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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9화 (9/249)

#9화

진태의 집은 전생에서 뉴스를 통해 봤었다.

보통 사람이 평생을 일해도 방 한 칸 구입하지 못한다는 한남동의 대저택.

실제로 마주한 진태의 집은 저택보다는 박물관에 가까울 정도로 컸다.

‘전생이었다면 들어가 볼 일도 없었겠지.’

정문 앞에는 김집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제대로 뵙는 건 거의 처음이군요. 강빈 도련님.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김집사는 안으로 나를 안내했다.

2층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서재는 도서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높이가 3미터는 넘을 것 같은 줄지은 책장 안에는 온갖 책들이 빼곡히 차 있었고, 소음이 적은 공기청정기와 천장에 달린 환풍기가 공기를 순환시키고 있었다.

관리가 잘 되어 있는지 책장 구석에도 먼지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가장 안쪽에 진태가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20대처럼 쾌활하지만 예의는 지키는 것처럼 보이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강빈입니다.”

진태는 미동도 없이 책의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나는 가만히 진태 앞에 서 있었고 진태는 계속해서 책을 읽어나갔다.

처음에는 긴장되었지만, 진태의 의도를 알 것 같다고 느낀 순간부터는 편안했다.

그렇게 1시간이 흘렀을까.

진태가 책을 덮었다.

“들은 것과는 달리 참을성도 있구나.”

중후한 목소리에서 그가 살아온 세월이 조금은 느껴졌다.

이 노인네는 성품이라도 보려는 듯, 1시간을 일부러 딜레이시킨 것이었다.

“한때는 참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성공투자증권에 입사하고부터 참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표에 오르기까지 부당한 일들을 겪으면서도 참아냈다. 그러나.

‘내가 잘못 대답한 것일까?’

진태의 표정은 싸늘했다.

“너도 태선가의 사람이다. 태선인이라면 원하는 걸 다 손에 넣었을 텐데, 참는 것이 일상? 네 놈이 무엇을 참았지?”

“제가 능력이 있어도 나서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위에는 까마득한 형들이 있으니까요.”

“허, 네놈이 원래 잘났는데 다른 놈들에게 튈까 봐 숨기고 있었다?”

황비서에게 진태에 대해 조사하라고 하긴 했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은 별로 없었다.

결국 전생에 그가 쓴 자서전에서 봤던 기억을 되새겨야 했다.

선물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도, 진태가 혈육에게는 선물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공격적인 말과는 다르게 그의 표정은 평온해졌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감정에 매우 솔직한 사람이었다.

‘기자들 앞에서도 삿대질을 하며 욕을 했었으니까.’

그러니까 진태는 지금 나에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야망을 꺼내 자신에게 비추기를 원하고 있다.

“들으신 것이 맞습니다. 저에게, 저희 집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다른 고명한 집안들이 그렇듯 백부가 모든 것을 물려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말이냐?”

“아뇨. 지금도 생각은 같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참을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태선의 핏줄이니까.”

‘태선의 핏줄’이라는 말에 진태가 크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강렬한 눈빛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그는 저 눈빛으로 수없이 많은 사업을 따내고 진행해 왔을 것이다.

진태가 조소 섞인 어투로 말했다.

“너도 다른 아이들처럼 내가 가진 것들을 노리는 모양이구나. 판교 땅은 왜 산 것이냐?”

“지금도 강남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습니다. 강남에서 멀지 않고 신도시가 될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이 판교라고 생각했습니다.”

진태는 내 속내를 들춰보기라도 할 것처럼 쳐다봤다.

“단순히 그런 이유로 말이냐?”

“아버지가 회장님께 제 얘기를 했다고 하더군요. 제 성공이 우연 같으십니까?”.

긴장한 것을 감추기 위해 쉬지 않고 대답했다.

자서전에서 진태는 자신 앞에서 당당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운이었느냐?”

