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104화
그날 밤. 나는 이르커스와 같은 침대에 누워 마리아와 아자젤에 관해 이야기했다.
마리아가 해 줬던 체스보드 이야기를 전해 주자, 이르커스는 “역시 제자가 스승보다 낫네.”라는 말로 내 속을 긁었다. 나는 그대로 이르커스의 잘난 콧잔등을 한 번 깨물었고, 그 대가로 턱이 붙잡혀 두어 번 짧은 입맞춤을 받았다.
에리스 멜킨에게 황위 계승을 마치고 나면 이르커스와 나는 남쪽 숲으로 곧바로 떠날 예정이었다.
“참 이상하지?”
“어떤 게?”
“그냥…… 내가 살면서 만나 왔던 모든 사람이 나를 이룬다는 사실 말이야. 어쩌면 인간이 아닌 종족들까지 포함해서.”
한국에서 산 기간은 고작 19년밖에 안 되는데, 나는 여전히 그 시절에 영향을 받았다. 판타지 세계 속 사람들이 모를 법한 말들을 늘어놓고, 사고방식도 자라 온 환경이 다르니 대륙 사람들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4세기 동안 늘 같은 한유안이었던 건 아니었다. 예카리나가 나를 바꿨고, 내 목을 친 로베인 제국의 13대 황제가 나를 한 번 더 바꿨으며, 자기 잇속만 챙기던 카만의 왕족들이 나를 또 바꾸었다.
나는 그들 덕에 인간과 신의 경계 사이에 서 대륙의 주신인 헤누스나 엘리오스보다 더 신처럼 말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그 이후, 길버트를 만났다. 인간을 증오하던 나무 정령은 내게 인간의 이름을 붙이는 걸 허락했다. 나는 나무 정령의 친구가 되었고, 세계의 주인공을 만났다.
모든 변화는 아주 천천히 일어났다.
절대 도와주지 않을 생각이었던 테리즈 펄번을 도와주고, 죽게 놔두려고 했던 에델라이드를 위해 마법 계약을 어기는 위험한 짓을 감행했다. 한네만을 살리고자 앙헬의 손에 봉인당했고, 절대로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스스로 꺾었다.
나와 마주쳤던 모든 존재가 나를 좋든 싫든 달라지게 했다. 살아있는 한, 나는 영원히 한유안일 테지만 ‘한유안’이 항상 그대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당신을 망칠 수 있었잖아.”
이르커스가 나를 끌어안은 채 귓가에 소곤거렸다. 누가 들을 일 없는 방 안에서 굳이 귓가 가까이에 대고 말하는 속셈이야 뻔했다.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뒤로 젖히곤, 순순히 이르커스야말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라는 걸 시인했다.
“넌 내가 망친 것 중에 가장 특별한 존재일 거야.”
“드물게…… 당신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네.”
“그리고, 내가 망칠 수 있는 존재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일 테고.”
“더 말해 줘.”
“이제 싫어, 부끄러워.”
이불을 끌어당겨 몸에 둘둘 감고 돌아눕자, 이르커스가 안달이 나서 내게 도로 얽혀 왔다.
한 번도 큰 개를 길러 본 적은 없지만, 분명히 내 몸집만 한 대형견을 기른다면 이런 기분일 것이다. 잘 키운 제자가 어쩌다 개처럼 낑낑거리게 됐을까.
“잘 자, 유안.”
이불 밖으로 아주 조금 드러난 이마에 닿는 입술이 조심스러웠다.
마녀의 핏줄을 이었지만, 생물학적 남자로 태어나 마녀가 될 수는 없었던 주제에 꼭 축복이라도 하듯 좋은 꿈을 꾸길 바란다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참 다정했다.
언젠가 내 영생과 사랑을 기원하던, 한 마녀의 목소리처럼.
????????????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남쪽 숲으로 돌아온 것까진 좋은데, 고생도 이런 고생이 없다.
데인과 입씨름을 벌이며 아틀리에 바닥을 점령한 잡초를 처리하는 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길버트는 열두 살 이르커스와 스물아홉 살의 이르커스 사이의 갭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르커스에게서 무려 1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꼭 남쪽 숲에서 살아야 하는 거야? 대현자 하나도 버거운데, 직전 경력이 제국의 황제였던 놈까지 데려와야 하는 거냐고.]
“내가 아틀리에 바닥에 불 질러 버리기 전에 그만 좀 투덜거려. 네가 이런다고 내가 남쪽 숲을 떠날 것 같아?”
[…….]
“길버트! 와서 데인 좀 데려가! 성가셔 죽겠어.”
길버트는 못 본 사이에 새싹에서 고목이 된 이르커스를 당황스럽게 훔쳐보다가, 내 부름에 못 이겨 데인을 끌고 숲 한가운데로 사라졌다.
방해꾼이 사라지자,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괜찮아?”
“데인만 없으면 행복할 듯.”
“…….”
“혹시, 방금 데인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니? 그랬으면 진짜 반성해라.”
“…….”
“이 자식이 진짜……. 내가 너한테 뭐라 그랬어. 마음 착하게 쓰고 살아야 인생 덜 꼬인댔지.”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유안.”
“네가 침묵을 지켜도 난 다 알 수가 있어.”
“잘 모르면서.”
“어허. 군말 말고 빨리 정원 쪽이나 제대로 가꿔. 식물 관련은 데인이 없을 때 빨리 처리해야 한다고.”
다 허물어져 가는 아틀리에 바닥을 뚫고 자란 잡초들을 마법으로 허둥지둥 없애 버렸다. 데인이 이 꼴을 봤다면 인간이나 없애 버리라고 노발대발했을 것이다.
