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김집사의 전화를 받은 재만은 영 탐탁지 않았다.
“강빈이가 회장님과 독대를 했습니다.”
독대.
이 말을 들은 순간부터 머리가 아파 왔다.
장남인 재만조차 진태와 단둘이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들어갈 일이 생기더라도 용건만 간단히 하고 자리를 파하던 진태가 강빈과 함께 두 시간이나 서재에 있었다니?
거기다 용인 땅을 강빈에게 주었다.
진태는 작은 것을 줄 때도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계산하며 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재만이 태선전자의 공장을 세우기 위해 눈여겨봤던 용인 땅을 강빈에게 내준 것이다.
눈앞에 있는 유일한 자식, 범준은 멀뚱히 서 있었다.
“서회장님이 강빈이와 독대했다고 한다. 알고 있었냐.”
“몰랐습니다.”
범준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범준을 보자 재만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재만은 하나뿐인 자식을 늘 최고로 키우고 싶었다.
최고로 좋은 것만 먹였고, 최고의 선생만을 붙였다.
사람을 붙여 유학을 보냈으며 어떤 분야를 가르치든 그 분야 최고의 사람을 붙였다.
그러나 범준은 비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범준은 무언가를 배우면 곧잘 하고, 금방 적응해냈지만 최고가 되지는 못했다.
사실 재만도 알고 있었다.
범준은 늘 노력했다는 것을.
그러나 노력해도 안 되는 그 평범함이 태선가에선 독(毒)이었다.
그리고 진태는 한 번도 손주와 독대한 적이 없다.
그 처음을 강빈과 한 것이다.
제 새끼가 아닌, 어머니가 다른 배다른 형제의 막내에게.
“쓸모없는 녀석.”
“죄송합니다…”
“내가 못 해준 게 대체 뭐가 있어!”
재만이 단지 첫째라는 이유로 후계에 가장 가깝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계열사를 물려받은 것은 맞으나, 그것을 키운 것은 재만의 몫이 컸다.
경쟁기업은 우후죽순 생겨났고, 재만은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태선전자를 키운 공로를 인정받아, 자식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두 번째 계열사까지 맡게 되었다.
재만이 치열하게 살아온 것을 옆에서 봐온 임원들도 실력으로 재만을 인정했다.
그런 재만에게 범준은 그저 한심할 뿐이었다.
“아버지. 강빈이는 제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이전의 강빈이가 어땠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망나니로 쌓아온 버릇이 어디 가겠어요? 그래 봤자 배다른 작은아버지의 막내아들에 불과합니다. 다음번에는 장손인 제가 꼭 회장님과 독대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강빈이가 네 상대가 아닌 것은 당연한 거다. 교육의 질도, 살아온 길도 다른데 어떻게 네 상대가 되겠어?”
재만의 말에 부담감을 느꼈는지 범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신은 없어 보였다.
“아들아. 너는 포식자로 태어났다. 서회장은 오직 결과만 보는 사람이야. 네가 머리가 안 좋으면 머리 좋은 놈을 데려다 쓰면 된다. 네겐 돈도 있고 권력도 있어. 강빈이 같은 놈을 네 발아래 두면 그놈의 공적도 네 것이 되는 거다. 이것을 잊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범준의 손바닥은 손톱에 짓눌려 하얗게 질려 있었다.
***
처음으로 온 가족이 모였다.
준만은 회사에서 가끔 봤지만, 다른 가족들은 아직 낯설었다.
워낙 바쁘게 지낸 터라 가끔 스치듯이 얼굴을 본 것 말고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준만은 신문을 읽고 있었고, 강빈의 어머니, 이영혜는 부담스러운 눈길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강빈의 유일한 형제, 서영빈은 책을 보다가 가끔씩 나를 흘겼다.
내가 그토록 바라오던 평온한 가족이었다.
“가족들끼리 다 같이 밥 먹는 거 오랜만이네. 강빈이가 성인이 되고는 처음인가?”
“네. 저 양아치까지 합치면 꽤 오래됐죠.”
영혜의 말에 영빈이 차갑게 대답했다.
“영빈아. 너무 그러지 마. 누구나 그럴 때가 있는 거야.”
영빈을 부드럽게 타이르는 영혜는 온화한 어머니의 표상 같았다.
