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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0화 (10/249)

#10화

차창을 내리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운전대를 잡은 황비서가 말했다.

“회장님과의 독대는 잘 끝나셨습니까.”

“응. 원했던 결과는 얻어냈어.”

내가 원했던 것은 두 가지.

물류센터를 지을 용인부지와 진태의 인정이었다.

용인부지를 원했다던 재만이 걸리기는 했지만, 아직 신경 쓸 단계는 아니었다.

진태의 인정을 받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확실히 그가 이번 독대를 통해 나에게 관심을 갖게 될 것은 분명했다.

“그보다 황비서. 전에 말했던 지주회사 건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먼저 매수했던 동한기업과 수성보험은 우상향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말씀하신 지주회사에 대한 인식이 넓어지고 있는 게 가장 큰 이유 같습니다. 그리고 목화제당은 12%가 떨어진 뒤 바로 10억 원으로 매수했습니다.”

“일단 계속 지켜봐.”

이제 오르기 시작한 주식들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진태와의 독대 후에 받게 된 용인 땅은 용인시 안에서도 서울과 가까웠다.

용인시라고 써진 팻말을 지나고 얼마 안 되지 않아 차가 멈췄다.

“이곳입니다.”

눈앞에는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캄 노우보다도 훨씬 크군.”

언젠가 한 번 가 보았던 FC바르셀로나의 구장보다도 넓었다.

지금은 허허벌판이지만 이제 곧 이곳에 내 물류센터가 지어질 것이다.

“서강빈 본부장님 되십니까?”

근처에 있던 트럭에서 피부가 그을린 남자 한 명이 터벅터벅 다가왔다.

“네. 맞습니다. 황비서?”

“네. 이쪽은 윤성건축사사무소 신일상소장님이십니다.”

“반갑습니다.”

굳은살이 박인 신소장과 손을 마주 잡았다.

“필요한 행정 업무들은 여기 황비서가 도와줄 겁니다. 그리고 법률적 처리는 저한테 직접 연락 주세요.”

우리는 각자의 명함을 주고받았다.

“태선증권이면 태선 쪽 분들 아니십니까? 왜 태선물산에 연락하시지 않고…”

신소장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건 태선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제가 독자적으로 하는 사업이라서요.”

신소장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소장의 말처럼 태선물산과 협력해서 지으면 돈적인 부분이나 그 외 다른 부분에서도 편하긴 할 것이다.

그러나 태선물산에서는 분명 자금을 청구할 것이다.

태선가에 빚을 지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건축설계도는 제가 준 자료를 바탕으로 짜주시면 됩니다.”

“네. 미국에 유학을 갔다온 직원이 있는데, 그때 봤던 것과 몹시 흡사하다고 하더군요.”

“미국에 있는 물류센터를 참고해서 그럴 겁니다.”

현대식으로 된 물류센터가 한국에는 거의 없었다.

미국에 파견 나가 있던 직원을 통해 사진과 설계도를 받았다.

“시공사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건축설계도 나오면 견적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신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일 끝나는 대로 연락드리도록 하죠.”

“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간단하게 계약서를 작성하고 차에 올랐다.

아까 설계도를 보면서 성공투자증권의 대표로 있을 때 알고 지냈던 미국의 CEO들이 생각났다.

그들 중 일부는 IT 붐 안에서 크게 성공을 하며 시작했던 사람들이었다.

‘시간만 된다면 그들을 만나 투자를 제안하고 싶은데…’

택배 사업까지 시작하게 되면 남는 시간이 없다.

내가 해외로 나가 있는 동안 국내의 일들을 처리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잠깐, 에릭 장이라면?’

한국대학교를 같이 나온 전생의 내 후배.

에릭 장은 어머니 쪽이 한국인인 미국 교포였다.

실제로 그는 한국의 IMF를 예측했던 사람으로 그것으로 막대한 손실을 막고 오히려 수익을 본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뛰어난 실력으로 미국에 빠르게 진출했던 그는 결국 미국 2위 펀드사인 뱅가드의 대표가 되었던 에릭 장.

그리고 태선패션과 합병에 반대하는 나를 지지해주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곧바로 한국대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

한국대학교 앞에 오래된 삼겹살집이 보였다.

그곳은 내가 성공투자증권사의 대표의 자리에 올랐던 날, 에릭이 미국에서 날아와 나를 축하해준 곳이었다.

에릭과 둘이 술잔을 맞부딪치며 회포를 풀었었다.

그때, 에릭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형이 소신 지키면서 할 말 다 하고 아닌 건 거절하는 거. 나는 멋있게 생각해. 그런데 형도 이제 대표잖아. 윗선에서 까란다고 다 깔 필요는 없는데 까는 시늉은 하라고.’

그때 에릭의 말을 들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한국대학교의 정경은 여전했다.

나중에 개관될 건물들이 위치한 곳에는 잔디밭과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내 옆을 스치는 몇몇 사람들은 누구였는지 생각이 날 것도 같았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였기 때문에 풍경들이 더 익숙하게 느껴졌다.

