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102화
에리스 멜킨은 적으로 돌리면 정말 피곤할 테지만, 아군일 땐 참으로 든든했다. 아군의 지위를 호시탐탐 노리지만 않는다면 조금 더 든든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설마, 영원히 황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실 건 아니시죠?”
에이사를 옆에 끼고 차를 홀짝이던 에리스가 내게 물었다. 이르커스한테 물어야 할 질문을 내게 하는 걸 보니, 이르커스와는 대화가 안 된다고 했던 말이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두고 보지도 않을 거잖아.”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황제께서 영원한 권세를 누리시는 걸 어찌 두고만 보겠어요.”
에리스는 그간 황궁 내 귀족 정치 이간질의 끝을 보여 주었다.
그간 서로 견제하기는 했어도, 나름대로 몸을 사리던 귀족들이 그렇게 오합지졸처럼 입에 거품을 물고 서로에게 달려드는 꼴은 처음 봤다. 판타지 세계에서도 정치판은 늘 더러웠지만, 암묵적인 기 싸움이 아니라 물리적 철권 파이트가 대대적으로 펼쳐질 줄이야.
공의회가 열렸는데 의견을 내다 말고 서로 멱살을 잡는 꼴이라니. 이르커스도 에리스 덕에 정무 처리가 조금 골치 아파졌을지언정 매우 흥미진진해지긴 했을 것이다.
에리스는 아주 간악하게 제국법을 멋대로 주물렀다. 작위 계승에 대한 법률부터 마법을 통해 여성 혼자 후계를 탄생시킬 수 있게끔 마법 관련 법률까지 바꾸려고 들었다.
덕분에 귀족들은 황제인 이르커스를 견제할 틈이 없었다. 조금만 정신을 놓고 있으면 에리스가 ‘후후, 오늘은 또 어떤 법을 바꿀까?’ 하고, 엄격한 제국법을 뒤져서 새로운 안건을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여성 혼자 마법으로 아이를 만드는 건 결국 불법으로 돌아갔지만, 에리스는 별로 아쉬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에이사를 에델라이드 곁으로 돌려보내긴커녕 저렇게 보란 듯이 끼고 다니는 것만 봐도 에리스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게 얼마나 귀족 사회에 위협이 되는 일인지도.
카만의 영웅 에델라이드와 마찬가지로, 언젠가 에리스 멜킨 역시 역사 교과서 한 면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4세기를 살아 본 사람으로서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황제께서 대현자님과 멀리 떠나신다면, 제가 기꺼이 그 빈자리를 메워 드리리라 결심했는데.”
“넌 황위를 찬탈하겠다는 말을 고급스럽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혀에 금칠조차 안 하고 어떻게 이 각박한 제국에서 살아남겠어요. 우아하게 말하는 법을 모르면, 제 오라버니처럼 바닥을 구르게 되는 법이랍니다.”
내가 만약 ‘대현자’가 아닌 채로 에리스를 공의회 같은 데서 적으로 만났더라면 덤비기도 전에 얻어맞고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르커스는 참 인재 등용을 잘했다. 물론 이르커스 옆에 에리스를 데려다 놓은 건 나지만, 결국 에리스와 정치적으로 결탁한 건 이르커스였으니까.
이 여자…… 황제가 되면 어떨까?
슬슬 계속된 전쟁으로 소란스럽던 제국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르커스가 잘해서라기보다는 주변에 유능한 인간들이 많은 덕이었다.
에리스가 온갖 법률을 뜯어고치는 바람에 새롭게 등용된 사람들이 엉망으로 굴러가던 황궁 내부를 바로 잡는 데 크게 일조했다.
게다가 마탑이 박살 난 뒤,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마법사들이 이상한 연구를 벌인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둘 로베인 제국으로 돌아왔다.
과연, 충정이고 소속이고 나발이고 연구비 지원 받아서 재밌는 연구나 실컷 하기를 원하는 마법사들다웠다. 내심 법적인 규제도 많고, 젊은 마법사들을 노골적으로 착취해 왔던 마탑보다 제국에서 일하고 싶어 했던 마법사들도 많았을 것이다.
“영원히 황제 자리에 머무르는 건 독재나 다름없으니, 때가 되면 떠나야겠지.”
“흠, 막상 떠나신다니 아쉬운걸요.”
“입꼬리나 어떻게 하고 말해. 너 지금 함박웃음 짓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울 수는 없지 않겠어요? 제가 대현자님 앞에서 눈물지으면, 황제께서 다시는 대현자님과의 알현 기회를 주지 않으실 텐데요.”
“말은 잘하지.”
