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태선가의 둘째 딸인 남순은 받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시도해서 성과를 냈다.
가장 매출이 높은 지점은 부산의 샹스백화점이지만, 모든 지점의 매출을 합하면 태선백화점이 압도적으로 업계 1위였다.
태선백화점은 태선그룹에서 분리되며 이름이 바뀌긴 하지만 십 년은 더 뒤의 일이었다.
남순은 존마트라는 대형할인점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존마트는 전생에 전형적인 대형할인점들의 표본이 되는 곳이었다.
지금이야 주력이 태선백화점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존마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며 매출을 크게 올린다.
태선백화점의 본사는 명동에 있다.
미리 연락을 했기 때문에 남순의 수행비서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수행비서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나도 간단히 묵례했다.
“사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하겠습니다.”
수행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간 곳은 최상층의 남순의 방이었다.
노크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방에 들어가자 금테 안경을 쓴 남순이 무엇인가 열심히 적고 있었다.
“고모, 저 왔습니다.”
남순은 대답 없이 눈앞의 일에 집중했고 나는 가만히 서서 그것을 지켜보았다.
시간이 지나고 남순이 안경을 벗었다.
표정이 밝았다.
“전에는 앞뒤 없이 달려들더니. 기다릴 줄도 알고 변한 게 정말이었구나. 앉거라.”
“감사합니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남순은 호의적이었다.
다른 남매들과 달리 남순은 태어나자마자 옥희가 죽고 젖먹이 때부터 순례가 키웠다.
준만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걸까?
자리에 앉자 사라졌던 수행비서가 다반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남순은 정갈하게 차를 우리고 내 잔에 따라주었다.
“보성에서도 최상급의 우전녹차야. 마셔 봐.”
과연, 내가 먹었던 어떤 차보다 깊고 은은한 맛이 났다.
“향이 정말 좋네요.”
남순이 빙긋 웃었다.
차를 마시며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했다.
어릴 때 준만과 남순이 붙어다녔다거나 강빈이 어렸을 때 데리고 놀러 갔던 남미의 어떤 섬 이야기를 했다.
나는 따분한 감정을 감춘 채 조용히 남순의 말을 경청했다.
준만의 남매들은 모두 준만을 멸시할 줄 알았는데, 남순을 보니 그건 아니었다.
남순이 빙긋 웃더니 말했다.
“그래서 용건이 뭐니? 네가 아무리 달라졌다지만 고모 얼굴 보러 온 건 아닐 테고.”
드디어 내가 원하는 말이 나왔다.
“제가 이번에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혹시 택배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남순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택배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태선백화점이 저희 서비스를 이용하길 원합니다.”
남순은 흥미가 생긴다는 듯이 고개를 내밀었다.
“네가 택배 사업이란 것 자체를 시작한다는 이야기는 준만이한테 들었어. 근데 백화점에서 어떻게 그 서비스를 이용한다는 거니?”
“고모처럼 수행비서나 사람을 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못 느끼겠지만, 일반 소비자가 많은 물건을 구매하거나 큰 물건을 구매했을 때 난감한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고모에게 제안하려는 것은 백화점의 물건들을 직접 들고 나를 필요 없이 택배로 배달해주는 거죠.”
남순이 재밌는 아이디어라는 듯 웃으며 물었다.
“내 생각을 해준 거니? 좋은 아이디어 같긴 하구나.”
남순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나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같은 태선가 사람끼리 서로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순은 나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준만이가 그렇게 무서워하던 아버지 앞에서 네 칭찬을 한 이유가 있었구나. 그래. 네가 뭘 하려는지는 이제 알겠다. 내게 바라는 것은 뭐니?”
고개를 저었다.
GB택배는 아직 시작 단계다.
“제가 바라는 건 고모가 저희 택배를 이용해주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그럼 내가 얻는 이득은?”
“백화점에 택배 서비스를 도입하면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집니다. 일정 금액만 내면 자신이 산 물건이 집앞에 도착하죠. 다른 백화점에서는 할 수 없는 이런 편리한 서비스를 태선백화점이 독점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완전히 납득은 되지 않았는지 남순은 여전히 의문스러운 표정이었다.
