돈이 맞나요?”
“당연히 받을 만하지. 선수금도 안 받고 배팅했잖아. 정당한 네 몫이야.”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대표님!”
에릭이 허리까지 숙여가며 감사를 표했다.
“에릭. 오늘 저녁에 일 있어?”
“오늘 저녁이요? 없어요.”
“그럼 나랑 술 한잔하지.”
에릭이 반색하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도 에릭과 오랜만에 한잔할 생각에 일에 잘 집중이 되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가지.”
“대표님이 먼저 퇴근하자고 한 건 처음인데요? 하하. 저야 좋죠.”
퇴근을 하고 전생에 에릭과 갔던 삼겹살집으로 갔다.
“대표님이 이곳은 어떻게 아세요? 저 완전 단골인데. 여기 진짜 맛있어요.”
에릭도 오랜만에 오는지 들뜬 표정이었다.
“여기 엄청 맛집이잖아. 그리고 나도 여기 대학 출신이야.”
“네? 듣기로는 대학을 안 나오셨다고…”
맞다.
여기 대학을 다녔던 건 지난 삶의 강현재였지.
서강빈은 대학교를 안 다녔다.
준만이 돈을 퍼부어서 미국의 먼로대학교에 입학시켰지만 이 망나니 자식은 다시 한국으로 도망쳐왔으니까.
“에릭. 대학교가 중요한 게 아니야.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거지.”
“아, 네.”
삼겹살집에는 역시나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이모! 저 왔어요. 제 첫 상사님이랑 왔으니까 맛있는 부위 주셔야 돼요!”
“으이그! 알았어. 상사님도 인물이 훤칠하시네. 자리는 남는 데 아무 데나 앉아.”
삼겹살집 이모도 오랜만이었다.
아는 척을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오랜만에 정겨운 얼굴을 보니 즐거웠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소주는 뭐로?”
“늘 먹던 거요! 아니지, 대표님. 뭐로 드실래요?”
“네가 늘 먹던 거.”
에릭과 나는 참이슬만 마셨다.
역시나 이모가 삼겹살 3인분과 진로소주를 들고 왔다.
“고기는 제가…”
“내가 굽지.”
전생에서 에릭은 고기를 정말 못 구웠다.
에릭이 구운 고기는 불 조절에 완벽하게 실패해서 한쪽 면은 탔는데 반대쪽 면은 덜 익었다.
때문에 처음을 제외하고는 늘 내가 고기를 구웠었다.
대표인 내가 고기를 구우니까 에릭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것도 잠시, 내가 주는 고기를 먹으며 박수를 쳤다.
“본부장님, 고기 진짜 잘 구우시는데요?”
조잘대는 에릭을 보니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지금이 호황기라고 안주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경제성장률이 9프로다, 경제우등생 한국! 이런 소리 할 때가 아니란 말이야…”
실제로 외환위기가 터지기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한국경제가 위기가 아니라는 입장이 많았다.
IMF나 세계은행에서도 그렇게 말하니 많은 사람들이 안도했을 것이다.
소주 4병을 비우기 시작할 때 에릭은 거나하게 취했다.
나도 이쯤 되면 만취해서 에릭과 함께 노래를 불렀을 텐데 서강빈의 몸은 취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경제위기를 중얼거리며 잠들 것 같은 에릭을 보자 변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지금의 내가 강현재는 아니지만…’
쓰러지려는 에릭을 업고 가게를 나왔다.
***
“회사로 가지.”
“예. 대표님.”
황비서는 해야 될 일이 늘어 운전기사를 따로 채용했다.
전생에서 운전기사에게 배신당했기 때문에 경력이 확실하고 면접과 조사를 철두철미하게 진행해 확실한 사람을 뽑았다.
물류센터 부지는 방금 신소장과 미팅을 통해 정했다.
그에 반해 영업소가 고민이었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기점으로 영업소를 지어야 할지 계산이 필요했다.
“에휴.”
신호를 기다리기 위해 차가 잠시 멈춰 섰는데 임기사가 한숨을 내뱉었다.
임기사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상가 앞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 사이로 쇼윈도가 언뜻 비치다가도 다시 사람들 사이로 가려졌다.
“임기사. 저 사람들은 왜 줄 서 있지?”
임기사가 창밖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잘 알죠.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그룹이 낸 신곡 테이프랑 CD를 사려고 줄 선 겁니다. 제 딸내미도 저거 사야 된다고, 돈 좀 달라고 어찌나 성화던지… 몇 날 며칠을 시달리다 결국 제가 두 손 두 발 들었지 뭡니까. 아마 저기 어딘가에 제 딸도 있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이때쯤이면 한창 서태지와 아이들 신드롬으로 떠들썩할 때다.
90년대 초반 대한민국 가요계에 혁명을 불러일으킨 팀.
한국에선 거의 비틀즈나 마이클 잭슨 못지 않은 인기를 가졌었다.
‘MP3는 아직인가?’
카세트 테이프를 넣어서 듣는 워크맨이나 CD를 넣어 듣는 CD롬이 아닌, 무형의 디지털 음원을 무한으로 재생할 수 있는 MP3는 큰 파장을 불러왔었다.
“임기사. 혹시 MP3라고 들어본 적 있나?”
“MP…뭐라구요? 저는 처음 듣습니다.”
MP3라…
우리나라의 한 벤처기업 ‘디지털사운드’와 중견기업인 ‘한샘미디어’가 최초의 MP3인 ‘엠피맨’을 출시했었다.
그 당시 특허권 공동 소유의 조건을 달았던, 파격적이었던 경영 때문에 생각이 났다.