에이사가 에리스 옆에 붙들린 채로 “그럼 카만으로 오세요!” 하고 틈새 홍보를 아끼지 않았다. 미쳤는가? 카만에 끌려가면 에델라이드에게 붙잡혀 서류 작업이나 하게 될 텐데.
나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몇 년 안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누구에게든 황위를 물려주고 나면 나와 이르커스는 남쪽 숲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어떻게 긴 세월을 함께 살아갈지는 남쪽 숲에서 천천히 정해도 늦지 않다. 서두르지 않아도 될 만큼, 영생은 기니까.
“에리스.”
“너무 친근하게 부르시면 곤란한데. 그냥 멜킨 공작이라고 불러 주시겠어요? 전 삿된 질투를 사기에는 마음이 여려서.”
“진짜 얄밉다. 그래, 멜킨 공작.”
“예, 말씀하세요.”
“언젠가 정말 당신 혼자 후계를 얻게 된다면, 그 후계는 내가 축복해 줄게.”
그 말에 에리스가 까르르 웃었다. 매번 기품 있는 대귀족처럼 굴던 이가 이렇게 어린 마녀처럼 웃을 수 있다니.
에리스는 내 말이 뭐 그리 재밌는지 한참을 웃다가, 잔뜩 신이 난 얼굴을 숨기지 않은 채로 대꾸했다.
“좋아요. 그 약속, 기대하고 있을게요.”
????????????
“멜킨 공작이랑 무슨 대화했어?”
“다 엿들었으면서.”
“……안 그랬어. 당신이 싫어하잖아.”
“진짜?”
“앞부분만 조금 듣다 말았을 뿐이야.”
염탐하기 위해 마법 쓴 걸 뻔히 아는데, 이르커스는 눈만 도르륵 굴려 가며 거짓말을 했다. 마법사는 은밀 행동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제 내 제자가 받아들일 때가 됐는데.
“별거 아냐. 에리스는 그냥, 공작이 됐으니 그다음으로 황제를 꿈꾸는 거지. 참 대단한 인간이지 않니? 사람이 그렇게 하나의 욕망에 충실하기도 쉽지 않은데.”
“에리스가 아니라, 멜킨 공작이라고 불러.”
“이거나 저거나.”
“명백히 다르다고 생각해. ‘에리스’는 너무 친근하잖아.”
“넌 이르커스도 아니고, ‘이르’면서. 그걸로 만족하렴.”
이르커스는 날이 갈수록 의부증 증세가 심해졌다. 내가 전에 비해 타인에게 지나치게 친절하다는 게 이르커스의 주장이었다. 그야, 요즘은 아무나 전기로 안 지지고 다니니까 친절해 보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이르커스의 주장을 들은 한네만과 트리스탄은 마치 못 들을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귀를 틀어막았다. ‘아무나’에 들지 못한 덕에 종종 내게 낙뢰 세례를 받는 한네만이 나를 향한 ‘친절하다’는 표현에 특히나 치를 떨었다.
다 잘되라고 빡세게 굴리는 건데 한네만은 그것도 몰라준다. 내 덕에 한네만의 마법 실력이 얼마나 마법 실력이 일취월장했는데. 이래서 부모가 자식을 위해 애써 봤자 말년에 효도도 못 받는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손만 뻗어 이르커스의 금발을 느릿느릿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결 좋은 금발 때문에 ‘너, 그거 의부증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해’ 같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개 같지.”
“……그거, 욕이야?”
“아니, 귀엽다는 소리야.”
“날 귀여워하는 건 당신밖에 없을걸.”
“그야 네가 특별하게 여기는 상대가 나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이지.”
방금 대사는 내가 들어도 제법 도끼병 환자 같았다.
나는 괜히 내가 내 입으로 뱉은 말이 부끄러워져, 이르커스가 뭐라도 대꾸하기 전에 짧게 이르커스에게 입을 맞췄다.
황궁을 떠나기 전까지는 항시 조심하려고 했는데, 결국 내 결심은 늘 그래 왔듯이 죄다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내가 조심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르커스가 온몸으로 ‘대현자랑 나랑 연애 중이니까 간섭하지 마라’라는 티를 내고 다녔으니까.
귀족들이 이걸로 트집 잡을 정신머리가 남아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에리스가 그 명화 같은 얼굴로 귀족들이 싫어하는 모든 일을 다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원래부터 괴짜 정도로 치부되었던 황제의 남색은 공공연한 비밀 같은 게 되어 묻혀 버렸다.