“다른 근거는 더 없어?”
나는 확실하다는 듯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매출은 반드시 오를 겁니다. 그리고 굳이 차를 들고 올 필요가 없어지니, 주차난도 해소가 될 거고요.”
남순이 고개를 끄덕이곤 옅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확신에 차서 말하니 한 번은 속아 줘야겠네.”
태선백화점의 매출은 전 지점을 합치면 지금도 1조 원을 넘긴다.
그런 곳의 운송을 따냈다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결과였다.
“시작은 어떻게 할 거야?”
“우선 고객들한테 이런 서비스가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사람은 익숙한 것에 손이 가니까 처음에는 쉽게 다가가야 됩니다. 한 달 동안은 대가를 받지 않고 일정 금액 이상 구매한 고객한테는 무료로 배달해주세요. 홍보효과에 비해 큰 지출도 아닐 뿐더러 고객은 서비스에 감동할 겁니다. 그렇게 입소문을 타고 이용하려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서비스를 확장해야죠.”
여유로운 내 말에 정말로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정말 바뀌었구나. 재밌어. 그래도 사업은 빚지고 사는 사람이 아니야. 주고받는 건 명확해야 해. 심지어 귀여운 조카가 어엿하게 커서 사업 한 번 해보겠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겠니? 앞으로 1년. 태선백화점의 전 지점에서 네 택배를 광고판에 띄워주마. 대신 너도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해.”
“당연하죠. 그럼…”
“계약서 말하는 거니? 당연히 써야지.”
곧장 수행비서가 들어와 계약서를 수기로 작성했다.
나는 계약서를 쭉 훑었다.
계약서의 내용은 1년간 태선백화점의 전 지점에서 GB택배를 홍보해주겠다는 것, 그리고 GB택배는 1년간 다른 백화점과는 협업하지 않으며 오직 태선백화점과 독점계약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미리 준비해온 도장을 찍었고 남순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잘 큰 걸 보니까 기분이 좋네. 그래도 일은 일이야. 계약 이행 충실하게 해야 한다?”
남순이 내 손을 잡았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결과를 만들어 오겠습니다.”
남순이 눈이 접히게 웃었다.
***
정순은 태선가의 넷째이자 준만에게는 큰누나였다.
준만은 정순에 대해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정순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면 얼굴빛이 안 좋아지곤 했다.
정순이 운영하는 태선호텔은 주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곳으로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곳이었다.
5성급 호텔치고도 비싼 가격이지만, 그 값을 한다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송파 석촌호수 앞에 위치해서 객실이 있는 3층만 가도 도시의 정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호텔 안에는 헬스장이나 비즈니스 클럽은 물론 건물 한 층이 전부 수영장인 곳도 있었다.
태선백화점 때와는 달리 마중 나와 있는 사람이 없었다.
정순의 집무실에 도착해서 노크를 했다.
기 싸움이라도 하려는지 한참을 기다려도 답이 오지 않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가만히 서 있었다.
오 분 정도 지났을까?
안에 있던 비서실장이 문을 열었다.
비서실장이 빙긋, 웃었다.
“이상한 소리가 나서 열어보았는데 도련님이셨군요.”
노크 소리를 듣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일부러 나를 엿 먹이려고 한 것이다.
비서실장이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 이런 일을 했을 리는 없고, 뒤에 앉아있는 정순이 주도한 거겠지.
기분이 상하진 않았지만 그 유치한 장단에 조금은 어울려주기로 했다.
“그 이상한 소리가 들린 지 오 분은 지났을 텐데요.”
“그게 무슨…”
비서실장을 스치고 지나가며 말했다.
“나도 태선가의 일원이야. 이런 태도는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나?”
비서실장의 얼굴이 굳었다.
정순에게 가볍게 묵례했다.
“오랜만입니다.”
정순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정순의 앞에는 서류 더미가 쌓여 있었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었는지 서류 몇 장은 구겨진 채 바닥에 있었다.
최근 태선호텔의 매출이 줄어들고 있었다.
5성급 호텔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독식해오던 시장이 무너졌다.