추억에 젖어 캠퍼스를 거닐었다.

늘 걸어갔던 길을 따라 경제학부 건물이 보였다.

건물 입구에는 왼쪽 벽면에 올해 입학한 신입생들의 단체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옆에는 재학생들의 단체 사진들도 줄지어 걸려 있었다.

걸려 있는 액자 중에는 90학번의 단체 사진도 있었다.

단체 사진에 나도 있을까 싶어 액자를 살펴보았다.

종연이, 희진이, 세희… 이제는 가물가물한 동기들의 모습들이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강현재’의 얼굴은 찾을 수 없었다.

대신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강현재는 이제 없다.’

이전 생을 살았던 나에 대해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서강빈의 몸에 들어왔다는 것을 받아들였을 때, 이미 강현재는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보다 소신을 지켰지만, 힘이 없어 죽은 강현재는 없다고.

미련 따위는 없다.

액자 옆에 비치된 거울에 무표정한 내 모습이 비쳤다.

생각을 쉽게 정리하고는 에릭과 함께 공부했던 과 동아리실에 들어갔다.

가장 안쪽의 캐비닛에 에릭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거 제 캐비닛인데요? 무슨 일이세요.”

갑자기 들려온 말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최근의 기억과 다르게 눈앞에 있는 사람은 주름도, 검은 머리 사이 티가 나던 흰 머리도 없었다.

그러나 분명 에릭 장이었다.

“에릭 씨.”

에릭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누구세요?”

나는 반가운 마음을 감추고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는 태선증권사의 본부장인 서강빈이라고 합니다.”

나는 품에서 명함을 꺼내 에릭에게 주었다.

에릭은 명함을 받은 채로 나를 멀거니 바라봤다.

“에릭씨가 쓴 논문을 봤습니다. 흥미로운 점들이 많더군요.”

에릭이 IMF 외환위기를 관측하기 시작했던 것도 이때였다.

이 당시 에릭은 기업들의 부채비율로 인해 다가올 위기를 논문에 썼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에릭의 말을 듣지 않았고 근거 없는 소리라고 비난했다.

그 당시에 나 혼자 에릭의 편에 섰던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에릭은 나도 비웃는다고 생각했는지 볼멘소리로 말했다.

“어디서 보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실현 가능성이 없다던데요.”

나는 빙긋 웃어 보였다.

“저도 한국에 금융위기가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지금 경제 호황기에 배가 부른 사람들이지요.”

에릭은 흥미가 조금 생겼다는 듯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한국은 무분별한 과잉투자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모두 감당할 수 있겠다고 믿고 있겠죠. 그리고 향후 몇 년은 풍선처럼 부풀려질 겁니다. 그러다 팡!”

손짓과 함께 과장되게 말하자 에릭이 웃었다.

이십대 초반의 에릭은 아이처럼 순수했다.

후에 금융위기를 풍선으로 비유했던 것도 에릭이었다.

표정이 풀린 에릭이 내 말에 이어서 말했다.

“그렇게 실체가 드러나면 금융권 쪽에서는 그제서야 발을 빼겠죠. 그 순간이 바로 금융위기예요. 놀랍네요.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처음 봐요.”

에릭이 먼저 손을 내밀었고 나도 그 손을 잡았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고, 나는 씨익 웃었다.

“아까 제가 태선증권사의 본부장이라고 소개했죠? 에릭 씨와 함께 일해보고 싶습니다. 에릭 씨 생각은 어떠신가요?”

에릭은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떨궜다.

“저는 아직 회사에 들어갈 생각이 없어요. 공부할 것도 많고 무엇보다…”

“개인투자를 원하시죠.”

“네? 그걸 어떻게 아시죠?”

에릭의 눈썹이 올라갔다.

에릭은 능력이 뛰어났던 만큼, 늘 개인투자자가 되고 싶어 했었다.

뱅가드의 대표에 올랐을 때조차 미련이 조금 남는다고 내게 말했었다.

나는 에릭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랬거든요. 어딘가에 종속되지 않고 투자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에릭 씨를 찾아온 겁니다.”

“그럼 제가 일할 곳은 태선증권사가 아닌가요?”

“네. 아닙니다. 저는 에릭 씨를 태선증권이 아닌 개인 투자 전문가로 영입하려고 합니다.”

에릭은 개인 투자라는 말에 관심을 보였지만 이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나는 그가 얼마나 개인 투자자로서 성공하고 싶어 했는지 알고 있다.

에릭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을 것이다.

“조건은 에릭 씨가 원하는 대로 최대한 맞춰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생각은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연락은 아까 그 명함으로 하면 될까요?”

나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은 뛰어난 전문가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내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나의 제안에 관심이 깊을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

에릭에게 전화가 온 것은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나는 사무실에 앉아 대략적으로 메모해두었던 미국 증시상황을 떠올리고 있었다.

