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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105화 (105/106)

대현자는 죽고 싶어 105화

17년간의 요란법석이 다 꿈결이었던 것처럼 남쪽 숲에서의 한가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길버트는 한동안 장성한 이르커스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며칠 지나자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자라는 존재였다.]라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다시 이르커스를 알음알음 챙겨 주기 시작했다.

데인이 인간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던 놈이 어찌 그때의 어린 인간과 같을 수 있냐며 온갖 난리를 다 떠는 것에 비하면 참으로 성숙한 나무 정령의 태도였다.

이르커스는 데인의 헛소리는 모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과연, 황궁 눈칫밥을 날로 먹은 건 아닌지 데인을 제외한 다른 나무 정령들과는 금세 친밀해졌다. 여전히 사회성이 조금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관찰해 보니 스물아홉 살의 이르커스는 제법 요령이 좋았다.

에델라이드처럼 카리스마가 있거나 에리스의 신들린 화술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이르커스는 그 나름대로 호감을 쉽게 사는 법을 잘 알았다. 반반한 낯짝이 먹힐 일 없는 나무 정령들에게도 쉽게 호의를 얻는 걸 보면 황당할 지경이었다.

나는 나무 정령들이랑 머리채 잡고 싸운 다음에야 친해졌는데, 이건 불공평해도 너무 불공평한 처사다. 이쯤 되니 모든 인간에게 ‘죽어, 인간!’이라고 소리치는 데인이 가장 공평하게 느껴졌다.

“가끔 데인한테 쥬리아를 소개해 주고 싶어.”

“둘이 닮긴 했지. 종족이 다른데도…….”

“적의 적은 아군이라니까, 인류를 싫어하는 둘이 만난다면 꽤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예법 따윈 싹 무시하고 침대에 늘어진 채, 차를 마시며 이런 비생산적인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유안.]

“응?”

[침입자가 있어.]

위와 같은 생각은 오래 하면 안 된다. 한가로울 때 이런 생각을 할 경우, 높은 확률로 무슨 일이 생기니까. 전쟁 통에 징집된 군인이 제 정인을 향해 ‘살아서 돌아오면 나와 결혼해 줘!’라고 말하고 떠나면 9할의 확률로 죽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르커스와 기껏 남쪽 숲에 틀어박힌 것까진 좋았는데, 침입자…… 아니, 방문자가 너무 많았다.

아무리 우리가 좋다고 황궁을 뛰쳐나왔어도, 모든 정치적 이해 관계에서 단숨에 자유로워질 수는 없었다. 그야 몇 주 전만 해도 이르커스는 제국의 황제였고, 나는 놀고먹는 것처럼 보여도 황궁의 중대사에 은근슬쩍 관여하던 비선 실세였으니까.

에리스가 아무리 사람들을 잘 휘어잡는다고 하더라도, 갑작스러운 세대교체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많았다. 그런 이들은 마리아를 찾아가고, 얼굴도 모르는 이르커스의 늙은 백부를 추대하다가, 결국엔 다시 이르커스를 찾아왔다.

찾아와서 하는 말을 들어 보면 대체로 ‘어찌 감히 황실의 적통이 아닌 여자를 황제로 추대할 수 있는가’가 전부였다. 그럼 이르커스는 ‘여기서 내게 죽을래, 아니면 돌아가서 현 황제에게 죽을래?’라고 대답한 뒤, 침입자들을 얌전하게 돌려보냈다.

데인이 나날이 더 난리 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원래라면 남쪽 숲에서 한 달은 요양하려고 했는데, 사주에 역마살이 끼었는지 한 군데 오래 있을 팔자가 못 됐다.

“내가 처리하고 올게.”

“지독하다. 결계를 강화했는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

[괜찮은 마법사가 한 명 껴 있던데.]

계속되는 방문객에 인내심이 대단한 이르커스 역시 진절머리를 느껴 남쪽 숲의 결계를 몇 배로 강화했는데 그걸 뚫다니. 대단한 마법사였다.

나는 이르커스를 따라 로브를 뒤집어쓴 채로 아틀리에를 나섰다. 어떤 마법사가 이렇게 결계 수식 해제를 잘하는지 얼굴이라도 한 번 볼까 싶었기 때문이다.

????????????

“너였니?”

“……왜 그렇게 실망한 표정이세요?”

“넌 내가 마법을 그렇게 가르쳤는데도, 이르가 강화 좀 해 놨다고 결계 해제하는 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 거야?”

“유안, 아까 아틀리에에서는 누군지 모르겠지만 대단한 마법사라고 했잖아.”

“그거야 내가 가르친 놈이 아닐 때의 이야기고! 야, 너 어디 가서 나한테 마법 배웠다고 말하지 마라.”

내가 한네만을 들들 볶자, 트리스탄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본 붉은 매 용병단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한네만은 우는 시늉을 하며 이르커스 뒤로 가 숨었다. 자기도 이제 내일모레면 마흔이고, 나름대로 존경 받는 황궁 마법사인데 어떻게 이런 취급을 할 수 있느냐는 한탄도 따라왔다.

“그래서,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뭐야? 너희도 설마 이르커스 보고 도로 제국으로 돌아와 달라고 그러려고?”

“아뇨? 전 이르커스 님 없어서 너무너무 좋은…… 아닙니다, 이르커스 님이 없어서 너무너무 서운하기는 해요.”

“아주 손바닥 뒤집듯이 말을 바꾸는구나. 마법사가 마법 말고 처세술만 늘어서는.”

