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태선그룹의 회장, 서진태. 그의 생일은 남들의 생일과는 사뭇 달랐다.
진태의 직계가족만 모이는 저녁 식사는 단지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자식들이 모여 자신들이 이룬 성과를 진태에게 평가받고 무언가를 받아내려 애쓰는 자리.
그것이 진태의 생일 저녁이었다.
준만은 황비서에게 들은 좋은 소식에도 불구하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눈앞에는 어린 시절부터 그를 옥죄어 온 궁전이 펼쳐져 있었다.
진태의 저택은 한남동에서 가장 큰 저택으로 연면적 약 600평을 자랑하는 광활한 부지.
대기업 총수들이 거주하는 부촌 내에서도 진태의 저택은 압도적이었다.
집 앞에 당도한 준만은 자신이 살아왔던 집이었음에도 초라한 느낌이 들었다.
“서준만 사장님. 오셨습니까.”
입구에서부터 한 남성이 깎듯이 자신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준만의 인식은 좋지 않았다.
어렸을 때, 형제들이 자신을 옷장에 가뒀을 때도 그는 그저 못 본 척 방관하였다.
아니, 옷장 사이로 스며드는 빛을 테이프를 붙여 완전히 가린 건 분명 그였다.
힘 있는 자의 말을 따르고 기생하는 것, 그것이 김집사였다.
“회장님은 강경한가요?”
“서회장님이야 여전하십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걱정이라… 준만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엄마가 다르다는 이유로 형제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도 그저 보고만 있던 진태였다.
나이가 찬 지금, 그때는 왜 그랬냐고 쏘아붙일 수도 있겠지만 진태는 준만에게 여전히 무섭고도 먼 아버지이자 상사였다.
입구에서부터 나무판으로 된 길을 따라 걸어갔다.
점점이 화초들이 피어 있었고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며 물을 뿌려댔다.
진태의 취미는 다양했는데 그중 하나가 골동품 수집이었다.
수집품들을 모으는 용도로 쓰이는 창고가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긴장한 준만이 종종걸음으로 갔음에도 집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수 분이 걸렸다.
준만이 자리에 앉았을 땐 역시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약속 시간인 6시는 아직 멀었지만 먼저 오는 것은 이미 습관이 되어 있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들어온 사람은 넷째, 정순이었다.
“일찍 왔네. 남순이는?”
“둘째 누나는 아직 안 왔어.”
정순이 코웃음을 쳤다.
“지가 뭐라고 늦게 와.”
“....”
늘 먼저 자리에 도착하는 준만은 이해할 수 없는 질투심이었다.
정순은 팔짱을 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순이 들어왔다.
“어머, 언니 왜 벌써 왔어. 나는 딱 맞춰 왔는데. 준만이는 잘 지냈지?”
남순은 등장과 동시에 떠들어댔다.
“이년이…”
남순은 익숙한 듯 신경 쓰지 않았고, 정순은 그런 남순을 또 한참 노려봤다.
준만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못본 척 가만히 있었다.
그 뒤로 둘째 동만과 셋째 영만이 비슷하게 도착했다.
그리고, 도착한 형제들은 묘한 기 싸움을 시작되었다.
물론 준만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깔끔하게 2대 8로 머리를 가른 재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아들, 범준을 대동한 채로.
영만이 눈을 흘겼다.
“범준이는 왜 데리고 온 거야?”
범준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말했다.
“제가 그래도 장손이잖아요. 하하. 태선 식품도 물려받았고 이제 회장님도 종종 뵈야 하지 않겠어요?”
영만은 뭐라 쏘아주려다가 옆에 매섭게 자신을 노려보는 재만을 보고 말을 삼켰다.
재만까지 자리에 앉자 2층에서 진태가 내려왔다.
“다들 오느라 고생했다.”
중후한 목소리에 다들 긴장이 되었는지 침을 삼켰다.
진태의 나이는 80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꼿꼿이 허리를 세운 채 천천히 내려오는 모습은 전혀 노쇠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남순이 유일하게 생글생글 웃으며 진태를 반겼다.
“네. 아버지. 그간 잘 지내셨죠?”
진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이후 이어진 저녁 식사는 떠들썩한 축하도, 그 흔한 케이크도 없었다.
태선가의 사람들은 침묵 속에서 예의를 지키며 식사했다.
