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오프더레코드가 세간에 떠돌고 벌써 두 달이 지났다.
라디오에서는 억울하다는 듯 소리치는 김영삼 대통령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결단코 민성산업과 결탁한 적이 없습니다! 정민성은 부산 출신이지만 저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입니다. 이와 같은 허위를 마치 사실처럼 말한 선동가들을 반드시 잡아내겠습니다!”
자신은 민성 사업과 관련이 없다고 절절하게 외쳤다.
정민성과 김영삼이 정말로 아무 사이 아니었는지는 전생에서도 밝혀진 것이 없었다. 당사자들만 알고 있을 테지.
오프더레코드가 터지고 태선증권엔 민성사업의 주식을 매입하고 싶다는 고객들이 넘쳐났지만 주식을 매입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또한 주식을 가지고 있던 고객들에게는 매도를 권유했다. 당시 고객들은 불만을 터트렸지만, 침착하게 응대하고 설득하여 그들의 매도를 모두 이끌어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김영삼의 억울한 목소리가 세상에 들렸다.
민성사업의 주가는 이제 끝없이 추락할 것이다.
오프더레코드만을 믿고 민성사업에 크게 투자했던 주주들은 끝없는 절망에 빠질 것이다.
사람들은 이성적이다가도 가끔 이상한 데에서 생각지도 못한 실수를 범하곤 한다.
그들은 민성사업의 주가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정민성과 김영삼의 출신지가 겹친다는 것에 쉽게 현혹됐다.
“지난주 매도한 게 정말 신의 한 수였군요…”
옆에 서 있던 황비서는 라디오를 듣고 경이롭다는 듯 나를 봤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기에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금융원에서 민성산업에 대한 압수수색이 시작되고, 압박이 들어갈 것이다.
똑똑.
문을 두드린 것은 한전무였다.
당장이라도 자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전무라는 자리는 생각보다 견고했다.
이런 일로 준만에게 부탁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전무의 얼굴이 시꺼멓게 죽어 있었다.
“저… 본부장님?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뭘 말하려는지는 알 것 같은데… 혹시 민성산업 매수하셨습니까?”
적은 금액이 아니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한전무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태선증권에서는 본부장님이 강력하게 주장해서 한참 전에 처분하지 않았습니까… 벌써 매매거래 정지됐답니다. 혹시 태선, 저희 그룹 차원에서…?”
“한전무님.”
고개를 든 한전무는 자신이 한 말이 주제를 넘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급하게 허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더 할 말 없으면 돌아가세요. 저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축 처진 한전무가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집무실을 나갔다.
이번 사건은 일반 주주도 아닌 몇몇 증권사에조차 회생 불가한 피해를 남겼다.
오프더레코드와 같은 출신지. 그 둘 외에도 분명 누군가의 입김이 들어갔을 것이다.
성공투자증권의 대표의 자리에서도 비슷한 청탁을 받은 일도 있었다.
“쓰레기보다 못한 새끼들은 언제나 있구나.”
황비서는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결국 압박에 못 이겨 민성산업의 대표, 정민성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국민들을 기만하여 죄송합니다. 저희 직원 중 한 명이 회사에 대한 과도한 충성심으로 이와 같은 루머를 퍼뜨렸습니다. 그럼에도 곧바로 수습하지 않은 것은 분명 저의 책임입니다.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으로…”
더 들어볼 필요도 없어 라디오를 껐다.
곧이어 꼬리 자르기를 당한 직원이 자수하며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지.
주주들의 손실 금액이 워낙 크기 때문에 그는 최소 10년 이상 징역살이를 할 것이다.
누군가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누군가는 그 이상을 얻는다.
처음부터 민성산업에 손을 대지 않은 증권사도 많았지만,
민성산업을 상대로 이득을 얻으면서 적당한 때에 빠진 증권사는 태선증권이 유일했다.