“본부장님. 에릭 장이라는 분이 전화로 찾으십니다.”

“연결해.”

기쁜 마음에 서둘러 수신전환 키를 눌러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 에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강빈 본부장님 맞으세요?”

“네. 맞습니다. 에릭씨. 같이 일할 마음이 생긴 겁니까?”

“아직 부족하지만 해보고 싶어요.”

에릭의 목소리에 강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그동안 에릭은 자신의 말이 허황됐다고 비웃음당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다가올 금융위기는 한국 경제를 뒤흔들 것이다.

결국 그의 말이 옳았고,

이후 에릭은 늘 당당하고 자신감이 차 있던 사람이 되었다.

“에릭씨. 당신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 증거로 저는 지금 바로 당신에게 일을 맡기겠습니다. 지금 제가 부르는 계좌와 비밀번호를 메모하세요.”

대답이 없는 수화기 너머로 나는 천천히 계좌번호를 불렀다.

“다 적으셨나요?”

“...네. 다 적었어요.”

“그 계좌에 40억 원이 있을 겁니다.”

“네? 40억 원이요?”

놀란 에릭의 목소리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눈에 선했다.

40억 원을 달러로 환전하면 350만 달러이다.

기업 수준의 투자를 방금 에릭에게 맡긴 것이다.

에릭이 놀라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에릭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큰 투자금을…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에릭 씨가 그만한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맡기는 겁니다. 그 돈을 달러로 환전해서 전부 ‘크리스맨뱅크’에 투자하세요.”

크리스맨뱅크는 중년의 남성들을 대상으로 크게 히트친 미국의 대형 의류점이다.

에릭은 투자 얘기를 시작하자 긴장이 풀렸는지 평소 톤으로 돌아왔다.

“크리스맨뱅크라면 재작년에 상장된 미국의 의류점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것보다는 닷컴주를 가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닷컴주가 과대평가됐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저는 아직도 잠재적 가치가 더 많다고 느끼거든요.”

닷컴주가 과소평가되었다는 에릭의 말은 반만 맞았다.

1995년은 미국이 인터넷 시장의 발달로 첨단주들이 폭등하는 시기이다.

이때 미국 증시에서 닷컴주의 주주들은 수십 배의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모든 것이 거품이었다는 것이 알려지며 닷컴주들은 위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어떤 닷컴주도 크리스맨뱅크의 주가상승율은 따라잡지 못했다.

나 또한 닷컴주도 투자를 할 생각이었지만 크리스맨뱅크가 먼저였다.

크리스맨뱅크는 공격적으로 미국 전역에 가맹점들을 확장했고, 그로 인한 수익을 온라인매장에 고스란히 투자했다.

그리고 이 투자방식은 성공적이었다.

크리스맨뱅크는 3년간 무려 120배가 상승했다.

마음만 같아선 더 투자하고 싶었지만 일반 주주가 매수할 수 있는 크리스맨뱅크의 주식은 40억 원이 최대일 것이다.

“에릭씨 말이 맞습니다. 닷컴주는 지금보다 더 뛸 겁니다. 하지만 그 평가와 수익은 수많은 닷컴주들이 나눠 갖게 될 겁니다. 뛰어봤자 열 배 정도 될 겁니다. 물론 닷컴주에도 투자를 해야죠. 하지만 지금은 좀 더 욕심을 부려도 됩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에릭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뛰어봤자 열 배라니… 본부장님은 대체 어디까지 보고 계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너무 큰 욕심 아닐까요?”

에릭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윗선에서 시키는 일을 마다하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거부할 때는 확실했다.

게다가 에릭의 입장에서 나는 오늘 처음 본 사람이기도 하고, 너무 말도 안 되는 수익을 불렀으니까.

또 에릭이 투자를 시작하면 누구보다 불타오르는 것을 알기에, 어떻게 하면 에릭을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때, 에릭이 말을 꺼냈다.

“투자는 모두 본부장님께서 부담하시는 건가요?”

에릭답지 않게 수비적인 말이라 의아했다.

“네. 맞습니다. 얼마씩 매수를 하는지는 에릭씨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올해 안에 40억 원 모두 투자해야 됩니다. 더 투자할 수 있으면 요청하시면 됩니다. 에릭 씨에게는 보수로 선수금 5천만 원과 제가 특정한 시기에 매도했을 때 수익금에 상관없이 5천만 원을 드리겠습니다.”

그저 내 말을 따라 투자하고 회수하면 1억을 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고민도 하지 않고 받아들이거나,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에릭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이내 말했다.

“선수금과 매도 비용은 안 받을게요. 대신 보수로 원금을 제외한 수익금의 1프로를 원해요.”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제야 승부사, 에릭 장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기억하던 뱅가드의 에릭은 남들은 하지 못할 과감한 투자들을 연이어 성공시켜 뱅가드를 톱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

수익금의 1프로로 1억 원을 받으려면 100억 원의 수익을 봐야 한다.

그리고 에릭은 그 이상을 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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