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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106화 (106/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106화

    테리즈 펄번이 내게 남긴 은신처는 열 군데가 넘어갔다.

    마법 능력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라면 모를까, 좌표만 알면 이동 마법을 쓰는 데 문제가 없는 지금은 굳이 도보나 탈것을 이용해 움직일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여행 기분을 내기 위해 이동 마법은 쓰지 않기로 했다.

    실제로 모든 은신처의 좌표를 정확히 아는 게 아니었으므로, 발품을 파는 게 더 안전하긴 했다. ‘은신처’라는 명명답게 지상이 아니라 지하나 상공에 위치한 경우도 몇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신문 가져다 놓은 거 말이야. 은신처 위치는 어떻게 안 거야? 에델라이드가 알려 줬을 것 같지는 않은데.”

    “추적 마법을 쓰면 금방 알아챌 테니까, 사람을 붙였지. 당신이 카만으로 가 준 덕에 남쪽 숲에 있을 때랑 달리 사람 붙이기가 쉬웠거든.”

    “…….”

    “길버트는 인기척을 잘 느끼니까. 에델라이드가 당신을 카만으로 데려간 게 내게는 행운이었어.”

    아무리 봐도 행운 아니라 그렇게 될 줄 알았던 사람의 얼굴인데.

    나는 ‘너 이 자식, 그것도 다 계획했던 거지?’ 하고 이르커스의 멱살이나 잡고 짤짤 흔들려다 기운이 빠져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르커스는 개가 아니라 여우처럼 굴었다. 정확히는 개처럼 구는데 여우였다.

    내가 우리 사이의 나이 차를 들먹이며 온갖 방법으로 스킨십을 피해도, 덩치에 안 맞는 처량한 표정과 남들이 보면 기함할 만한 물리적 어리광을 통해서 기어코 내게 딱 붙어 왔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못되게 군 탓에 이르커스에게 분리 불안이라도 생긴 줄 알았다. 왜, 반려동물이나 자녀를 제대로 양육하지 못하면 종종 그런 문제가 생긴다고 스쳐 지나가듯 본 육아 프로그램에 나왔던 것도 같고.

    하지만, 이르커스는 분리 불안이 아니라 그냥 욕구 불만 같았다. 내가 ‘안 돼! 너 다 크면 해! ’하고 땅땅 못을 박을 때마다 알게 모르게 짓는 그 미묘한 미소가 모든 걸 말해 줬다.

    이르커스는 지금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고, 내가 아니라 다른 놈이 이랬으면…… 아니, 다른 놈한테 이러면 외도다. 그건 안 되지. 아무튼, 상대가 내가 아니었더라면 이만큼 참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황제일 때보다 한가해진 덕인지, 이르커스는 황궁에선 캐물어도 말해 주지 않았던 자기 이야기를 해 줬다. 지금처럼 은근하게 나를 내내 감시했노라고 이실직고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 얘기와 열두 살 이전의 가혹했던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다시 생각해도 로베인 황궁에 낙뢰 치면서 들어갔어야 했는데. 이르커스는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굴곡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르커스의 서> 1권에 서술된 개고생은 귀여운 수준이었고, 실제로 죽기 직전까지 몰렸던 경우도 여러 번이었다.

    그 덕에 이르커스가 살아남기 위해 황궁에서 도망쳐 나를 만난 거지만, 새삼 처음으로 이르커스에게 잘 대해 준 나조차도 꿍꿍이 많은 어른이었다는 게 미안해졌다.

    더 잘해 주고 싶어서 경계를 살짝 풀면, 내 어렴풋한 미안함이나 애정 같은 걸 기막히게 눈치챈 이르커스가 자기 얼굴을 들이밀었다.

    남쪽 숲에선 이걸 막아 줄 길버트나 데인이 있었지만, 테리즈의 은신처에는 항상 우리 둘뿐이었으므로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언제 분위기를 타서 홀라당 잡아먹혀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제는 비가 그렇게 오더니, 오늘은 날이 괜찮아. 나가 볼래? 은신처가 바다 근처에 있다고 좋아했잖아.”

    “제국에선 바다 볼 일이 드물었으니까.”

    “…….”

    “너 또 이상한 생각하기만 해 봐. 마법으로 지형을 바꾸겠다고 생각했다면 빨리 반성해.”

    “……요즘 들어서 잘 알아채네.”

    테리즈가 사람 속 긁는 편지와 함께 남긴 은신처는 여행지로 꽤 괜찮았다.

    자주 왕래할 일 없는 작은 왕국 번화가에 여관으로 위장하고 있거나, 지금 머무르고 있는 은신처처럼 파도가 많이 쳐 사람이라곤 없는 바닷가에 폐허가 된 별장 행세 중인 곳도 있었다.