나는 두달동안 민성산업으로만 40억 원 이상의 수익을 얻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27억 원이던 재산이 벌써 152억 원이 됐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높은 수익이었다.
가격제한폭이 낮았던 시대기 때문에 흐름을 느리게 봤었는데 예상보다 주식시장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손가락을 두드리며 메모해 둔 종이를 읽었다.
줄이 그어진 민성산업 아래 적힌 것이 보였다.
‘판교 신도시 계획.’
2000년대에 판교는 신도시 계획이 세워지면서 기존 땅을 보유하고 있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벼락부자가 됐다.
판교는 미리 투자할 수 있는 미래가치가 높은 것들 중, 우선순위가 높았다.
자켓을 걸치며 말했다.
“황비서. 판교로 출장이야. 준비해.”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같이 나왔기 때문에 황비서와 함게 주차장으로 갔다.
주차장 가운데에 여윳돈으로 구입한 에스페로가 보였다.
“운전할 수 있지?”
“네. 가능합니다.”
“조만간 운전기사도 뽑을 테니 그때까지만 고생해 줘.”
서울을 벗어나 시골 풍경을 보고 있는데 트럭 한 대가 앞에서 느리게 가고 있었다.
뒤따라가다가 황비서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추월할까요?”
“아니야. 천천히 가자.”
트럭을 보고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택배라는 개념이 정립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90년대는 화물업의 호황기를 맞이한다.
그에 이어 온라인 쇼핑이 대중화되기 시작하면 파생되는 부가가치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투자가 아니라, 사업을 해야 될 시점이 올 거다.’
힘이란 돈만 있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황비서가 말했다.
“본부장님. 판교에 도착했습니다.”
눈앞에 2020년의 판교에선 상상할 수 없는, 시골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주차장이 따로 없어서 마을 변두리에 주차하고 걸어갔다.
포장되지 않은 인도에 검은 구두는 금세 빛을 잃었다.
부동산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누워 부채질을 하고 있는 40대 아저씨가 보였다.
“어어, 어서 와요. 챙겨 입은 거 보니까 서울 사람들인가 보네.”
“네. 맞습니다. 서울 촌놈이에요. 하하.”
황비서는 이런 분위기가 어색한 듯 시선을 내리고 있었고 나는 정겹게 인사를 나눴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잠시만 기다려.”
아저씨는 말과는 다르게 천천히 믹스커피를 타 왔다.
종이컵 안에 얼음과 가루가 섞여 둥둥 떠 있었다.
“날씨가 더워서 얼음도 좀 넣었어. 근데 서울분들이 여긴 어쩐 일로 오셨을까. 젊은이 둘이서 신혼집이라도 짓게?”
황비서는 얼굴을 붉혔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내가 살아온 세월이 눈앞에 서 있는 저 아저씨보다 많을 것이다.
“하하. 그런 건 아니고요. 땅을 좀 사고 싶어서요.”
땅을 사겠다는 말을 듣자 아저씨의 눈빛이 바뀌었다.
내 발밑부터 머리까지 하나씩 훑었다.
“꽤 잘 사는 집 같은데… 뭐 시골 땅이라고 해도 원하는 지역은 있을 거 아니에요.”
“콕 집어서 원하는 곳은 없습니다.”
“가격은 얼마를 생각하는데요?”
“가격도 상관없습니다. 그냥 여기서 목 좋은 가장 큰 땅 보여주세요.”
“아이고. 젊은 양반. 여기가 시골이라고 해도 그렇게 싼 데는 아니야. 가장 큰 땅이 얼만 줄 알고.”
그때 황비서가 내 명함을 건넸다.
귀찮은 상황이 올 것을 예측하고, 이미 나에게 허가를 받아둔 행동이었다.
[태선증권 본부장 서강빈]
“태선증권? 태선이면 저 TV 만든 곳 아냐?”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뉴스가 흘러나오는 TV를 가리켰다.
생글거리며 웃는 나를 보고 아저씨는 눈을 번쩍 떴다.
