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103화
로베인 제국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혔다.
“황실의 핏줄을 잇지도 않은 멜킨 공작이 어찌 황위를 대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멜킨 공작은 무도한 자입니다. 명예로운 귀족의 권위를 땅바닥으로 떨어트리고, 사사로운 마법을 이용해 주신 엘리오스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이입니다. 그런 이가 황제가 된다면 이 제국에 재앙이 내릴 것입니다.”
다들 말은 정말 잘했다. 내 귀에는 전부 ‘그 자리 쟤한테 줄 거면 나 줘!’ 정도로 들렸지만, 다들 나름대로 그럴듯한 이유와 근거를 들먹이며 에리스 멜킨이 황제가 되어선 안 된다고 농성했다.
“차라리 마리아 님의 황녀 자리를 복각시키고 황위를 계승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옳은 소리입니다. 마리아 님께서는 정통 황실 핏줄임은 물론이고, 아직 나이도 어리시니 후사를 보는 것에도 문제가 없습니다.”
“어떻게 반역자의 핏줄에게 황위를 넘긴단 말입니까? 지금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자는 돌아가신 선황과 한 핏줄이신…….”
동네에서 반년 만에 오일장이 열려도 지금 이곳보다 더 시끄럽지는 않을 거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참관한다고 나대지 말고, 한가롭게 정원 산책이나 할걸.
귀족들이 서로가 지지하는 세력을 다음 대 황제로 만들기 위해 대놓고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동안, 이르커스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다음 황제’ 후보로 거론된 멜킨 공작, 에리스 멜킨은 해사하게 웃고만 있었다.
긴 곱슬머리를 귀 뒤로 우아하게 넘긴 그녀는 돌연 아무렇지 않게 회의장 테이블을 퍽 내리쳤다. 테리즈나 에델라이드처럼 괴력을 가진 건 아니니 테이블이 반으로 갈라지거나 금이 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소란스러웠던 회의장 내부에 찬물을 끼얹기엔 충분한 행동이었다.
“다들 참, 투명도 하시지. 차라리 황제께 자리를 물려달라고 손이라도 들고 발표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과거, 에리스 멜킨이 에킨도르와의 멜킨 백작가 승계 싸움 때문에 황궁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허접 박쥐 새끼였던 에킨도르와 달리, 에리스는 기백이 남달랐다.
“오늘 제가 절대 황제가 되어선 안 된다고 큰 소리 냈던 분들의 존함과 직위는 제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두도록 하겠습니다.”
“…….”
“황제 폐하의 결정이 그렇게 못마땅하시다면, 진작에 반란을 일으켜 다른 이를 황제로 앉히시지…… 다들 엉덩이만 무겁고 입은 가벼우셔서.”
“저, 저…… 저 무엄한!”
“지금 무엄한 건 무엄하다 소리치는 쪽이지요. 황제께서도, 심지어는 대현자께서도 이 자리에서 침묵을 지키고 계시는데 다들 어찌 이리 미친 망아지처럼 소란스러우신 건지.”
에리스 멜킨의 저 화술을 이르커스가 절반 정도만 닮으면 소원이 없겠다.
나는 옆집 딸과 내 자식을 비교하며 ‘옆집 에리스는 국어 모의고사 1등급이라는데, 너는 왜 그 모양 그 꼴이니?’라고 묻는 지독한 학부모의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귀족들이 설령 회의장에 대자로 누워 절대 멜킨 공작을 황제로 만들 수 없다고 질질 짜더라도, 다음 대 황제는 에리스 멜킨이 될 것이다.
현 황실도 4세기 전에 다윈의 목을 친 자가 정권을 잡으면서 유지된 것이니, 기실 혈통의 정당성을 따지는 건 정말 아무 의미 없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거지, 사람이 어떻게 그 자체로 자리가 될 수 있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위치와 입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테리즈 펄번의 소싯적 태도와 죽기 전 태도가 달랐고, 전 황비 라일라의 딸을 향한 시선과 아들을 향한 시선이 달랐듯이.