    처음 내가 몸을 숨기기 위해 찾아간 카만 근처의 지하 은신처가 제일 ‘은신처’다웠다. 물론 바로 이르커스한테 뚫렸으니, 은신처의 기능은 잃은 거나 다름없지만.

    어제 비가 잔뜩 온 바람에 물이 불어 은신처 코앞까지 파도가 쳤다. 이런 날씨면 이 바다를 굳이 찾아오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로브를 벗어 둔 채로 불온하게 일렁이는 바다를 보기 위해 은신처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오래 살아 놓고, 속 편하게 바다 너머 지평선을 바라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시간이 썩어 넘치는 불멸자 주제에 여유를 부리는 법을 제대로 터득하지 못한 탓이다.

    “내가 전에, 난 원래 다른 세상 사람이고 거기서 사고로 죽은 탓에 여기 떨어져 버렸다고 말했잖아.”

    “응.”

    “종종 왜 하필이면 나였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거든? 억울하게 죽는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잖아.”

    파도가 크게 치는 바람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던 나와 이르커스의 발끝이 젖었다.

    어차피 젖은 김에 더 가까이서 바다를 보고 싶어, 잡고 있던 이르커스의 팔을 놓고 바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젖은 모래를 밟는 감각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이르커스는 내가 저를 놓고 몇 걸음 앞서가 버리자, 성큼성큼 걸어 다시 내 팔을 붙잡았다. 그렇게 걸으면 넘어진다는 핀잔이 우스웠다. 넘어져도 번쩍 들어 올려 실내까지 운반해 줄 상대가 있는데, 뭐 어떻단 말인가.

    “난 널 만나기 위해서 여기에 떨어졌나 봐.”

    “…….”

    “그 몇백 년짜리 수수께끼에, 이제는 그렇게 답할 수는 있을 것 같아.”

    평생 관심도 없던 17권짜리 판타지 소설에 왜 하필이면 수능 전날 관심이 갔을까? 그 많고 많은 수험생 중에 왜 하필이면 내가 트럭에 치여 이곳에 떨어졌을까. 예카리나는 왜 자기 자식들을 놔두고 고작 아끼는 노예에 불과했던 내게 영생 저주를 걸었을까…….

    모든 건 ‘왜 하필이면’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삶의 결과를 만든다. 테리즈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손녀 에델라이드는 영웅이 되어 팔 하나를 잃고, 왕정을 폐지했다.

    나를 봉인한 탓에 앙헬은 마탑을 지키지 못해 그토록 원하던 불로불사를 얻지 못하고 죽었다. 트리스탄이 이르커스를 따라왔으므로 붉은 매 용병단의 실질적인 수장은 그의 아내, 이졸데가 되었다.

    나 역시 그렇다. 수능 전날 판타지 소설 읽지 말라는 경고까지 들어 놓고, 굳이 그걸 펼쳐 읽어 본 덕에 이세계로 떨어져 온갖 고생을 했다.

    마녀들을 억지로 황위에 앉힐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은 것도 결국 내 의지였다.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두고 끝없이 돌고 돌았다.

    그 결과 나는 400살 넘게 나이를 먹었고, 세계의 주인공 이르커스 사크리나 로베인을 만났다. 날 죽이는 대신, 내 영생을 함께 짊어진 나의 주인공.

    이르커스가 팔로 내 허리를 감아 가뿐하게 안아 들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내가 지나치게 바다와 가까워진 탓이었다. 차가운 줄도 몰랐는데. 금세 종아리까지 바닷물에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한민국 평균 성인 남성 신장은 훌쩍 넘는 나를 이렇게 어린애 안듯 들어 올리다니. 이르커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내 발로 돌아갈 테니 그만 내려놓으라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날 안은 채로, 이르커스가 고개만 살짝 올려 내게 입을 맞췄다. 짧은 입맞춤이었다. 눈꼴신 커플 애정 행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큰 파도가 쳐 바다에서 완전히 멀어지지 못한 이르커스를 젖게 만들었다.

    별것도 아닌 이 순간이 이상하게 행복했다. 키스도 아닌 가벼운 입맞춤에 웃음이 나고, 앞으로 살아갈 까마득한 미래를 전전긍긍하는 게 아니라, 이젠 당장 내 앞에 있는 상대에게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처럼 운 좋은 불멸자는 전 우주를 뒤져 봐도 몇 명 없을 것이다.

