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준만은 사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소문의 내용은 사고나 치기 바빴던 아들인 강빈이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여직원들에게 더 이상 추태를 부리지 않고 부하직원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당연히 지켜야 할 것들이지만 준만이 기억하는 강빈은 그 반대였다.
똑똑
“들어와.”
황비서가 준만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황비서를 비서 자리에 채용하고 강빈의 업무를 대행하게 주문한 것도 준만이었다.
“요즘 강빈이가 많이 바뀌었다고?”
“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습니다.”
소문이 사실이라는 듯 황비서의 표정이 단호했다.
준만이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자세히 얘기해봐.”
“시간만 때우던 예전과 달리 정말 일을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서류들에 대한 검토도 본부장님이 직접하구요. 시간에 쫓기는 사람처럼 쉬는 시간도 없이, 심지어 밥도 집무실에서 해결하고 있습니다.”
준만의 눈이 일순 커졌다.
“검토? 서강빈이가?”
“네. 제가 하는 것보다 깔끔하고 정확했습니다. 최근에 제가 검토했던 서류에서도 제가 놓친 것들을 지적하고 수정한 것도 본부장님이었습니다.”
강빈은 어렸을 때부터 흔히 말하는 쓰레기 개차반었다.
무면허로 차를 모는 것은 기본, 자신이 책임진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태선백화점에서 난동을 피우질 않나, 늘 멋대로 행동하기 일쑤였다.
강빈이 스무 살이 되고 나선 또 얼마나 큰 사고를 칠까 봐 준만은 늘 걱정했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 연예인을 건드려 기사까지 나고 술을 마시고 차를 운전한 것은 몇 번이나 적발되기도 했다.
마약에 손을 대지 않으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강빈이 베테랑 황비서가 검토한 서류를 지적?
“말도 안 돼. 거기에 갑자기 사람이 바뀔 리는 없고. 다른 변화는 없나?”
“저에게 투자처들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셨고 그 후에 주식을 매수했습니다.”
준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박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준만은 정보 없이 하는 주식은 도박과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준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 황비서가 옆에서 적당히 조율하게. 혹시나 회삿돈에 손대면 바로 보고해.”
“금액도, 투자하는 방식도 모두 신중했습니다. 본부장님이 달라진 뒤에는… 투자를 정말 오래 해왔던 사람 같아요.”
“주식은 물론 투자 한 번 안 해본 게 강빈이야. 뭔가를 하는 척은 누구나 할 수 있어. 다른 건 더 없나?”
“주식을 매수한 돈은 슈퍼카를 처분한 돈이었습니다.”
준만은 뒷목에 뻐근함을 느끼며 목을 잡았다.
어릴 때부터 아빠보다 슈퍼카를 더 좋아했던 강빈이다.
그의 방에 있는 슈퍼카 피규어들도 최소 몇백은 하는 것들. 준만은 강빈이 대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 건지 불안했다.
“황비서… 앞으로 강빈이 일은 사소한 것까지 보고해.”
“네. 알겠습니다.”
“수상한 거 있으면 바로 보고해. 어릴 때부터 사고만 치던 놈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
***
황비서는 한국대학교 출신으로 끊임없이 스펙을 쌓다가 미국의 일류증권사에 입사한, 흔히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훌륭한 인재였다.
그러나 엄마의 건강 악화로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렇게 들어간 태선증권. 입사 첫날부터 불려간 사장실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황미연, 자네는 비서로 일하게 될 거야.”
“네?”
황비서가 지원했던 직무는 IB사업부 쪽이었다.
미국에서 거대 기관을 상대하며 이 일에 매력을 느꼈고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비서라니?
황비서가 비서 업무에 관해서 아는 것은 전무했다.
준만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비서라고 해서 긴장할 필요 없네. 일단 직급이 비서인 거고, 하는 일은 자네가 하던 것과 별반 다를 일 없을 걸세.”
“아무리 그래도… 저는 비서 직무에 관해선 아는 게 없습니다.”
태선증권 정도 되는 기업의 비서라면 분명 관련분야의 전문인을 뽑을 텐데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준만은 망설이다가 황비서의 발걸음을 돌리려는 것을 보고 결국 말했다.
“자네는 우리 태선증권사의 본부장 일을 대행하게 될 거야.”
“네?”
“우선… 비밀을 지켜줄 수 있겠나?”
준만이 동시에 비밀서약서를 내밀었다.
황비서는 우선 들어보겠다는 생각에 도장을 찍었다.
설명을 시작한 준만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서준만 사장의 아들, 서강빈이라는 본부장은 무능하고 사고를 치기 바쁜 망나니였다.