그보다 강빈이 성인이 되고 저녁 식사가 처음이라니…
“앞으로 가끔은 이렇게 같이 식사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머, 강빈이가 웬일이니. 그럼 엄마야 좋지. 요즘은 어떻게 지내니?”
그 뒤로도 자질구레한 대화가 이어졌다.
거래처를 만났다고 생각하면서 대화하니 불편하긴 하지만 어렵진 않았다.
“흠흠, 이제 식사하지. 음식 다 식겠다.”
“그래요. 아주머니, 주방에서 굴비 가져다주세요!”
집안일을 해주시는 아주머니가 먹음직스러운 굴비를 내왔다.
“강빈이 굴비 좋아하잖아. 영광에서 가져온 거니까 맛은 보장된 거 알지?”
저런 어머니 밑에서 어떻게 서강빈 같은 자식이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영혜는 그렇게 말하며 굴비의 살점을 발라 내 밥 위에 올려놓았다.
전생의 나는 생선을 못 먹었다.
대학에 합격하고 나에게 주는 선물로 갈치를 사 온 적이 있었다.
좁은 자취방에 비린내를 가득 풍기며 갈치를 구워 먹었다.
그러다 잔가시가 목에 걸렸고, 한참을 컥컥거리다가 겨우 뱉어냈다.
그 뒤로 가장 좋아하던 생선은 힘들었던 시절을 상기시키는 음식이 되었다.
가시가 잘 발린 굴비의 살점은 쫄깃하고 맛있었다.
영혜는 잔가시 하나 없이 가장 통통한 살을 발라 밥 위에 올려주었다.
“강빈이가 잘 먹는 거 보니까 엄마도 기분이 좋네.”
엄마.
들은 지 수십 년은 더 된 그 말을 듣자 기분이 이상했다.
밥을 먹는 나를 영혜는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밥을 다 먹자 준만이 말을 꺼냈다.
“회장님과 독대했다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안 그래도 언제 얘기를 꺼내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준만은 내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얘기를 참고 있었나 보다.
“택배 사업을 시작하고 싶다고 회장님께 말했습니다.”
“택배 사업?”
준만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되물었다.
“일종의 물품배달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회장님께서는 뭐라고 하더냐.”
영빈도 관심이 생긴 듯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 사업계획안을 보시고 용인 부지를 임대해 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업을 성공시키면 용인 부지를 제 명의로 돌려주시겠다 하셨습니다.”
“용인 땅을? 용인은 큰 형님이 노리던 곳인데… 아니다. 잘했다. 강빈아. 고생이 많았겠구나.”
준만의 얼굴에 잠깐 불안이 스쳤다가 곧 웃으면서 내 등을 두드렸다.
그 외에도 회사 얘기를 시작하자 준만은 지칠 줄을 몰랐다.
잠시 빈틈이 있던 찰나 영빈이 말했다.
“오랜만에 하는 식사 자리인데 천천히 하세요. 아버지.”
“아, 내가 말이 좀 많았구나. 하하.”
“그래요. 여보. 우리 다른 얘기도 좀 해요.”
영빈이 내가 피곤해하는 것을 보고 말을 돌린 것 같았다.
전생의 나와 같은 나이인 준만과 대화하는 것이 꽤 재밌었는데…
영빈에게 애써 웃어 보였다.
“네가 그래도 조금은 달라진 것 같네. 부모님께 안 하던 존댓말도 하고. 앞으로 내가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
마냥 어린앤 줄 알았는데 영빈도 강빈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예의 바른 동생처럼 말했다.
“고마워 형. 그리고 형의 그림을 보면 이유는 설명 못 하겠지만 울리는 게 있더라.”
영빈은 피식, 웃었다.
지금은 세간에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영빈은 나중에 유명한 화가가 된다.
돈이 넘치도록 많은 집안이어서일까, 그는 다양한 유학 경험과 배움을 토대로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냈다.
예술계 쪽 인맥은 앞으로 영빈을 통하면 문제없을 것이다.
“나중에 더 멋진 작품 그리면 보여줄게.”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형.”
***
날이 추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몸을 움츠리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코트를 옷걸이에 걸고 있는데 이미 출근한 황비서가 서류를 한가득 들고 들어왔다.