결국, 인간은 자기가 처한 상황에 맞게 살 뿐이다. 본인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인간이 될지는 스스로의 결정일지언정 자리와 상황을 두고 자격을 요구하는 건 그냥 못 가진 자들의 환상이고, 열등감이다.
“원래라면 아무 말도 안 하고 조용히 있다 회의장을 나서려고 했는데, 회의가 너무 안 끝나니 나도 말 좀 얹어야겠다.”
무엇보다 내가 다음 대 황제로 에리스 멜킨을 점찍었으면 그걸로 끝이지, 뭐 저렇게 사사건건 시비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오른손을 들었다. 누가 개기면 간만에 번개로 좀 지질 생각이었다.
“불만 있으면 멜킨 공작이 황위에 오른 뒤, 반역을 일으키도록 해.”
“대, 대현자님!”
“너희도 억울하고 황당하겠지만 어쩌겠니? 인생은 원래 그런 거고, 줄 잘 선 인간이 승진하는 건 고대부터 이어진 섭리란다.”
????????????
남쪽 숲으로 향할 채비를 하던 중, 의외의 손님이 나를 찾아왔다.
마리아는 조금 헬쑥해지긴 했지만, 라단타와 여전히 닮은 얼굴로 내게 예를 갖췄다. 에리스가 공작위 때문에 날 만나려고 했을 때보다 몇 배쯤 더 당황스러웠다.
나는 마리아에게 은근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르커스가 아자젤 섀턴을 이용하기 위해 마리아를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네가 날 이렇게 찾아올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떠나시면 영영 만나 뵙지 못할 것 같아서요.”
“한동안 남쪽 숲에서 지낼 예정이지만, 거기가 사람이 찾아오기 썩 좋은 곳이 아니기는 하지.”
아자젤의 죽음 이후, 마리아는 크게 좌절했다. 친형제인 라단타와 조부 베첼 공작은 결국 모두 반역죄로 사형당했고, 모친인 라일라는 반역에 동조한 것도 모자라 황제의 물건을 훔친 죄로 국외로 추방당했다.
친지 모두가 결말이 안 좋은 것도 모자라, 아카데미에서 가장 가까이 지냈던 후배 아자젤이 살해당하는 걸 목격하기까지 했다. 그것도, 제 친형제인 라단타가 아자젤을 죽이는 꼴을.
실상 모든 게 이르커스가 내 마법 제약을 풀어 주기 위해 깐 판이기는 하지만, 나로서는 마리아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리아는 어려서부터 이용당하고, 휘말리고, 잃기만 하다 어른이 되었으니까.
“대현자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응. 물어보렴.”
“이제 저는 어떻게 사는 게 좋을까요?”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대현자’라는 칭호를 가진 내게 이런 질문을 해 온 이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나조차 내 인생도 제대로 건사 못하는 팔자라 매번 답을 내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살고 싶은데?”
“……잘 모르겠으니 여쭤보는 거예요.”
“내가 대현자라서?”
“네.”
“내가 대현자여도 너 대신 네 인생을 살아 줄 수는 없는데. 그러니, 맞는 대답을 줄 수가 없구나.”
“…….”
“이제 이르커스가 나를 따라 황궁을 떠나면, 한네만은 황궁에 남겠다고 했지만 트리스탄은 고향인 카만으로 돌아가 붉은 매 용병단을 다시 정비할 거라고 그러더라.”
마리아는 늘 기사가 되고 싶어 했으니, 트리스탄을 따라가도 좋을 것이다. 한네만이 없는 트리스탄은 여전히 사기당하기 딱 좋았다. 물론, 트리스탄이 어디 가서 사기당해 와도 이졸데가 그 몇 배로 갚아 줄 테니 별문제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네만의 빈자리를 마리아가 대신 채워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테다.
“네가 원한다면 내가 트리스탄에게 따로 말해 둘게. 내가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으니까.”
“…….”
“용병보다 자유롭진 않겠지만, 기사가 될 수도 있을 거야. 기사 쪽을 원한다면 떠나기 전에 멜킨 공작에게…….”