길버트는 나이 드니까 흉포함이 많이 사라지던데, 데인은 1호선 광인이라도 된 것처럼 세월이 흐를수록 괴팍해졌다.
“아틀리에 보수 공사를 마치고 나면 보존 마법을 한 세기 단위로 걸 거야.”
“나쁘지 않네.”
“그다음엔 테리즈가 남긴 나이트 펠로우의 은신처를 싹 돌아보기 위한 여행을 떠나는 거지. 데인이 극성맞게 아틀리에를 없애려고 들어도, 항상 이 자리에 번듯한 모습으로 있을 수 있도록.”
정원이나 가꾸라고 등을 떠민 게 불과 몇 분 전인데, 이르커스는 다 했다는 말과 함께 금세 내 옆으로 돌아왔다. 농땡이 피우는 거면 크게 혼날 줄 알라는 내 으름장 따윈 다 자란 이르커스에게 하나도 먹히지 않았다.
이르커스가 자연스럽게 제 팔로 나를 감싸 안았다. 마법 쓰는 데 방해되니까 조금 떨어지라고 슬쩍 짜증을 부려도, 내가 써야 할 마법을 이르커스가 대신 써 가며 아틀리에 보수에 박차를 가하는 통에 밀어낼 변명거리가 점점 더 없어졌다.
“있잖아, 이르.”
“응.”
더듬더듬 올라오는 이르커스의 손을 쳐 내며, 나는 대화를 시도해 이르커스의 음험한 손길을 막아 내기로 결심했다.
“내가 너한테 계속 모질게 굴고, 널 밀어내고…… 그리고 진심이 아닌 소리를 지껄여도 그걸 진짜라고 생각하면 안 돼.”
“계속 내게 가혹하게 굴려고?”
“굳어진 성격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지 않지만, 아무튼 시간이 오래 필요한 법이잖아.”
“…….”
“그러니까, 내가 자꾸 너한테 나도 모르게 상처 주는 말을 해도 그게 내 진심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화가 나도, 나 두고 아무 말 없이 멀리 가는 것도.”
“정말 부조리하고 뻔뻔한 요구네.”
“알아. 난 이기적이고 손해 보는 것도 싫어하는 성격 나쁜 대현자니까. 그러니까, 네가 날 참아 줘야 해.”
내가 들어도 정말 기막히게 당당한 요구였다. 하지만, 난 타지도 않고 재활용도 불가능한 쓰레기니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돌이켜 보면 이르커스는 참 인내심이 좋았다. 내가 끊임없이 오답만 골라 상처 줄 말을 했는데도 날 사랑했으니까.
“마침 내가 제일 잘하는 게 참고 기다리는 거야.”
“…….”
“대신 인내심을 끝없이 길러야 하는 불쌍한 제자를 위해, 지금 한 번만 더 사랑한다고 해 줘.”
이르커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몸을 숙여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작게 웃음이 나왔다.
“너도 만만치 않게 뻔뻔한 요구를 하는데.”
“당신한테 배웠지.”
“몸 좀 숙여 봐. 귓속말로 할래.”
내 말에 이르커스가 선선히 몸을 가까이 숙였다.
나는 발끝만 살짝 든 채로 이르커스의 귓가에 대고 사랑한단 말을 속닥거렸다. 참으로 낯간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예카리나가 살아서 이 꼴을 봤다면 놀라서 쓰러질 텐데. 결국 너도 사랑을 하는구나, 유안……. 나는 절대 틀리지를 않는다, 하고 득의양양하게 웃을 게 분명했다.
????????????
성인 남자 둘에 그만큼 건장한 떡갈나무 정령이 하나가 세 들어 살아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아틀리에를 알뜰살뜰 손봤다.
유일하게 손보지 않은 게 침실이었다. 나는 만일을 위해서 각방이 있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이르커스는 웃는 얼굴로 내 의견을 더 강력하게 묵살했다.
황궁에서도 그 많은 방을 두고 내 방에 와서 드러눕더니, 아틀리에에서도 기어코 나와 한방, 한 침대를 써야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르커스가 적당히 100살은 될 때까지 수절시키려고 했는데. 같은 침대에 누워 자면 그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았다. 나이를 좀 더 먹어야 내가 손을 대든가 말든가 하지.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르커스는 방을 하나 더 만들려는 내 옆에 데인을 꼭 붙여 주는 걸로 방해를 일삼았다. 고작 인간을 위해 남쪽 숲의 어떤 공간도 더 내줄 수 없다며 난리를 치는 데인 덕에, 나와 이르커스의 각방에 대한 관점은 이르커스의 압승으로 돌아갔다.
“네 덩치가 워낙 커서 한 침대에서 자면 불편한데.”
“내가 끌어안고 자면 자리 남잖아.”
“네 품에 갇힌 채로 눈떠야 하는 내 입장을 생각해 봐.”
“……싫었어?”
“그게 문제가 아니라…… 너보다 먼저 눈떠도 네 힘에 밀려서 아무것도 못 한다고.”
이르커스가 작게 “그러라고 껴안고 자는 건데…….”라고 중얼거렸다. 참으로 괘씸한 자식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두 인간이 각방 논쟁을 하든 말든, 사라진 잡초와 아틀리에를 차지하고 있던 수많은 식물의 새로운 거취에 대해서만 신경 쓰는 나무 정령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이곳에서는 황궁처럼 남의 시선을 대단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같은 침대에서 끌어안고 자는 건 이 아틀리에에서만이야.”
어떻게 사람이 열두 살 때보다 의젓하지 않을 수가. 나는 열두 살에 가장 의젓했던 이르커스를 아련하게 추억하며, 결국 먼저 백기를 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