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남자의 가슴팍에 한장식 전무라는 명찰이 달려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뱉고는 말했다.
“제가 못 올 곳을 왔나요?”
한전무는 당황한 듯 없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본부장님께서 어쩐 일로…”
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출근했습니다. 출근이 이상한가? 본부장실로 같이 가시죠.”
“네. 알겠습니다!”
전무가 본부장한테 경어를 쓰고 있었다.
대체 무슨 지랄을 했던 건지….
한전무는 옆에 있는 직원을 돌려보내고 자신이 앞장섰다.
엘리베이터는 최상층에서 멈췄다.
한전무는 아까의 일을 만회하려는 듯 성큼성큼 앞으로 가서 본부장실이라고 적힌 문을 열었다.
“본부장님. 들어가시죠.”
문을 열어보니 하나밖에 없는 책상 앞에는 다른 사람이 앉아있었다.
“누구입니까?”
“...네? 아, 황미연 비서입니다.”
한전무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황비서는 앞에서 대화하는 것을 듣지 못했는지, 무심하게 펜을 들고 눈앞에 서류에 집중하고 있었다.
앞으로 다가가도 황비서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여전히 서류에 시선이 가 있었다.
대부분의 서류가 수기로 깔끔하게 작성되어 있었다.
정리가 되어 있진 않지만 황비서가 얼마나 일을 열심히 했는지는 유추할 수 있었다.
한전무가 당황해 황비서에게 뭐라 하려는 것을 손을 들어 제지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 방해하지 맙시다.”
황비서의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내가 옆을 서성일 때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크흠.”
보다못한 한전무가 인기척을 내자 황비서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황비서는 아직 상황을 판단하지 못했는지 동공이 흔들렸다.
잠깐의 정적.
“보, 본부장님? 본부장님이 여긴 어쩐 일로…”
하나같이 처음 하는 말이 내게 어쩐 일로 왔냐는 말이다.
서강빈이 자기 비서에게 존대를 하진 않았겠지.
“출근하는 게 무슨 문제 있나?”
“아닙니다. 아, 일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본부장님께서 결제 싸인하실 것만 우측에 모아놓았습니다. 나머지는 검토하는 대로 집에 방문하겠습니다.”
이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서강빈은 일을 아예 하지 않은 듯했다.
그런데 비서를 집까지 찾아오게 만들었다니.
회사에 내가 있는 걸 어색해하는 직원들의 모습이 이제야 확실하게 이해되었다.
혹시나 싶어 한전무를 쳐다봤지만 이쪽은 별생각도 없어 보였다.
책상에 걸터앉아 황비서가 검토한 서류들을 쭉 훑어보았다.
“나쁘진 않네. 그, 한전무님.”
“예. 본부장님.”
“임원들 전부 이곳으로 소집하세요.”
“예?”
“싹 다 지금 부르세요.”
한전무는 갑작스런 임원소집에 사색이 되더니 황급히 방을 나섰다.
황비서는 자리에 일어나 내 옆에 서 있었다.
한전무가 임원들을 불러오는 사이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넓은 크기의 방은 본부장실이라기보다 회장실이라고 불러야 될 것 같았다.
화려한 벨벳 재질의 소파와 그와 상반된, 그러나 값이 나가 보이는 짙은 밤색의 원목 책상.
둘 다 다른 느낌으로 꽤 고급스러웠다.
뛰어다니며 임원들을 불러왔는지 한전무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그의 얼마 남지 않은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나는 한껏 힘이 들어가 서 있는 임원들의 명찰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재무부장님.”
“예. 본부장님.”
재무부장은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부장에 위치한 사람이 벌써부터 긴장하다니.
재무부장을 응시하며 말했다.
“어제 금융실명제가 실행됐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당연히 아실 거고. 우리 증권사가 앞으로 이 위기를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 증권사 찌라시로 10월 위기설이 떠돌고 있습니다. 당분간 고객들에게 매도를 추천 드리는 것이…”
횡성수설 말을 뱉던 재무부장은 이내 기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한숨이 나왔다.