“아이고. 내가 귀한 손님을 못 알아봤네. 미안해요. 잠시만 기다려봐요. 내가 판교에서 목 좋은 넓은 땅 하나 보여줄 테니까!”
아까와는 다르게 아저씨는 허겁지겁 사무실 뒤쪽으로 가더니 사무실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었다.
이십여 분이 지나고 50대쯤 돼 보이는 아줌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그동안 아저씨가 보여주는 지도에서 그 위치를 확인했다.
느긋하게 들어온 아줌마는 요즘 잘나가는 버버리의 로고가 크게 새겨진 옷을 걸치고 있었다.
“어머, 이씨. 이분들이야? 인상들이 좋으시네.”
“네. 사모님. 여기서 제일 목 좋은 곳으로 달라는데, 바로 사모님이 생각나지 뭐예요? 하하.”
아줌마는 과장되게 박수를 쳤다.
땅을 팔고 싶다는 욕망이 표정에 그대로 비쳤다.
“이름도 잘생기셨네. 호호. 내가 판교에 있는 땅만 4만 평이야. 땅이 얼마나 필요한데?”
“4만 평 모두 판교에 있는 땅이 맞다면 전부 매입하겠습니다.”
내 말에 이씨와 아줌마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긴, 지금 판교 땅을 4만 평이나 구입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겠지.
지금 시세보다 조금 웃돈을 얹더라도 판교의 땅은 반드시 사둬야 하는 곳이다.
최소 30배는 올라갈 테니까.
“어… 흠흠. 그러니까 4만 평을 전부 산다는 거 맞지?”
아줌마는 내 눈치를 보며 이씨를 쿡쿡 찔렀다.
둘은 이게 웬 떡이냐는 표정이었다.
“네. 전부 매입하겠습니다.”
아줌마는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호호. 그래도 가격은 들어봐야지. 여기 시세가 시골치고 만만치 않은데 괜찮겠어?”
황비서가 이미 이곳 시세에 대해 조사하고 온 것이기 때문에 나는 가격을 알고 있었다.
아줌마의 의도가 너무 대놓고 보여 피식, 하고 웃음이 새버렸다.
“괜찮습니다.”
“서울 총각이라 가격 잘 모르지? 호호. 평당 11만 원, 아니다. 4만 평이나 사는데 에누리도 좀 들어가야지. 평당 10만 원 어때?”
“그래요. 총각. 사모님 땅이 완전 알짜배기야. 거저네. 거저.”
“본부장님. 여기 시세…”
말하려는 황비서를 제지했다.
아줌마의 말과는 다르게 아무리 비싸게 쳐 줘도 9만 원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 몇 배의 웃돈을 주더라도 살 생각이 있었다.
이깟 푼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노른자 땅이 될 테니까.
내가 샌님처럼 보였나. 어려 보인다는 이유로 등쳐 먹으려는 저들의 의도가 우습다.
겨우 10만 원이라니.
나는 태연하게 말을 꺼냈다.
“그렇습니까? 싸게 주신다면 저도 고맙죠.”
아줌마는 입이 귀에 걸릴 것처럼 함박웃음을 지었다.
“시간 끌지 말고 바로 계약서 쓰자. 싸게 사는 거니까 총각도 그게 좋지?”
“바로 계약서 쓰시죠.”
계약서를 쓰고 아줌마는 후련하다는 듯 부동산을 나갔다.
이씨가 뻔뻔하게 옆에서 말을 걸었다.
“총각이 시원시원해서 좋네! 성공하겠어요. 날도 더운데 커피는 다 마시고 가요.”
무시하고 나가려는데 수더분한 인상의 남자가 부동산에 들어왔다.
남자는 익숙하다는 듯 커피를 타서 소파에 앉았다.
“어이, 이씨 커피 좀 바꾸라니까. 맥심이 맛있다고 몇 번을 말해.”
