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8화 (8/249)

#8화

바쁜 아침이 지나가고 비교적 한가한 시간이 되면, 태선증권사는 본부장, 서강빈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삼삼오오 모인 직원들은 그간의 서강빈의 행보에 대해서 떠들었다.

“요새 일 진짜 열심히 하시더라. 점심도 본부장실에서 해결한대.”

“그게 얼마나 가겠냐? 좀만 있어 봐, 또 지랄하겠지.”

그 중 입사 2년차의 박대리는 서강빈이라면 아주 치를 떨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작년 이맘때 즈음, 술을 잔뜩 먹고 하필 자신의 자리에 토를 했기 때문이다.

키보드 사이사이까지 스며든 토를 닦아내며 얼마나 열을 받았는지.

“...그래도 본부장이 민성산업도 적당히 빨다 걸렀고 출근도 꼬박꼬박하던데?”

“어쩌다가 한 번 얻어걸린 게 뭐가 대단하다고… 그리고 출근은 당연한 거지!”

처음에는 박대리와 함께 강빈을 신나게 까던 사람들이 이제는 강빈을 변호하고 있었다.

그래도 몇몇은 같이 박대리와 함께 욕을 해주긴 했다.

그마저도 강빈의 자산주 투자에 대한 성과가 있고 나서는 사라지고 말았지만.

“이번에 직원들 성과금 나온 거 본부장님 덕이라잖아.”

“맞아. 그리고 오팀장한테 직원들이랑 회식하라고 개인카드를 주고 갔다는데?”

“그래 봤자 망나니 새끼지 뭘.”

“모두 좋은 아침입니다.”

박대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싸늘한 시선을 느꼈다.

아차, 싶은 생각에 돌아본 뒤에는 황비서가 서 있었다.

***

“본부장님! 식사라도 잘 챙겨 드셔야 합니다. 집무실에서 밥을 해결하셔야 한다면 내일부터 제가 식단 관리하겠습니다.”

점심시간에 김밥을 먹으며 일하는 나를 보고 황비서가 말했다.

재벌이 되면 매일 화려한 음식을 먹을 줄 알았겠지만 아직은 내가 직접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판교의 땅도 매입했으니 이제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야 할 때다.

지난주, 민성산업 주식을 완전히 처분하기 전에 황비서에게 수성보험과 동한기업, 목화제당에 대한 정보를 조사해오라고 했었다.

황비서에게 브리핑을 지시했다.

“먼저, 목화제당은 공업주식회사로 시작해 제분과 조미료 사업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조미료를 사용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대표 상품인 미감이 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소문이 퍼진 뒤에는 주가가 많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황비서의 말을 들으며 기억나는 것들을 적었다.

감칠맛을 내는 데 사용되는 목화제당의 미감은 당시 유행처럼 번졌다.

그러나 이 미감이 뇌신경 세포를 파괴한다는 풍문이 돌았었고 이에 반응해 주가는 크게 폭락했었다.

수요량 역시 급격하게 떨어지자 목화제당은 사실이 아니라고 열심히 변호하지만 이미 뒤돌아선 대중의 반응은 차가웠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목화제당은 미국 FDA와 WHO에 의뢰해 공동 연구를 기획했다.

연구 결과 풍문이 사실이 아님을 밝혀지고, 그제서야 목화제당은 누명을 벗게 된다.

거기다 목화제당은 목화가구의 지주회사다.

목화가구의 모던하고 세련된 가구가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으면서 목화제당의 주가 역시 함께 반등하게 된다.

“지금보다 10% 이상 떨어지면 바로 매수해.”

“네. 알겠습니다.”

황비서는 내 말을 빠르게 메모하고 이어서 보고서를 읽었다.

이제는 어떤 근거를 대지 않아도, 내 말이 기정사실인 양 받아들였다.

“그리고 동한기업은 아시겠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신용카드를 발급하고 바겐세일을 연 기업입니다. 한 번 크게 올랐다가 지금은 안정화되는 중입니다. 수성보험은 규모나 경영 측면에서 국내 최고의 손해보험 회사입니다. 개인연금과 퇴직연금 등 매년 최다 가입자 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기업의 주가는 큰 변화 없이 몇 년째 평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두 회사 모두 지주회사로서 우량계열사의 주식들을 상당 부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기업의 주가는 상당히 저평가가 되었다.

이는 아직 PER와 PBR의 투자 기준이 정확하게 정립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기에 PER과 PBR의 투자 기준이 투자자들에게 잘 알려지게 된다.

두 기업의 주가는 이제 끊임없이 치고 올라갈 것이다.

“동한기업과 수성보험은 10억씩 바로 매수해.”

1994년. 이 3개의 종목은 지주회사의 3인방이라고 불렸다.

이 주식들은 6개월 만에 평균 3배가 상승했다.

이것으로 이 시기에 급등하는 한국 주식은 어느 정도 투자를 끝냈다.

이제 슬슬 발을 넓힐 때가 왔다.