5성급 호텔의 쉐프들이 송아지 고기, 캐비어 등 갖가지 고급 요리들을 나르고 가져가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정적을 깬 것은 손주 중에 장손이라는 이유로 유일하게 참석한 서범준이었다.
범준은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는 검은빛과 금빛이 적절하게 조화되어 고급스러워 보였다.
“회장님, 생신 축하드려요. 제가 생신 선물로…”
진태가 범준의 말을 끊었다.
“재만아. 좋은 것을 가르쳤구나. 범준이는 태선의 핏줄 아니냐?”
“... 맞습니다. 회장님.”
“태선이 누군가에게 아부하는 곳이냐?”
“아닙니다. 제가 따로 말을 안 해서…”
진태의 표정은 더없이 엄했다.
“태선은 얻어내야지, 구걸하는 이름이 아니다.”
이미 진태의 집 잔디밭에는 그에게 온 선물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진태는 더 이상 범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범준은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숙였다.
다시 침묵 속에서 식사가 오갔다.
그러다 남순이 준만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참, 준만아 강빈이는 어때? 요즘은 사고 안 쳐?”
무엇을 알고 있는 건지 준만을 향한 윙크까지 하면서.
“아, 그게…”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준만에게 쏠렸다.
심지어 진태도 숟가락을 놓고 준만에게 시선을 두었다.
준만은 조용히 숨을 들이켜고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본부장 자리에 앉혀놨더니 제 적성에 맞았는지 뭐든 척척 해냅니다. 그리고 저도 믿기지 않지만, 갖고 있던 슈퍼카들을 모두 정리하고 주식을 매수했답니다.”
재만은 준만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맛있는 먹잇감을 제대로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강빈이가 슈퍼카를 팔았다? 거기에 주식을?”
“네. 별장까지 처분하고 사더군요.”
영만이 참을 수 없다는 듯 비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하다 하다 주식에까지 손을 대네. 그래서 어디 주식을 샀는데?"
“호만제강, 선한기업, 태향건설, 성찬산업 이렇게 네 종목입니다.”
준만의 기업들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할 때마다 재만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기 힘들었다.
네 종목은 최근 주식시장에서 가장 크게 오른 주식들이었다.
특히 선한기업의 폭발적인 성장세는 전문가들의 예상까지 깼다.
진태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시선이 조금씩 준만에게 향했다.
재만이 이내 표정을 지우고 태연한 척 말했다.
“잘 골랐네… 운이 좋았던 건가? 그래서 수익금은 얼마나 되는데?”
“84억 원을 벌었답니다.”
“84억 원? 준만이 그렇게 안 봤는데, 강빈이한테 통 크게 투자했나 보네. 하하. 그래도 올라서 다행이다. 투자금이 100억은 되나 보지? 근데 회삿돈은 건드는 건 아니다. ”
재만은 84억 원이라는 돈을 준만이 가지고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인상을 팍 찌푸리며 회삿돈을 건들지 말라 가볍게 경고했다.
하지만 준만은 단호하게 말했다.
“제 돈은 일절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슈퍼카와 별장 몇 채를 처분 한 돈으로 각각 5억 원씩, 총 20억으로 시작했답니다.”
“20억으로 수익금만 84억? 그럼 상승기류에 편승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타 있었다는 말이야? 네 종목 모두?”
말도 안 되는 금액.
24억으로 수익금만 84억을 냈다고?
재만의 표정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바뀌었다.
물론 금융실명제가 실시되고 폭락한 주식시장에서 올라가는 상승기류를 잡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 중에는 실력자도 있었지만 분명 운이 좋아 같이 올라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강빈의 수익금은 처음부터 주식시장의 회복과 더불어 마치 급등할 종목들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단순히 운이 좋았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강빈이 같은 애가 어떻게… 준만이 너, 증권사 가져가더니 짜고 친…”
“그만!”
진태의 호통에 다시 정적이 일어났다.
진태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강빈이 산 종목 중 태향건설이 오르리란 것은 진태도 알고 있었다.
태향건설이 케이블TV 업체를 맡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진태의 입김이었다.
실제로 진태도 태향건설에 최대한으로 투자해 크게 이득을 본 상황이었다.
나머지 세 종목에 대해서 자세한 건 몰랐지만 주식시장에서 크게 요동쳤던 종목들인 것은 알고 있었다.
“준만이 너. 확실하게 말해. 네가 도움 준 것이냐?”
“절대 아닙니다. 강빈이 혼자 이룬 일이에요.”