“아, 최씨. 앞으로 여기 올 거면 집에 있는 맥심 챙겨서 와. 알겠어?”
이씨는 짜증을 내면서도 입은 웃고 있었다.
아마 최씨가 부동산의 오랜 단골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동산의 단골이라면 한 부류밖에 없다.
내가 가만히 서서 둘을 지켜보고 있자 황비서가 말했다.
“본부장님?”
“조금만 더 있다가 가지.”
최씨가 커피를 호로록 마시고 말했다.
“오늘은 땅 안 팔렸어?”
“그 사모님 있잖아.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와서 진상 부리는. 그분 땅이 다 팔렸어.”
최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전부 다?”
이씨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최씨에게 귓속말을 했다.
귓속말이 끝나고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최씨가 벌떡 일어나서 나에게 다가왔다.
“총각이 4만 평을 다 사갔어?”
“네. 제가 4만 평 모두 매입했습니다.”
최씨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두 손을 맞잡았다.
“혹시 다른 땅도 더 살 생각 없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에서 다 드러나 보였다.
“얼마나 있으신가요?”
“1만 평. 고지대에 있어서 전망도 좋아.”
“위치 먼저 봅시다.”
판교라면 어디든 상관 없지만 중심지에서 너무 벗어나거나 다른 지역과 걸쳐있으면 곤란했다.
최씨는 조금 뜸을 들였다가 긴장한 눈빛으로 이씨에게 고갯짓했다.
옆에 있던 이씨가 판교를 확대한 지도를 펼쳐 최씨에게 내밀었다.
최씨는 망설이다가 지도에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지목했다.
최씨가 지목한 곳은 딱 봐도 외져 보이고 교통이 불편해 보였다.
지대가 높고 주변에 산이 있어 걸어가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황비서가 따지듯이 말했다.
“전망이 좋은 것이 아니라 교통이 불편한 곳 아닌가요?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셔야죠.”
그 말에 최씨가 당황한 표정을 짓자 이씨가 대신 말했다.
“하하… 네. 뭐. 그런데 그렇게 나쁜 땅은 아니에요.”
변명하듯이 장점이라도 하나 말할 법한데, 어지간히도 안 좋은 곳인 모양이었다.
최씨는 결정권자가 나라는 것을 알았는지 황비서의 시선을 피해 나에게 말했다.
“전망은 좋다니까 그러네. 총각은 어때?”
“얼마에 파시겠습니까?”
“뭐… 평당 5만 원? 정도면 적당할까 싶은데.”
황비서가 차가운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본부장님. 이곳은 평균 3만 원 정도에 거래되는 곳입니다.”
“무, 무슨. 나이도 어린 게 뭘 안다고 그래!”
나는 황비서를 보지 않고 괜찮다고 말했다.
“좋습니다. 평당 5만 원에 1만 평 모두 매입하겠습니다.”
내 말에 최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마 이씨에게 사정은 들었을 터.
아까 나간 아줌마가 한몫 챙긴 것처럼 자신도 단단히 한몫 챙겼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판교 복합쇼핑몰과 병원이 들어서는 곳이다.
판교가 신도시에 선정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판교에 이주해 왔고 거기에 발맞춰 대형 쇼핑몰과 병원들이 들어섰다.
최씨의 땅의 단점인 교통은 개발과 근처 주차장 조성으로 완화되었다.
심지어 최씨가 파는 땅은 아줌마가 팔았던 땅보다 미래가치가 더 높은 곳이다.
평당 5만 원? 호구를 잡은 것은 내 쪽이다.
“바로 계약하시죠.”
황비서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참았다.
계약은 중개업자인 이씨를 통해서 바로 진행됐다.
황비서는 허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계약을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아줌마가 다시 들어왔다.
“저기, 청년! 내가 여기 밑에 동천도 갖고 있는데 보고가!”
“괜찮습니다.”
“그러지 말고…”
뭔가 아쉬워 보이는 아줌마를 뒤로하고 서울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