“찌라시는 우리가 만드는 거지, 따라가는 겁니까? 그리고 영업부장님.”
“네. 본부장님.”
“업무 진행상황 보고하세요.”
침을 꼴깍 삼킨 영업부장이 말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고 변동된 장의 흐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폭락 중인 주가에 불안해하는 기업들이 많습니다. 서둘러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사실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 지금도 마음에 걸립니다.”
“영업부장님 말대로 한시가 급한 상황입니다. 그럼 영업부장님은 일 보러 가 보세요. 그리고 한전무님?”
자신에게까지 차례가 올 줄은 몰랐는지 한전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예. 예?”
“오늘 주가만 32포인트 하락했습니다. 하한가 종목수도 역대 최다구요. 이 흐름이 언제까지 갈 것 같습니까?”
“저… 사실 저도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아직은 조심스럽습니다.”
듣다 보니까 화가 났다.
당장 이 금융실명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전무… 임원들이 이런데 밑의 직원들은 안 들어봐도 뻔해 보입니다.”
“예… 그니까…”
한전무가 한참을 망설일 때, 대답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들렸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시간은 모든 은행이 닫은 후인 8시입니다. 익명, 차명으로 된 계좌들이 투기와 부정부패에 쓰였던 것들이 드러나 혼란스러운 겁니다. 지금은 불안정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과세의 불공평성이 사라지며 곧 안정될 겁니다.”
한전무는 고개를 돌려 황비서를 노려보았다.
“…제가 대답하려고 했습니다.”
웃기고 있네.
“대답 못 하시지 않았습니까. 고민한 순간 들을 필요도 없는 답이었습니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서가 대답할 때까지 임원이란 작자들이 침묵만 지키고 있는 게 말이 됩니까?”
다그치는 나의 말에 집무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몇몇 임원들은 모든 것이 황비서의 탓이라도 된다는 듯이 흘겨보았다.
사실 황비서의 말대로, 주가는 지금이 가장 밑바닥을 찍은 시기다.
그리고 한 달도 채 안 돼서 주가는 회복될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매도 시기가 아닌 매수 시기가 될 것이다.
비서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따져냈다.
그녀가 검토한 것들 역시 대충 훑어만 봐도 제대로 처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기본적인 실력이 있는 사람이다.
서강빈이 아무리 개망나니였어도, 자신의 위치를 지킬 정도의 유능한 사람 정도는 앉혀 놓은 모양이다.
“다들 나가보세요.”
임원들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다퉈 집무실을 나섰다.
이걸로 끝이다.
이 내부에 쓸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마지막으로 나가려는 한전무를 불러세웠다.
“그리고 한전무님.”
“예?”
“저는 자리만 지키는 사람은 필요가 없습니다. 사내 구성원 인사 자료. 한 명도 빠짐없이 뽑아오세요.”
“아, 알겠습니다!”
한전무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리고 황비서.”
“네. 본부장님.”
황비서는 자신에게도 불똥이 튀지 않을까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그리고 아까 대답, 훌륭했어.”
“감사합니다.”
칭찬받아 황비서의 상기된 얼굴을 보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 제가 뭐 잘못했나요?”
갑자기 웃는 내가 당황스러운지 황비서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히 물었다.
“아니야. 아참. 내 일들은 놔둬. 내가 할 테니까. 황비서는 지금 당장 내 개인 재산을 조사해줬으면 해.”
“네?”
망나니였던 서강빈이라면 뭐라고 답할까.
“음. 내가 돈을 하도 개같이 써서 얼마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서. 알잖아?”
“...네, 알겠습니다.”
의아했던지 잠깐 말이 없던 황비서는 이내 맡긴 일을 하러 자리를 나섰다.
***
황비서가 돌아온 것은 이른 저녁이었다.
인사를 짧게 하고 내 재산에 대한 자료를 건네주었다.
4개의 계좌에 나뉜 예금은 총 13억.