다른 곳에선 몰라도 태선가 안에서는 작아지는 준만이었다.
그런 준만이 자신 있는 얼굴로 나오자 진태가 관심을 보인다.
진태에게 강빈은 가장 기대하지 않던 손주였다.
틈만나면 사고를 치고 태선가의 이름을 더럽히던 놈.
그런 강빈이 처음으로 진태의 마음에 들 만한 성과를 가져왔다.
그때, 범준이 눈치 없이 말했다.
“강빈이, 그놈. 망나니 기질이 어디 가겠어요? 틀림없이 또 사고 칠 겁니다.”
84억이라는 말에 여전히 얼이 빠졌던 재만은 이 타이밍에 진태에게 저런 말을 던진 범준 때문에 속이 들끓었다.
건방진 범준의 말에 진태가 크게 웃었다.
“그럼 너도 강빈이처럼 뭔가를 해낼 수 있다는 말이냐?”
“그럼요. 맡겨만 주세요.”
“맡겨달라고 하는 것부터 틀렸어. 쯧.”
진태가 차갑게 말했다.
뭔가 더 말하려는 범준을 재만이 제지했다.
진태의 시선이 그런 재만에게 향했다.
“그리고 재만아.”
“네. 회장님.”
“나는 아직 내 지분을 누구한테 상속할지 유언장 하나 안 썼어. 네가 이 그룹을 차지한 것처럼 굴지 마라. 범준이 저놈은 어째서 이 상에 데리고 온 게냐.”
재만이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 옆으로 준만을 제외한 나머지 남매들의 욕망에 찬 눈빛은 번들거렸다.
***
회사는 오늘따라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구석에서 대화하고 있던 직원 둘은 강빈이 나타나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흩어졌다.
집무실로 들어가고 있는데 구두를 신은 황비서가 황급하게 뛰어왔다.
“본부장님!”
“무슨 문제라도 있나?”
“민성산업에 대한 오프더레코드가 떴습니다! 그것도 대통령과 민성산업이 결탁했다는 내용입니다.”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소식이 들려왔다.
“내용은?”
“녹음해왔습니다. 바로 틀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비서가 갖고 온 녹음기를 틀었다.
“...그래. 자네는 나만 믿으면 될세. …정민성, 자네가 부산 최고의 유지(有志)가 아닌가.”
“네. 각하. 명심하겠습니다…”
뚝뚝 끊기는 목소리였지만, 첫 번째 목소리는 김영삼 대통령과 동일했다.
그리고 정민성은 민성산업의 대표이자 부산의 떠오르는 세력가였다.
둘의 대화가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대통령과 민성산업의 결탁.
황비서는 회사가 어수선한 것도 아마 이 오프더레코드 때문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체 어디서 퍼진 거야?”
“정확한 출처는 아직 모른다고 합니다. 증권가 찌라시로 퍼진 지는 꽤 돼서… 아마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거예요.”
전생에서도 온갖 대서특필로 다뤄진 큰 사건이었다.
결국 민성산업의 직원 중 한 명이 책임을 지게 되었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분명 윗대가리들이 꼬리 자르기를 했을 테지.
“다른 임원들이나 직원들한테도 속단하지 말라고 전해. 그리고 태선증권에서는 민성산업에 대한 주식투자 추천 건을 멈추고 이전에 투자한 주식을 전량 회수한다. 회수는… 이주일 뒤, 금요일로 하지.”
“네. 알겠습니다. 경리부에 전달해 공지하겠습니다.”
황비서는 서둘러 자리를 나섰다.
나는 눈을 감고 한때 대한민국을 흔들었던 민성산업을 떠올렸다.
아마 내일까지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민성산업의 주가는 주춤할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과 민성산업은 당분간 해명을 하지 않을 것이다.
침묵을 긍정으로 듣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민성산업의 주식을 사려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작전주나 마찬가지였다.
나, 개인이 아닌 증권사 전체의 주식을 위험에 투자할 수는 없었다.
회사가 움직이는 것은 개인이 움직이는 것과는 의미가 달랐다.
아마 모레부터 본격적으로 폭등하기 시작할 것이고, 증권사도 다음 주까지는 안전했다.
“저… 본부장님. 본부장님도 민성산업을 7억 원이나 매수하셨잖아요.”
나는 한 달 전에 이미 민성산업 주식을 매수했다.
황비서가 걱정 어린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 개인주식은 내가 팔라고 할 때 팔아.”
황비서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지만 알겠다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