강빈이 친 몇몇 사고들은 기사화가 되었고 강남의 유흥가에서 강빈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준만이 한숨을 깊게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강빈이한테 출근만 해달라고 당부했지만 그 녀석은 그것마저 지키지 않았네. 나도 어찌할 방도가 없어. 차라리 대행이라도 구해서 본부장 자리에 앉히려는 게 내 마지막 방법이네.”
“그런데 왜 하필 저인가요…?”
본부장 대행을 구하려는 이유는 이제 알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행의 자리에 황비서를 쓸 이유는 없지 않은가.
하다못해 태선증권사의 부하직원이라도 쓰면 되지 않을까.
황비서의 생각을 읽은 듯 준만이 말을 이었다.
“뒤탈 없을 테니까. 태선그룹 곳곳에… 됐다. 그것까진 알 필요는 없지. 그리고… 어머니 건강도 생각해야지. 연봉은 섭섭지 않게 챙겨주겠네.”
갑자기 나온 엄마 얘기에 미연이 흠칫 놀랐다.
이력서 어디에도 엄마에 관한 얘기는 적어놓지 않았다.
걱정도 잠시, 자신의 뒷조사까지 했을 정도면 지금 준만이 하는 얘기가 거짓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준만이 내민 계약서에는 연봉이 적혀 있었다.
‘2500만 원!’
보통의 대기업은 입사 시 첫 월급이 100만 원도 안 된다.
미연은 자신을 찾는 증권사들은 널리고 널렸지만 어느 곳에서도 연봉 2500만 원은 받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정도의 연봉이라면 아무런 걱정 없이 엄마의 병원비를 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미연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자리가 정리되면 알아서 올려줄 테니 진급에 신경 쓸 필요 없어.”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렇게 돈만 보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본부장 대행은 황비서의 생각보다 적성에 잘 맞았다.
가끔 강빈이 잡심부름을 시키거나 부려 먹을 때 자괴감이 들긴 했지만 할 만하다고 느꼈다.
문제는 한전무를 비롯한 임원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때였다.
그들은 직급도 낮고 자격도 없는 비서가 본부장 대행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꼬웠는지 노골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아, 미안. 벨을 잘못 눌렀나 봐. 하하.”
별거 아닌 일로 황비서를 호출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황비서가 처리할 보고서에는 내용이 조금 틀리게 적혀 있거나, 아예 공란인 경우도 있었다.
중요한 사항이 빠진 것들도 많아서 일일이 채워야 했다.
일이 잘못됐을 때 책임도 온전히 황비서의 몫이었기에 허투루 할 수 없었다.
야근이 잦아지고 쉬는 시간이 사라졌다.
황비서는 늘 피곤에 절어있었다.
그런 와중에 강빈이 출근하기 시작했다.
‘또 무슨 지랄을 하려고…’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강빈은 출근과 동시에 임원들을 호출했다.
늙은 여우같던 임원들이 바짝 긴장하고 당황하는 모습에 속이 시원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불똥이 자신에게도 튀지 않을까 걱정했다.
걱정하던 황비서에게 강빈이 말했다.
“그동안 고생했어.”
그 말을 들었을 때 약간의 기대감이 생겼다.
그리고 강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황비서가 검토해오던 서류를 뺏더니 몇십 년을 해왔던 사람처럼 익숙하게 서류들을 넘겼다.
황비서도 놓쳤던 허점들을 잡아냈다.
그리고 사람을 다루거나 협상할 때의 모습은 20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능숙했다.
따릉!
전화가 울렸다. 강빈의 호출이었다.
***
한전무가 갖다준 인사 파일들은 황비서를 제외하고 별 볼 일 없었다.
황비서의 이력서와 스펙은 비서와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평범한 비서였다면 지금까지 본부장의 일을 대신할 수 없었겠지.
한전무를 비롯한 임원들이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들이 침묵하고 방관하는 이유는 이곳의 사장, 준만 때문일 것이다.
준만은 지금 나의 아빠이기도 하지만, 그 또한 태선가의 일원이다.
결국 황비서는 내 사람이 아닌 준만의 사람인 것이다.
노크 소리와 함께 황비서가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민성산업은?”
“내일이면 보고서를 올릴 수 있습니다.”
“그래. 그리고 황비서. 자네는 누구의 사람이지?”
“네?”
황비서는 당황한 듯 눈썹이 올라갔다.
나는 아버지의 편이 아닌 내 편이 필요했고, 황비서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다.
일부러 무심하게 눈앞에 서류에 집중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정적이 깨졌다.