“어떤 승리에도 우연은 없습니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선수라도 노력이 없다면 승리할 수 없는 것처럼요.”

몇 년 뒤 자신이 이 말을 한다는 것을 알까.

내가 했던 말은 진태의 좌우명과도 같은 말이었다.

내 말을 들은 진태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였다.

정적이 흐른 뒤에 고개를 든 그는 더 이상 손주를 바라보는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서진태는 타고난 사업가다. 그런 그가 나를 거래 상대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바라던 순간이기도 했다.

“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게냐.”

“사업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내가 꾸린 회사의 성장은 곧 나의 힘으로 직결된다.

남들에게 하는 투자는 돈을 벌어다 주지만 그것만으로 태선가의 인정을 받을 수는 없다.

결국 내가 상대하게 될 사람들은 이미 태선의 계열사 사장들이다.

그들과 같은 위치에 서서 맞서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내 사업을 해야만 한다.

“무슨 사업을 말하는 거냐. 태선에는 이미 수많은 계열사가 있다.”

“택배 사업입니다.”

“택배?”

1993년도의 한국은 아직 ‘택배’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

“택배는 일종의 물건 배달입니다. 우편물이나 이삿짐을 옮기기도 하고 매장에 있는 상품들을 매장에 가지 않더라도 그 매장의 상품들을 집까지 배달하는 거죠.”

진태는 흥미롭다는 듯이 턱을 쓸었다.

“가능성은 어떻게 보느냐.”

“일본의 운송사업을 벤치마킹하려고 합니다. 컴퓨터가 대중화되기 시작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터넷을 쓰게 되면, 직접 매장을 찾는 사람들은 줄어들 겁니다. 전화 한 통, 클릭 몇 번으로 물건을 살 수 있는데 뭐하러 발로 뛰겠습니까?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그 일이 머지않은 미래에 현실이 될 겁니다. 이제 곧 화물업은 호황기를 맞을 겁니다. 그에 발맞춰 앞서 나아가야 합니다.”

미국에서도 이제야 인터넷 쇼핑몰을 열기 시작했고, 한국에서 인터넷 쇼핑몰이 열릴 때까지는 아직 2년이 남았다.

아무리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뛰어난 진태라도 이 일에 확신을 갖기는 힘들 것이다.

손에 들고 있던 택배사업 계획안을 진태에게 내밀었다.

서류에는 택배의 구체적인 자료와 실현방안이 적혀 있었다.

진태는 생각에 잠긴 듯 손에 턱을 괴었다.

그러더니 눈앞에 놓인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진태는 천천히 서류를 다 읽고 덮었다.

“네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너의 생각은 저 멀리에 있구나. 뜬구름 잡는 것일 가능성도 높겠지. 그런데, 욕심이 많아. 네 욕심이 너의 계획을 보증하긴 한다만..”

“이 정도 일에 기죽어선 태선가의 일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 있습니다.”

진태는 원하는 말이라도 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엇을 해주길 원하지?”

“물류센터를 지을 부지가 필요합니다. 용인에 태선가의 이름으로 빈 땅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을 저에게 빌려주십시오.”

용인에 땅이 있는 것은 황비서에게 들었다.

태선이 보유하고 있는 부지는 성남, 안산 등 많았지만 그중 용인 부지가 수도권과 가장 가까웠다.

진태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뭘 믿고 너에게 땅을 빌려줄 것 같으냐?”

쉽게는 안 넘어갈 줄 알았다.

재계 1위 그룹의 총수인 진태에게 용인 부지는 별거 아니지만,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작은 것 하나까지 계산하는 사람이 바로 진태였다.

“사업계획안을 보셨으면 실현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아셨을 텐데요. 그리고 회장님께서 손해 보는 것은 없습니다. 어차피 놀고 있는 땅 아닙니까?”