전생에서도 태선호텔은 이름에 비해 뛰어나지는 않았던 호텔로 기억한다.
지금도 이미 호텔 로스한테 1위 자리를 빼앗긴 상태였다.
정순이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말했다.
“여긴 왜 왔니? 바빠 죽겠는데.”
멸시 가득한 목소리였다.
‘네까짓 게 뭔데 일을 벌이냐는 거겠지.’
남순이 의외였던 것이지,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제가 이번에 사업을 하나 시작했습니다. 고모님께 제안을 드릴 일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대답도 없이 계속 서류를 쳐다보던 정순은 집중이 안 됐는지 일어났다.
“제안? 내가 너랑 그럴 사이니?”
“일단 앉아서 얘기하죠.”
저런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상대에게는 주눅이 든 모습을 보이는 오히려 좋지 않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소파로 가서 앉았다.
정순은 그런 나를 어이없다는 듯 보다가 결국 소파에 앉았다.
정순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고모님과 함께 사업을 해보고 싶습니다.”
정순이 코웃음치며 대답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어림도 없다. 네 망나니 모습들이 아직도 내 눈에 선한데 무슨 염치니?”
여전히 나를 무시하는 태도에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게다가 기존의 목적은 태선백화점과 태선호텔, 두 곳 중 한 곳과 협업하는 것이었다.
태선백화점이 이미 수락했기 때문에 동요할 필요가 없었다.
“먼저 듣고 결정하시죠. 제가 하고 있는 것은 택배라고 합니다. 일종의 운송 사업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네가 나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리고 택배? 나는 들어보지도 못한 걸 네까짓 게 뭘 안다고.”
정순의 얼굴에는 조소가 가득했지만 여유가 없어 보였다.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태선호텔에 묵는 사람들은 보통 외국인이잖아요? 장기숙박하는 사람들은 짐이 많은데 그 짐을 직접 가지고 오는 데 많이 불편할 겁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 불편함이 배가 될 거구요.”
“그래서? 네가 하려는 게 공항에서 호텔까지 짐을 옮겨주자, 이 말이냐?”
“네. 맞습니다.”
정순이 정색하며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 서비스는 이미 하고 있다. 그딴 걸 겨우 사업 아이템이라고 가져온 거냐?”
나는 살짝 웃으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이미 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단 VIP들에게만요. 호텔에 숙박하는 사람 대부분이 일반인들 아닌가요?”
정순은 이제 경멸하듯 나를 쏘아봤다.
“네가 뭘 알겠어! 일반인이 고객의 대부분인 건 맞는 말이다. 그런데 소비하는 걸 따지면 과연 어느 쪽이 많을까? 일반인이 일 년에 걸쳐 쓸 돈을 vip는 하루면 다 써. 일반인과 vip를 똑같이 대우하면 둘의 차별점이 뭐지? 일차원적인 네 생각을 보니 아직 멀었구나.”
얘기를 듣고도 정순은 가능성을 보지 못했다.
나는 더 대화할 가치가 없음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순에게 묵례를 하고 나가고 있는데 정순의 말에 멈춰 섰다.
“그 애비에 그 새끼네. 쯧.”
내 욕을 하는 것도 화가 났지만 준만을 욕하는 것은 가만둘 수 없었다.
준만은 강빈의 아버지로 태선가 안에 내 입지를 다지는 데 있어 중요한 인물이다.
더 이상 무시 받는 막내가 되면 안 된다.
이럴 때 확실하게 말해둬야 한다.
몸을 돌려 말했다.
“후회하게 될 겁니다. 태선호텔이 치고 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알 것 같네요. 그렇게 계속 제자리걸음 하십시오.”
“이 건방진 새끼가! 니가…”
탁!
방을 나와 문을 닫았다.
문을 닫기 전까지 정순이 소리를 치고 있었는데, 문을 닫자 정순이 소리치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호텔이라 그런가 방음 하나는 최고네.”
아까 노크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이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정순은 내가 언젠가 태선을 놓고 겨룰 경쟁자였다.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데 굳이 굽히면서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한 달 뒤에 과연 누가 웃을지 한번 지켜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