“...저는 서준만 사장님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어.”
황비서가 입을 다물었다.
“질책하려고 물었던 게 아니야. 나는 그저 황비서의 능력을 사고 싶어.”
“네…?”
황비서가 지금 받고 있는 돈이 2천 5백만 원이었다.
아무리 태선증권 정도의 비서라지만 금액이 너무 컸다.
수준급의 커리어를 가진 엘리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태선그룹 제일 작은 규모의 태선증권에서 망나니 뒤치다꺼리를 한다?
본부장 대행이라지만, 뒤치다꺼리가 맞았다.
더군다나 임원들이 텃세 부리는 것을 다 참아가면서 일을 해야 했다.
“미래전략실이든, 비서실이든 똥 닦는 애들은 따로 둘 텐데, 황비서 같이 유능한 엘리트가 왜 그 자리에 있을까 생각해봤어. 황비서는 돈을 위해 일하잖아.”
“...”
“오천을 줄게. 나를 위해 일해.”
황비서는 말이 없었다. 5천만 원이면 지금 태선증권의 부장급 이상이 받는 연봉이었다.
“고민하는 건가? 그럼…”
“아닙니다. 제가 그런 큰돈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저는 이미 서사장님께 본부장님 일에 대해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황비서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다시 말할게. 황비서. 내 사람이 되는 건 어때?”
황비서는 망설이는 듯했지만 곧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아마 저 정도의 연봉의 유혹은 뿌리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 동안의 내 모습도 그녀의 선택에 한몫했겠지.
황비서의 표정이 짐짓 결연해 보였다.
황비서를 내 사람으로 쓰려는 이유는 비단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황비서는 내 옆에서 수족처럼 일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내 사람이 아니라면 앞으로 할 일에 큰 방해물이 될 뿐이다.
물론, 5천만 원에 내 사람이 된다는 말은 아니었다.
마음을 내 쪽으로 한 걸음 옮겨주었을 뿐이다.
***
해가 바뀌었고 슬슬 씨를 뿌려두었던 과실을 수확할 때가 되었다.
내가 구입했던 주식들이 목표로 한 맥시멈에 80프로 가까이 올랐을 때부터 매도를 조금씩 시작했다.
호만제강과 성찬산업은 4배에 가깝게 뛰었다.
호만제강은 평균 2만 원 선에서 매수했던 주식이 매도할 때는 8만 오천 원까지 뛰었다.
중간부터 매도를 시작했고 거래 수수료를 제외하면 남은 수익은 14억 원, 성찬산업은 16억 원이다.
선한기업은 생각보다 더 폭등했다. 많아야 5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8배가 조금 넘게 늘었다.
총 수익은 35억 원으로 매수한 종목 중 가장 컸다.
그러나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내가 폭등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반대의 상황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으니까.
분할매도를 하며 혹시 모를 상황에 대처를 하긴 했지만 앞으로 더 신중을 가할 필요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태향건설은 5배 가까이 늘어 19억 원의 수익이 발생했습니다. 거래 수수료를 제외한 총 수익은… 84억 원입니다.”
황비서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보고를 끝냈다. 처음 주식에 넣었던 돈까지 합치면 104억 원이다.
내 대행을 하며 그만한 돈을 움직여 본 적은 있을 테지만 단기간에 개인이 이런 돈을 버는 것은 처음 봤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다음 투자계획을 짜고 있을 때 황비서의 시선이 느껴졌다.
“보고할 게 더 남았나?”
“아뇨. 그게 아니라… 본부장님. 방금 80억 원을 넘게 벌었는데 아무런 감흥도 없어 보이셔서…”
“음…”
물론 기분은 좋았다. 증권사에서 일할 때 가장 짜릿할 때가 바로 이런 순간이니까.
하지만 다시 태어난 인생을 생각했을 때 80억 원은 큰돈이 아니었다.
매 순간 정직하게 살아왔던 내 목숨값, 그리고 서범준의 목을 언제라도 날릴 수 있는 규모의 힘을 생각한다면.
그저 내 다음 계획을 위해 필요한 시드머니일 뿐이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황비서가 내게 말했다.
“아, 그리고 오늘 서준만 사장님께 보고하는 날입니다. 이번 투자 건도 보고할까요?”
잠시 고민했다.
마침 내일이 1월 12일, 태선그룹의 회장 서진태의 생일이었다.
그동완 봐왔던 준만의 성격으로는 진태에게 내 성과에 대한 티를 낼 것 같진 않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일단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서라도 진태에게 내가 망나니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릴 필요가 있다.
“얘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