화폐가치를 고려했을 때 꽤 큰 금액이었다.
거기에 소유한 2채의 별장은 지금 시가로 5억 정도로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슈퍼카가 3대.
서랍 안에서 차키들을 봤던 게 생각났다.
이 시기에는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아무리 태선가의 별 볼 일 없는 막내라지만 재벌은 재벌이라는 것일까.
“수고했어. 세세한 부분까지 잘 조사했네. 그리고 내가 지금부터 부르는 기업들 메모해. “
“네?”
“호만제강, 선한기업, 성찬산업, 태향건설.”
황비서는 곧바로 오른쪽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재빨리 기업들의 이름을 적었다.
“이 네 군데에 투자할 거니까 사소한 것 하나까지 상세하게 조사해. 대충 내가 보긴 봤는데, 황비서 차원에서 한 번 더 검토해줘. 중요한 일이야.”
“네. 알겠습니다.”
황비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곧장 대답했다.
늘 쓸데없는 일에 부려 먹고 일을 짬 때렸던 대표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업무를 줬기 때문이겠지.
황비서는 품에 조심스럽게 수첩을 넣었다.
“열심히 해줘. 앞으로는 일한 만큼 대가를 받을 거야.”
황비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알았다는 듯 낮게 대답했다.
“네. 본부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투자를 시작하려면 기초자금이 필요해. 슈퍼카부터 정리할 테니 얼마에 팔 수 있는지 알아보고 보고해.”
“알겠습니다. 두 대만 정리할까요?”
“아니. 전부 팔 거야. 세 대 다 알아봐.”
“...세 대 다요? 최대한 빠르게 다녀오겠습니다.”
잠깐 놀란 황비서는 정신을 차린 듯 서둘러 집무실을 나갔다.
전생에선 돈을 그렇게 벌었어도 슈퍼카는 한 번도 타보지 못했다.
정직하게 숫자만을 보고 살아와서인지, 아니면 애초에 내 게 아니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슈퍼카를 타는 행위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물론, 재벌이 됐다고 이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똑똑.
얼마간 생각에 잠겼을까, 노크 소리가 생각을 깨웠다.
황비서였다.
“본부장님 국내 1, 2위를 다투는 자동차 판매시장인 한아모터스와 DC모터스를 통해 본부장님의 슈퍼카들 중고 가격을 알아 왔습니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슈퍼카는 부가티 EB110, 포르쉐 959, 그리고 재규어 XJ220.
중고가 아닌 출고가로 따지자면 부가티는 3억 2천만 원, 포르쉐는 2억 4천만 원, 재규어는 5억 2천만 원으로 모두 합치면 10억 8천만 원이었다.
전생의 가치로 따지면 최소 30억 원…
지금 괜찮은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이 2억 2천만 원 정도니까, 서강빈이 슈퍼카에 쓴 돈만으로 강남의 아파트 5채를 살 수 있다.
애초에 슈퍼카는 생산 자체가 제한되어 있고, 해외에서 국내로 들여오는 것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한아모터스는 모두 합쳐서 9억 원을 제시했고 DC모터스는 8억 8천만 원을 제시했습니다.”
“9억과 8억 8천?”
“네, 맞습니다. 흥정…을 통해 조금은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황비서가 흥정이라고 말할 때 잠깐 멈칫했다.
서강빈이 싫어할 법한 말이라서 그런 거겠지.
“그 가격은 말이 안 돼. 포르쉐만 해도 국내에는 3대가 나왔다가 한 번에 매진된 차야. 오르면 올랐지, 내려갈 일은 없어. 혹시 차 상태는 보고 갔어?”
“네 양측 다 본부장님 댁에 방문해서 자세히 살펴보고 갔습니다.”
비싼 출고가에 한정판이라는 프리미엄까지 붙은 차들이다.
심지어 매물도 없기 때문에 구하고 싶어도 구하지 못하는 차들을 이런 식으로 후려치다니.
“양아치 새끼들. 바로 전화 연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