“제게 왜 미안해하세요?”
내 말이 다 끝맺기도 전에 칼 같은 질문이 말허리를 자르고 기습적으로 돌아왔다. 파란 눈이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내가 너한테 미안해해야 할 일이 있니?”
“……아뇨, 그냥. 어쩐지 그렇게 보여서요.”
“사실 맞아. 난 너한테 미안해해야 해.”
“어째서요?”
“이르커스가 구할 수 있었는데도 아자젤을 구하지 않은 건, 나 때문이니까.”
마리아에게 아자젤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건 조금 비겁할지언정 덜 피곤한 일이었다. 이제 떠날 건데, 굳이 남은 이들에게 원망을 살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마리아가 내게 질문했을 때, 나는 불가항력처럼 그녀에게 아자젤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애를 죽인 건 라단타예요.”
“알아. 하지만 죽게 둔 건 이르커스고, 그렇게 만든 건 나지.”
“아자젤이 그 자리에 있었던 건 라단타나 이르커스, 대현자님 때문이 아니라 저 때문이고요.”
불같이 화를 내거나 싸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리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마리아는 초연한 면면으로 내게 대꾸했다. 어떻게 들으면 냉담하게 느껴질 정도로 덤덤한 목소리였다.
“그거 아세요? 제가 여덟 살 때, 조부님은 저 보고 이복형제를 염탐해서 제 친형제를 도우라고 하셨어요.”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베첼 공작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라단타를 배신했다.
그건 의외의 일이었다. 아무리 어리다고 하더라도 황녀로 태어난 이상, 마리아는 자신이 이르커스의 편을 드는 이상, 라단타를 곤란하게 만들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을 테니까.
“라단타는 그럭저럭 좋은 형제였어요. 조부님도 어머니도 전부 제게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고요. 그런데도 전 다른 사람의 편을 든 거죠.”
“그걸 후회하니?”
“아뇨.”
어떤 선택은 삶의 결과를 바꾼다. 마리아는 이르커스를 선택한 덕에 폐위된 황녀가 되어 아카데미에 갈 수 있었다. 마음만 제대로 추스르고 나면 용병이든 기사든, 원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을 것이고.
여덟 살의 마리아가 지금의 결과를 모두 계산해서 라단타 대신 이르커스를 고른 건 아닐 테지만, 결국 그 선택의 책임은 마리아 스스로 치러야 했다. 마리아의 인생은 누가 대신 살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러니 부디, 제 책임을 앗아 가려고 하지 마세요. 인생을 대신 살아 주는 건 못하신다면서요.”
“…….”
“세상은 체스보드가 아니에요. 사람들은 종종 자기가 다른 사람을 폰이나 룩을 움직이듯 이용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사람도 마찬가지로 체스 말이 아니죠. 이르가 아자젤을 제 옆에 일부러 놔뒀다고 한들, 그를 가장 가까운 후배로 삼은 건 저 자신이에요. 저와 가까워지기로 마음먹은 것도 아자젤 섀턴, 본인의 결정이고. 그냥 운 나쁘게…… 모든 게 석연찮게 들어맞았을 뿐, 그 모든 일이 대현자님 탓이라고 믿는 건 굉장히 오만한 일이에요.”
나는 대현자고, 내 앞에 앉은 상대는 갓 성인이 된 전 황녀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4세기를 산 나보다 고작 스무 해를 더 산 마리아가 더 현자처럼 느껴졌다.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난 건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내게 그냥 어린애의 칭얼거림이었다며, 웃는 낯으로 어느 쪽으로든 추천서는 다 써 달라고 말했다.
잠시 방향성을 찾지 못하는 것일 뿐, 마리아는 어디서든 자기 자리를 찾을 사람이었다. 나는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기 전에 만나 뵐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나도 영광이었어. 모쪼록 어디서든 잘 지내렴.”
예법에 맞지 않는 짧은 악수가 오고 갔다. 스쳐 지나갈 인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마리아는 내게 들불 같은 인상을 남겼다. 모든 걸 다 태워도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