***

늦은 저녁 준만은 강빈을 불렀다.

강빈은 클럽에 가 술을 먹느라 집에 들어오지 않거나 아침이 밝을 때야 들어왔었다.

준만은 그랬던 강빈이 이 시간에 집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냥 신기했다.

“앉거라.”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준만은 눈앞에 앉아있는 강빈을 믿을 수 없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동네 양아치 같은 옷들을 입고 건들거리던 아들은, 이제 정장을 빼입고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회장님께 네 얘기를 했다.”

“민성산업 건 말하는 건가요?”

“그래. 그 외에도 네 개인 투자로 이득을 제법 봤더구나.”

준만은 말을 하고 아차, 싶었다.

민성사업 건을 제외하고, 강빈의 개인적인 성과는 개인적으로 황비서를 시켜 알았던 것이다.

황비서가 자신에게 보고를 한 사실을 강빈이 알게 된다면, 황비서의 직급이 온전치 못할 것이었다.

“네. 아버지가 증권사의 사장이시니 저에게도 보는 눈이 생겼나 봅니다.”

강빈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해 보였다.

그때, 가정부 아주머니가 차반을 강빈의 앞에 내려놓고 방을 나갔다.

“원난성에서 가져온 보이차입니다.”

강빈이 차를 따르며 말했다.

“혈당이 높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차 중에서도 보이차가 혈당을 낮추는 데 특히 좋다고 하네요. 중국 전통으로 끓여 싫어하시는 숙미는 많이 없을 겁니다. 차를 우리는 방법은 아버지 비서에게 말해 두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냐?”

준만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강빈은 천천히 진중한 목소리로 준만에게 답했다.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뜨니 새로 태어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충분히 놀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주식 흐름이나 자본 관계는 평소에도 잠깐이나마 시간을 내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네가 그런 것들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네. 저도 태선가의 일원이니까요. 태선증권을 키워보겠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습니다.”

준만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강빈을 보고 있었다.

사실 강빈이 하는 얘기들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준만은 그 얘기들을 믿고 싶어졌다.

눈앞에 강빈은 너무나 태연하게 자신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흠흠,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첫 번째 투자가 성공했다고 너무 자만하지는 말거라. 그 뒤로 무너지는 사람을 본 게 한두 명이 아니야.”

강빈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무너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끝까지 버텨 성공했던 사람이 바로 지난 삶의 자신, 강현재였다.

“조언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오만에 빠진 것은 아닙니다. 저는 제가 이번에 했던 투자들, 앞으로 할 투자들 모두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확신한다.

이런 말을 준만 앞에서 했던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다.

투자를 받기 위해서 투자처는 확신이 없어도 확신이 있다고 말해야 하니까.

그렇게 긴 세월, 준만은 허울뿐인 말과 진심이 담긴 말을 구분해냈다.

그리고 강빈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준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투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벌써 말이냐?”

“예. 사실은 이미 시작한 것도 있습니다. 동한기업과 수성보험에 각각 10억씩 주식을 매수했습니다.”

준만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동한기업과 수성보험은 자신 또한 눈여겨보고 있던 기업들이었다.

특히 동한기업은 이제 반등할 때가 되었다고 임원회의에서 결과가 나온 것이기도 했다.

‘돈의 흐름을 읽을 줄 안다. 골칫덩어리였던 녀석이 어쩌면…’

애써 막으려 해도 자꾸만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그래. 이 아비도 네가 앞으로 잘할 거라 믿어. 그리고 회장님께서도 앞으로 너를 지켜본다고 하셨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는 너도 잘 알 거다.”

강빈을 좀 더 격려하고자 진태의 전언을 전했다.

강빈도 조금은 놀란 듯 보였다.

“회장님께서… 네. 저도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강빈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 나갔다.

준만은 묘한 표정으로 한참을 강빈이 나갔던 문을 바라봤다.

***

진태가 나를 지켜본다고 말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내가 가져온 성과로 준만을 평가하겠다는 것이다.

준만의 서열이 크게 밀리기 때문에 후계자 경쟁에서는 이미 낙마했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런 준만이 나의 성과로 그 서열 경쟁에 들어갔다?

앞으로 다른 남매들의 견제가 쏟아질 것이다.

신경도 안 쓰던 막내가 눈엣가시가 되어버렸으니까.

진태의 눈에 띈 만큼 더욱이 신중하게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한 건, 이 태선가 안에서 이제 내 입지가 다져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갑작스런 전화벨이 울렸다.

황비서였다.

“본부장님. 퇴근 전, 이채규 실장님이 다녀갔습니다.”

“이채규 실장? 서진태 회장님 비서?”

이채규.

진태의 수족과도 같은 사람.

어쩌면 재만보다 더 아끼는 사람으로, 한때 재만 대신에 채규를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온, 매섭고 날카로운 태선의 비서실장.