“뭐,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보고 싶어서 왔소.”

트리스탄이 안 어울리게 낯간지러운 소리를 늘어놨다.

나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한네만 입에서 보고 싶었다는 소리가 나오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트리스탄 입에서 보고 싶었다는 말이 나오니까 좀 그랬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바뀐다던데…… 너, 벌써 그럴 나이인가?”

“좋은 말을 해 줘도 악담으로 갚는 건 여전하구만.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둘러보러 왔지.”

“전 새 황제 폐하 밑에서 에이사랑 같이 갈려 나가고 있는데, 두 분은 속세에서 벗어나 알콩달콩 신혼을 즐기며 칩거하고 계신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두 눈으로 확인하려고 왔죠.”

“이 자식들…… 어느 쪽이 진심이야.”

“둘 다 진심이지, 무얼. 됐소. 오래 머무르진 않을 거요. 그냥 이번이 아니면 내 살아생전엔 두 번 보기 어려울 것 같아, 애들 끌고 찾아온 거지.”

아마 붉은 매 용병단이 조금만 더 늦게 남쪽 숲에 방문했다면, 침입자들과 데인의 잔소리를 피해 우리 둘은 남쪽 숲을 떠났을 테니 엇갈려 만나지도 못했을 테다.

한 50년쯤 지나면 트리스탄도 한네만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될 것이다.

시간 선이 다른 존재가 된다는 건 그런 거였다. 무수히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지만, 그간 알아 왔던 사람들이 모두 나를 떠나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 버린다.

절로 시선이 이르커스를 향해 돌아갔다.

내가 영생을 ‘저주’라고 확실히 실감한 건 목이 잘렸을 때가 아니라, 예카리나가 보호해 달라고 내게 맡겼던 그녀의 딸들이 호호 할머니가 되어 늙어 죽었을 때였다.

이르커스도 트리스탄이나 한네만이 죽는다면 내가 느꼈던 것과 같은 상실감을 느끼게 되겠지.

“……이졸데는 잘 지내? 같이 오지.”

내가 애써 말을 돌리자, 눈치 없는 트리스탄이 곧바로 사랑하는 부인 얘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우리 여보야’ 같은 표현이 서슴없이 튀어나오는 걸로 보아, 이졸데는 무척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눈치 없는 트리스탄과 달리, 평균 이상의 눈치를 보유한 한네만은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로 나와 이르커스를 번갈아 보았다.

????????????

“트리스탄이 죽으면 어떨 것 같아?”

이르커스는 밤마다 지치지도 않는지 나를 꽉 끌어안은 채 잠을 청했다.

나는 슬슬 남에게 붙들려 안긴 이 자세에 익숙해져서, 이르커스가 팔에 힘을 주든 말든 편안하게 잠드는 법을 터득했다.

남의 너른 가슴팍에 뒤통수를 기대고 묻자, 이르커스는 아무렇지 않게 슬플 거라는 통상적인 대답만 흘렸다.

“나는 네가…… 상실감을 느끼게 될 거라고 생각해.”

“트리스탄은 내 검술 스승이고, 한네만은 내 동료였으니 장례식에 참석하게 된다면 슬프지 않을 수 없겠지.”

“그런 일이 앞으로는 수백 번도 넘게 반복될 거야. 사람 사이에 잠깐이라도 섞여 살게 되면, 수백 번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지만 네가 네 장례를 치를 수는 없으니까.”

“……유안, 불안하구나.”

갑작스레 찾아온 트리스탄과 한네만이 반갑지 않은 건 아니었다. 최근 남쪽 숲을 들락날락거린 칩입자 중에서는 압도적으로 반가운 얼굴들에 속했으므로.

하지만 노화를 피할 수 없고, 언젠가 죽을 게 분명한 이들이 이르커스를 슬프게 만드는 건 두려웠다. 이르커스가 나처럼 이 영생을 저주하게 될까 봐. 내가 살고자 결심했을 때, 이르커스는 죽고 싶어질까 봐.

“당신은 걱정이 너무 많아.”

아직 제대로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이르커스는 마치 내 불안을 전부 읽기라도 한 것처럼 손을 들어 내 뺨을 문질렀다.

검사의 손답게 마디마다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거친 손끝이 뺨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울렁거리던 머릿속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시작도 전에 끝을 생각하는 건, 내가 아직도 고치지 못한 버릇이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미리 걱정하는 습관은 확실히 고칠 필요가 있어.”

“400년을 못 고쳤는데, 이걸 어떻게 고치겠어.”

“그것보다 긴 시간이 남았으니까 할 수 있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말에 묘하게 안심이 됐다. 언젠가 내가 꽉 안아 달래던 어린애가, 이제는 반대로 나를 안은 채로 어르고 달래는 중이었다.

“아무것도 불안해 할 필요 없어.”

“…….”

“적어도 나에 대해서, 당신이 불안해할 건 아무것도 없어.”

그 말은 어떤 마법도 걸려 있지 않았을 테지만, 웬만한 마법보다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나를 안심시켰다.

허송세월을 보내기 위해 몇 년씩 잠에 든 적은 많았지만, 이르커스가 나를 꽉 붙들어 안은 지금처럼 편안하게 잠든 적은 드물었다. 내가 듣기에도 불규칙하던 내 호흡이 고작 내 뺨을 문질러 주는 이르커스의 손 아래에서 평화를 되찾은 게 느껴졌다.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서, 그 긴 세월을 견뎠던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그동안 내가 끔찍하다고 생각했던 영생도 대단한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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