게다가 MP3는 해외가 아닌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기기이기 때문에 당시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MP3에 대한 생각을 하다 어느덧 회사에 도착했다.
본부장실에 들어가자 황비서가 열심히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다시 일하게 됐네. 미안해.”
황비서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본부장님이 훨씬 바쁜 걸 아는데요, 뭘. 제가 이거라도 해야 마음이 놓여서 그래요.”
“아니 그게 아니라 황비서가 해줘야 할 일이 생겼어. 검토는 내가 하지.”
황비서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네! 무슨 일을 하면 될까요?”
“알아볼 회사가 생겼어. 회사명은 디지털사운드고 위치는 인천이야.”
“네. 금방 알아보겠습니다.”
곧장 알아본다며 나갔던 황비서가 돌아온 것은 6시간 뒤였다.
인천까지 왕복하는 시간도 생각하면 황비서도 일이 꽤 능숙해졌다 싶었다.
“디지털사운드는 조상민 대표가 최근에 설립한 작은 벤처기업 회사입니다. 조상민 대표는 다훈기술에서 재직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퇴사 후 디지털 사운드를 창업했습니다. 조상민 대표는 MP3라는 무형의 디지털 음원을 무한으로 재생할 수 있는 기계를 개발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본금이 부족하고 마땅한 투자처가 없어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개발은 최종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상품화 단계로 넘어가진 못하고 있습니다.”
황비서가 상세하게 적힌 자료를 나에게 주었다.
이론적인 것에 대해서는 차치하더라도 개발 과정이나 결과로 봤을 때 MP3는 이미 완성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다행히 아직까지 디지털사운드에 투자한 기업은 없는 것 같았다.
좋은 기회다.
“황비서. 오늘 늦은 시간이라도 좋으니까 최대한 빠르게 디지털사운드의 대표와 미팅 잡아.”
내 목소리에서 급박함을 느꼈는지 황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방을 나갔다.
급했던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나 보다.
연락을 받은 조대표는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나를 찾아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디지털사운드 대표 조상민입니다.”
조대표는 그동안 고생이 많았는지 얼굴이 꽤 수척했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태선증권사의 본부장 서강빈입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가볍게 악수했다.
조대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에게 투자하고 싶다고 말하신 것이 사실입니까?”
“네. 사실입니다. 디지털사운드의 기술이 가치가 크다고 생각하거든요.”
조대표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시작했다.
“저희 회사는 작은 벤처기업입니다. 개발은 이미 완성되었지만 우리의 기술력을 믿어주는 곳이 없더군요. 물론 저는 상품화만 되면 성공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본부장님도 저희의 가능성을 보고 투자를 하시는 겁니까?”
수척한 조대표의 얼굴에서 눈은 빛나고 있었다.
“저는 디지털사운드가 개발중인 MP3에 대해서 상당히 관심이 많습니다. 그 원천 기술이 앞으로 미디어의 기초가 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개발 과정도 살펴보았는데 충분히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MP3이 음원 사업으로 확장될 수만 있다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것 아니겠습니까?”
감격했는지 조대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현재 저희 회사는 투자를 받는 것이 급박한 상황입니다. 본부장님께서 투자를 해주신다면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지금 개발 단계는 끝나가는 것 같은데, 출시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조대표는 낯빛이 조금 어두워진 채로 말했다.
“상품화 진행은 거의 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기기를 만들기 위한 공장설비와 자금이 필요합니다.”
디지털사운드는 과거 한샘미디어에게 투자를 받고 공동특허를 냈었다.
다행히 나를 찾아온 것을 보면 아직은 한샘미디어와 조우하지 못한 상태인 것 같다.
초기 MP3는 한샘미디어의 잘못된 가격 측정으로 인해 대중의 소비심을 자극하지 못했고 마케팅까지 실패하게 되면서 시장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지금 기술을 잘 살리고 경영을 잘하면 디지털사운드는 전생보다 더 성장할 수 있다.
“필요한 공장설비와 상품화하는 데 쓸 금액이 합쳐서 어느 정도 됩니까?
“50억 원… 정도입니다.”
금액이 크다 보니 조대표의 자신감이 조금 떨어진 것 같았다.
그러나 MP3이 앞으로 가져올 영업이익을 생각하면 50억 원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단호하면서도 여유롭게 말했다.
“50억 원, 제가 전부 다 투자하겠습니다. 그 외에 추가로 필요한 비용도 청구하시면 검토하고 지원해드리죠. 대신 30퍼센트의 지분을 원합니다.”
조대표는 투자하겠다는 말에 화색이 돌았다가 30퍼센트의 지분이라는 말에 살짝 당황한 듯 보였다.
“지분의 30퍼센트요? 물론 50억 원이면 그 정도의 지분도 납득은 갑니다만… 태선증권사가 저희 회사의 경영권에 손을 대겠다는 말입니까?”
30퍼센트면 굉장히 큰 지분이긴하다.
경영권을 흔들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조대표도 저렇게 당황하는 것이니까.
“아니요. 투자는 태선증권사가 아니라 제가 개인적으로 합니다.”
“개.. 개인이요? 개인이 그런 돈이…”
“있습니다. 계약서 작성만 끝내면 돈은 바로 디지털사운드의 법인 계좌로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계약서에 제가 경영권에 손대지 않음을 명시하겠습니다. 추가로 제가 지분을 팔 때, 상시 주가로 조대표님이 우선적으로 매입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조대표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정도 조건이라면, 계약하겠습니다.”
2000년대 초, 최소 2천억 이상의 매출을 가지고 올 MP3.
그러나 생각보다 쉽게 끝난 투자가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