태선엔 그가 모르는 것이 없고 그가 손 뻗지 못하는 곳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 진태의 사람이 나의 사람인 황비서를 찾아왔다는 것은 본격적으로 서강빈에 대한 관심이 시작됐다는 말이겠지.

준만을 거쳐 나에게 관심을 표할 줄 알았는데 곧장 바로 나를 찾아온 것은 의외였다.

“네. 오셔서 어떻게 알았는지 투자한 판교의 면적과 동한기업, 수성보험을 제외하고 다른 데 투자계획은 없는지 물어보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회장님의 지시라고 자신이 왔다는 것은 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황비서는 불안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강단 있게 말했다.

“대답은 뭐라고 했지?”

“본부장님이 매입한 판교의 면적은 어차피 알 거라 생각해서 사실대로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투자계획은 아직 없다고 했습니다.”

“잘했어. 내가 원하던 대답이야. 앞으로도 그런 질문이 들어오면 지금처럼 능동적으로 알아서 얘기해.”

황비서는 기분 좋게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황비서에게 자신이 온 것을 알리지 말라고 했다라.

진태의 능력이라면 당연하게도 판교에 대해서는 굳이 황비서를 통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황비서를 찾아온 일을 비밀에 부치려고 한 것은, 내가 내 사람을 얼마나 잘 다루고 있는지 떠본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맞다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진태는 내게 꽤 많은 흥미를 느끼고 있다.

“조만간 회장님 댁에 갈 일이 있겠어. 황비서. 서회장님이 좋아하시는 건 무엇인지, 취미는 무엇인지, 작은 거 하나 빠짐없이 긁어 와.”

“알겠습니다.”

투자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태선가에서 내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진태에게 내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태선… 그리고 서범준. 한 발짝 또 나아간다.’

***

진태는 서재에서 조간신문을 읽고 있었다.

‘연세대 농구부가 농구대잔치 결승전에서 상무 농구단을 꺾고 대학팀 최초로 우승컵을 차지했다.’

‘정부는 새마을운동협의회에 정부 지원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정치적인 사태나 주요 사건들은 몇 언론사를 통해 미리 듣지만, 그런 정보들은 간단하게 축약되어 있었다.

그리고 신문으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고 나서야 변화하는 것들도 있다.

진태는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신문을 읽었다.

쉴새 없이 달려갔던 젊은 시절, 신문을 읽는 시간은 유일하게 쉬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채규였다.

진태는 무슨 일이냐는 듯 콧등에 살짝 내려앉은 안경 위로 눈짓했다.

“강빈 군한테 다녀왔습니다.”

진태의 시선은 여전히 신문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말을 진태가 듣고 있다는 것을 채규는 오랜 세월을 통해 알고 있었다.

강빈의 생각대로 채규를 보낸 것은 진태였다.

태선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은 진태라도 세월을 이기지는 못한다.

아무리 자식들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후계를 정해야 될 때가 온 것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채규는 진태의 육 남매의 동태를 상세하게 조사해 보고했다.

가끔 진태의 관심을 끄는 소식들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별거 아니거나 진태를 실망시키는 소식뿐이었다.

손주 중에서는 범준이 태선식품을 받게 되면서 진태는 채규를 시켜 알아보게 했다.

범준은 계열사를 처음 운영하는 것이었지만 그동안의 경영수업이 쓸모가 있었는지 무난하게 운영하고 있었다.

진태의 눈길을 잠깐 끌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리고 지난 진태의 생일, 진태는 강빈을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채규는 강빈이 크게 될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작은 가능성은 보았다.

“판교에 땅을 5만 평이나 샀더군요. 직접 찾아가 보니 아직 도로도 포장되지 않은 보잘것없는 땅이었습니다. 강빈 군은 그 땅을 시세보다 웃돈까지 주면서 샀습니다.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말이죠.”

“젊은 놈의 치기 어린 객기로 보나?”

채규는 고개를 저었다.

강빈이 보여주는 행보들은 전혀 객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강빈이 일을 처리할 때의 능숙함은 이미 완성된 사업가처럼 보였다.

“이전의 강빈 군이었다면 그렇게 봤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금융실명제 이후의 주식시장을 예측해낸 것이나 민성산업으로 이득을 본 걸 보면 마냥 객기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재밌다는 듯이 진태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강빈이가 신도시 계획을 아는 것 같다는 거지?”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후보 지역은 건드리지도 않고 판교 땅만 매입했습니다. 저희조차 아직 어떤 지역이 될지는 확신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조사를 해본 결과 강빈 군에게 정보책이라고 할 만한 것이 딱히 없습니다.”

“정보책이라… 그런 게 정말 없다면 강빈이는 신기라도 들렸나 보군.”

진태는 아직까지는 강빈이 그저 감이 좋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행운은 한 번씩 찾아온다. 그러나 그것을 손에 쥐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리고 몇 번이나 행운을 손에 쥐는 사람은 실력자이다.

진태는 강빈이 실력자일지 궁금했다.

“강빈이를 불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