“그 땅은 재만이도 눈여겨보던 땅이다. 얼마 전에도 공장을 짓겠다며 나에게 땅을 달라 했었지. 고작 네가 재만이보다 더 나은 사업을 할 수 있다는 말이냐?”

용인 부지는 물류센터는 물론, 공장을 짓기에도 좋은 땅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재만까지 눈여겨볼 줄은 몰랐다.

현재 태선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가 바로 서재만이다.

여기서 내가 용인 부지를 차지한다면 진태, 다음으로 힘이 센 재만의 견제가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굽힐 수는 없었다.

“큰아버지의 공장은 이미 수익의 한계가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제 사업은 한계가 없습니다. 한국 시장에 아직 없는 사업이 성공한다면 얼마나 큰 이익을 부르는지 회장님께서 모르실 리 없지 않습니까?”

진태는 사업에 대해서 철저하게 따지지만 배포가 작은 사람은 아니었다.

투자 대비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사업은 망설임 없이 과감하게 진행하는 것 또한 진태의 면모였다.

유심히 내 얼굴을 보던 진태가 피식 웃었다.

“네 말대로 할만한 사업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네 눈은 확신에 가득 차 있구나. 이미 허락받을 것까지 예상하고 온 게냐?”

그 말을 하는 진태의 표정은 즐거워 보였다.

“허락받을 것을 예상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회장님이 사업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뛰어난 사업가가 이런 기회를 마다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당돌한 내 말에 진태는 더욱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네 말대로 내가 사업가라면, 너를 더 이상 손주가 아니라 투자처라고 생각하겠다. 이력 하나 없는 투자처에 조건을 안 걸 수야 없지. 나는 용인 땅을 걸겠다. 너는 무엇을 걸겠느냐.”

호탕하게 말하는 진태를 보며 역시 태선그룹을 일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꼭 성공할 겁니다. 그리고 태선의 이름도 빌리지 않겠습니다. 만약 실패한다면… 땅 임대료의 5배를 지불하겠습니다.”

“하하하. 그놈 참 마음에 드는구나. 용인 땅에 관련된 것은 이실장을 통해 받도록 해라.”

서재를 울리는 웃음소리와 달리 진태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진태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

강빈은 긴장한 기색 하나 없이 서재를 나갔다.

채규가 서재로 들어왔다.

“어떠셨습니까?”

강빈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채규는 진태와 강빈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다.

진태는 만족스럽다든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했던 것 이상이야. 마음에 들어.”

“서재만 사장도 회장님 앞에서는 주눅이 드는데, 강빈 군은 그런 기색 하나 없더군요.”

진태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르는 일이야. 하지만 주눅 들지 않았든, 그런 척을 한 것이든 녀석이 쓸 만하다는 건 사실이지.”

진태는 좀처럼 칭찬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평생을 진태의 옆을 보좌해 온 채규조차 이런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다.

진태가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강빈이가 놓고 간 사업계획안이야. 자네도 한 번 보게.”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흥미를 보였던 게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군요. 읽어보겠습니다.”

서류를 넘길 때마다 채규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이게 정말… 아직 서른도 안 된 강빈 군이 쓴 계획안이란 말입니까?”

강빈이 앞에서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진태 또한 채규처럼 놀라웠다.

사업이 갖는 실현가능성을 적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잔뜩 허황된 말로 도배해버리면 되니까.

중요한 것은 자금의 배분이나 문제 인식은 당사자가 얼마나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강빈은 어떻게 사업이 나아갈 것인지, 발생할 문제들은 어떻게 미연에 방지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입했다.

“이건 단순히 운의 문제가 아니야. 강빈이는 실력자다.”

“... 이 계획안을 보기 전까지는 회장님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을 겁니다.”

채규는 아무리 진태라도 입바른 소리를 하는 데 있어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채규조차 강빈을 인정하고 있었다.

“아직은… 더 지켜볼 때야. 아직은 말이지.”

진태가 한쪽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강빈이 사라진 문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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