이제 세간에서는 에리스의 행보를 보고 저 권력에 미친 인간보다는 차라리 얼굴도 잘 안 내비치는 대현자 쪽이 황제의 상대로 낫다는 소리까지 돌았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불길하게 여기는 대륙에서, 심지어 남자인 내가 낫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면 에리스는 정말 대단한 인간이었다.
이르커스가 자연스레 다른 생각 하지 말라며 내게 엉겨 붙어 왔다. 한두 번 받아 줬더니 부쩍 이런 스킨십이 늘었다. 커다랗고 순종적인 개를 잘못 훈련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그 커다란 몸을 구겨 내게 푹 안기려는 이르커스를 밀어내는 대신, 같이 팔로 꽉 끌어안았다.
전에 없던 만족감이 들었다. 그냥 다 내팽개치고 처음부터 이럴걸. 느슨하게 풀린 마음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동안, 이르커스의 손이 불쑥 내 로브 안으로 들어왔다.
“잠깐. 손이 불순한데.”
“로브가 벌어져 있길래.”
“단추는 언제 뜯어 먹었어?”
“방금.”
“야, 떨어져. 넌 너무 손이 빨라.”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게 차라리 안전하겠다.
나는 나른한 만족감을 느낄 새도 없이 후다닥 이르커스를 밀어냈다. 이르커스는 다시 비를 쫄딱 맞고 버려진 개처럼 늘어져 제 옷매무새나 가다듬었다.
스물아홉 살이면 한창이긴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내게 이런 자극은 너무 당황스러웠다. 이르커스는 내가 밀어낼 때마다 더 은근하게 재시도를 해 왔다. 덕분에 나는 두 배로 당황스러워졌다.
나라고 이르커스와 진도를 뺄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서로의 몸과 마음이 준비된 뒤에 뭐가 진행돼야 하는 거 아닌가? 유교 국가 출신으로서 반년도 안 사귀었는데 잠자리를 가지는 건 너무 이른 것 같았다. 거기다, 내가 너무 도둑놈이잖아.
“또 이상한 생각 했지.”
“이상한 생각은 내가 아니라 네가 했겠지. 안 되겠어. 너랑 단둘이 남으면 자꾸 분위기가 이상해져.”
내가 이르커스를 혼자 둔 채 자리를 뜨려고 하자, 이르커스가 재빠르게 내 팔을 붙잡았다. 더는 안 그럴 테니 그냥 안고만 있게 해 달라는 간곡하고 가련한 부탁이 따라왔다.
나는 이르커스의 손을 마법으로 결박한 채, 다시 그를 곰 인형처럼 껴안았다. 이르커스가 내 품에서 황제를 이런 식으로 결박하는 건 당신밖에 없을 거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나밖에 없어야지.
“다음 황제는 역시 에리스가 좋겠어. 마리아는 너무 심약한 구석이 있고, 네 백부라던 남자는 너무 나이가 많으니까.”
“귀족들이 또 사사건건 시비를 걸 텐데.”
“에리스가 그런 일에 눈 하나 깜짝하겠니? 넌 그 애가 얼마나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입에는 금칠을 했는지 알아야 해.”
“거슬려서 안 되겠어. 멜킨 공작 얘기는 그만해. 그리고 ‘에리스’라고 하지 말라니까. ‘멜킨 공작’이라고 해.”
진지하게 타인의 이름과 신분을 짚고 넘어가는 이르커스를 보니 황당해서 웃음이 샜다.
이럴수록 더 놀려 주고 싶다는 걸 모르는 눈치다. 에리스 멜킨도 자기를 ‘멜킨 공작’이라고 불러 주길 원했으니, 어찌 됐든 그녀 앞에서는 격식을 갖춰 호명할 예정이지만.
“그래, 좋아. 멜킨 공작에게 황위를 넘기고 나면 우린 자유야. 속세를 내다 버리고 다시 남쪽 숲으로 들어가서, 거의 온실이 돼 버린 우리 아틀리에를 다시 돌봐야겠어.”
“거기선 귀족이 아니라 데인이 난리겠는데.”
“걔가 뭐 어쩔 건데. 아틀리에를 새로 짓고, 창고도 좀 정리하고…… 그리고 우리가 같이할 일들을 천천히 계획해 보는 거지. 내 미래 계획이 어때?”
“지금까지 들었던 당신의 미래 계획 중에 제일 좋다고 생각해. 최고의 계획이고.”
“그리고?”
“역시 대현자다워.”
이르커스가 내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작게 웃었다.
닿는 숨 때문에 가슴이 간지러웠다. 이르커스가 이렇게 편안하게 웃는 건, 나도 몇 년 만에 처음 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