    나는 이르커스의 목을 감아 안고, 다시 입을 맞췄다. 날은 조금 흐렸고, 저 너머 지평선이 보이지 않을 만큼 바다는 일렁거렸다.

    모든 게 아름답기만 한 장면은 아니었지만, 몇백 년이 지나도 이 초라하고 벅찬 광경을 잊을 수 없을 터였다.

    ????????????

    <이르커스의 서>는 원작과 다른 결말을 맞이했다. 이펜하임 대륙에서 종족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주인공 이르커스는 애초에 등장하지도 않는 인물인 대현자와 함께 자취를 감췄다.

    세상 사람들은 황제 자리를 멜킨 공작에게 넘기고 증발하듯 사라져 버린 이르커스에 대해 한참을 떠들었다.

    마녀의 핏줄을 타고나 사람들과 함께 살면 병들어 죽기 때문에 도망쳤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스승에게 영생 저주가 옮아 스스로 황위를 내려놓았다는 말까지 돌았다.

    가장 정확한 소문은 실상 황제가 남색가인 데다, 그 스승인 대현자를 사랑한 탓에 사달이 나 결국 스스로 자리를 내려놓았다는 거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장 진실에 가까운 소문이야말로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고작 사랑 때문에 부와 권력을 포기했다니, 현실이 아니라 풍속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며 비웃었다.

    하지만, 모든 소문도 세월 앞에는 다 무용지물이었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시간은 막힘없이 흘렀다. 때로는 화살보다 시간이 더 빨랐다. 날아간 화살은 박힐 곳이라도 있지만, 시간은 멈추는 법을 몰랐으므로.

    이르커스 사크리나 로베인의 이름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다. 어느 순간부터는 역사책과 황실 기록에서나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었다.

    남쪽 숲의 나무 정령들 간에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에델라이드 펄번은 테리즈 펄번만큼 살다 죽었다. 에리스 멜킨은 사내 없이 마법을 통해 후계를 낳았고, 그 덕에 에이사는 대마법사라는 칭호를 얻었다.

    가까운 자들의 죽음에 이르커스는 슬퍼했지만, 한유안이 불안해했던 것처럼 그가 영생을 후회하는 일은 없었다.

    “이거 봐, 이르. 요즘은 총이 호신용 무기로 인기래.”

    “탄약을 구하기가 쉬워졌다더니.”

    “그리고 라크리움을 화장품으로 써. 저거, 일단은 독인데…….”

    “너무 크게 말하지 마, 유안.”

    세상은 지지부진하게 멈춰 있는 것 같다가도 때가 오면 지나치게 빨리 변했다. 작게는 복식과 예절에서부터, 크게는 사회 문화와 관념까지 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도 있기 마련이었다.

    이르커스가 자꾸만 상점가 주위를 배회하는 한유안을 팔로 감싸 안았다. 오랜만에 번화가에 나온 탓에 한유안은 온갖 물건에 다 정신을 팔고 있었다.

    한유안의 저런 점은 이르커스가 그를 알기 전부터 꾸준했을 것이다. 이르커스는 제 옆에서 끊임없이 도시의 역사와 변화에 대해 조잘거리는 그 작은 머리통에 축복이라도 하듯 짧게 입을 맞췄다.

    “사랑해.”

    툭 튀어나온 고백에 질겁한 유안이 “너는 뭐 그런 말을 시장 한복판에서 하니?”라고 되물으며 이르커스의 품을 후다닥 벗어났다. 그리고는 저 멀리까지 갔다가, 한참 뒤에 돌아와선 이르커스의 손을 꽉 붙잡았다.

    사랑의 유효 기간은, 한유안의 표현을 빌리자면 뇌과학적으로 고작 6개월이다. 반년만 지나면 보편적으로 사라지는 감정이라는 소리다.

    그러나 어떤 사랑은 그 모든 불안과 짐작이 우스워지게끔 유효 기간이 없었다. 영원불멸의 사랑이라는 게 정말 실존한다는 걸, 한유안은 가져 본 뒤에야 깨우쳤다.

    “……나도.”

    “응?”

    “나도 사랑한다고.”

    열아홉 살의 한유안이 지금의 한유안을 보면 얼마나 기가 찰까? 죽을 생각으로 가득했던 400살의 한유안이 이 꼴을 보면 또 얼마나 기함할 것이고.

    변하는 것 사이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태어나고, 사람의 생각과 선택은 모든 순간 수도 없이 바뀐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골라 보기 전엔 알 수 없는 것이 삶이라지만, 대현자는 그 호칭 그대로 제법 정답에 가까운 것을 손에 쥐었다.

    대현자는 이제, 살고 싶다.

    <대현자는 죽고 싶어> 본편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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