“본부장님 지시대로 지주회사 3곳에 투자했던 돈을 회수했습니다.”
“수익금은?”
“각각 10억씩 투자했던 목화제당, 동한기업, 수성보험의 수익금은 목화제당이 14억, 동한기업이 24억, 수성보험이 23억으로 총 61억 원으로 원금까지 합해서 91억 원입니다.”
판교와 크리스맨뱅크에 투자한 금액까지 빼고 이제 수중에 있는 돈은 127억 원이었다.
목화제당의 기대수익은 아직 많이 남았지만 택배사업을 위해 아쉬움을 뒤로하기로 했다.
“건축업체는 알아봤어?”
“네. 후보로 세 곳이 있습니다. 태선물산과 번영건설, 현암건설입니다. 상세 자료는 책상 위에 올려두겠습니다.
역시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태선물산이었다.
조건은 나쁘지 않았지만 태선물산은 둘째인 동만이 사장인 곳이다.
태선물산과 같이 일을 하다 보면 사업에 대한 정보도 많이 유출될 수도 있다
그리고 곧 성공할 택배 사업의 지분을 그들과 나눌 필요는 없다.
다음은 번영건설. 태선물산이 1위라면 다음은 이곳이었다.
번영건설의 전신인 번영토건사로 따지면 태선물산보다 역사가 깊은 곳이기도 했다.
실력은 말할 것이 없겠지만 예산이 아슬아슬했다.
마지막으로 현암건설은 상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건설사였다.
가격대비 좋은 퀄리티로 인정받고 있었다.
전생에는 건축업체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성장하는 회사였다.
번영건설과 현암건설 중 무엇을 골라야 할지 고민되었다.
“황비서는 번영건설과 현암건설 중 어디가 나은 것 같아?”
“저는 현암건설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현암건설이 시공한 것들을 살펴봤는데 모두 흠잡을 것 없고 시공주들의 만족도가 높았습니다. 그리고 번영건설은…”
황비서는 말끝을 흐렸다.
아마 번영건설이 태선물산의 경쟁업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눈치 볼 것 없어. 태선물산은 나와 관계없는 곳이야. 객관적으로 볼 때는 어디가 나은 것 같아?”
“그렇다 하더라도 현암건설 쪽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현암건설로 정하지. ”
사실상, 태선만 아니라면 각각의 강점을 갖고 있는 회사들이었기 때문에 상관은 없었다.
“네. 바로 연락하도록 하겠습니다.”
황비서가 현암건설과 연락하는 동안 나는 어떤 로고를 쓸지 구상했다.
태선이 아니고 나를 상징할 수 있는 로고가 무엇이 있을까.
골똘히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을 지을 때는 간단하고 나를 떠올릴 수 있는 그런 로고.
잠시 후 책상 위에 생각난 로고를 썼다.
‘GB택배’
막상 써보니 생각했던 것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마침 황비서가 현암건설과의 통화를 끝냈다.
“본부장님, 의뢰했던 택배차도 완성됐다고 합니다.”
택배차에 대한 의뢰는 간단했다.
‘한 번의 작동으로 자동개폐가 되고, 최소 1500kg의 화물을 자동으로 상하차할 수 있을 것.’
조금은 추상적인 의뢰 내용이었지만 잘 처리해준 모양이었다.
로고와 택배차에 대한 것도 끝났으니 남은 것은 직원 채용이었다.
이미 공고는 올렸고 면접 일정도 잡혀 있었다.
일단 모든 준비는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지만 홍보가 고민됐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택배라는 단어 자체를 모를 때다.
무턱대고 TV나 신문에 홍보를 해봤자 택배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택배의 편리함을 알리기 위해선 직접 이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태선그룹 안에는 백화점과 호텔도 있다.
그리고 그 둘은 지분을 주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홍보할 수 있는 곳이다.
태선가의 남매들 간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단순히 정에 호소하는 것으로는 그들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다.
도움을 요청하는 형식보다는 고모들에게 사업을 제안한다는 느낌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태선호텔과 태선백화점은 돈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오는 곳이다.
백화점에서 산 물건을 집으로 배달해주고, 호텔은 공항에서 호텔까지 짐을 옮겨주면 괜찮을 것 같다.
이제 내 첫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수화기를 들었다.
“고모, 저 강빈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