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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101화 (101/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101화

    어린 드래곤이 내게 건넨 목걸이는 안에 물건을 넣어 둘 수 있는 로켓 형태였다.

    힘으론 도통 열리지 않던 목걸이가 마나를 주입함과 동시에 달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비비가 죽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꽤 구닥다리가 된 물건임에도 여전히 새것 같았다.

    그 안에는 검은 비늘이 하나 들어 있었다. 아마도 비비의 비늘이겠지. 나는 괜한 감상에 젖었다. 한때는 비비의 불 뿜기 공격에 대현자 통구이가 될 뻔한 적도 있지만, 그래도 돌이켜 보면 그나마 연령대가 맞아 친구라고 할 만한 상대였다.

    “그거 버리면 안 돼?”

    “이거? 야, 드래곤 비늘이 얼마나 귀한데. 걔네 성격 더러워서 바닥에 떨어진 비늘도 못 주워 가게 한다고.”

    “…….”

    “그리고 따지자면 친구 유품인데 어떻게 버려? 알뜰살뜰 써먹어야지.”

    “그 새끼…… 아니, 드래곤은 당신을 친구라고 생각 안 했잖아.”

    드래곤 비늘 하나로 마도구 몇 개를 만들 수 있을지나 생각한 나와 달리, 이르커스는 비비가 내게 남긴 목걸이가 지지리도 마음에 안 든 모양이었다.

    사실, 질투할 줄은 알았다. 티를 워낙 내야 말이지. 나도 가끔 에리스 멜킨에게 불쑥 이상한 감정이 드는데, 이르커스처럼 의부증 의심 증세를 보이는 인간이야 말할 것도 없을 테다.

    그래서 일부러 목에 걸지도 않았던 건데, 이르커스는 미착용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아 보였다.

    “목걸이라면 내가 몇 개든 새로 줄 수 있어.”

    “걸리적거리니까 장신구 같은 건 안 하고 다닐 거야. 이제 마법 능력도 돌아왔으니 마도구도 필요 없고.”

    “그럼 그 목걸이, 그냥 버리자.”

    “어허.”

    “…….”

    “자꾸 어린애처럼 굴지.”

    ‘어린애’라는 표현에 이르커스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나보다 모든 게 다 큰 이르커스를 애라고 표현하는 건 내게도 우스운 일이지만, 스물아홉 살도 따지자면 내겐 핏덩이라 별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은 어린애랑 키스해?”

    “뭐?”

    “내가 스물아홉이 아니라 백 살이 돼도 어리다고 할 거면서.”

    그야, 나랑 비교하면 어리니까 당연하지.

    나는 꼰대다. 이건 내가 수재인 것만큼이나 적확한 사실이다. 누구든 4세기쯤 살고 나면 꼰대가 된다. 공자도 나보다 연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르커스가 ‘당신’이나 ‘유안’이라고 나를 지칭하지 않고 ‘너’라고 부르기만 해도 나의 꼰대력은 빛을 발해, 이르커스에게 ‘스승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라는 유교 발언을 뱉어 낼 것이다.

    게다가 저렇게 눈에 띄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데, 어떻게 애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조금 황당해져서 나도 모르게 반격했다.

    “그럼 우리 키스하지 말까?”

    “…….”

    “농담이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상처 주기 싫은데 괴롭히는 건 즐겁다니,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내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이르커스가 우습고 귀여워서 괜히 마음이 간지러웠다.

    제국의 황제고, 이제는 나와 같이 영생을 공유하게 됐으니 무서울 게 없는 주인공이 고작 ‘키스하지 말까?’라는 질문에 동요하기나 하고.

    “질투할 필요 없어. 난 비비가 죽은 뒤에도 잘 먹고 잘살았거든. 오래 알고 지냈던 친구가 죽었으니 잠깐은 울적했지만, 걜 죽인 트리스탄의 스승에게 복수하지도 않았고 다른 드래곤을 찾아가지도 않았어.”

    “…….”

    “하지만 만약, 네가 죽었다면 난 못 먹고 못 살았겠지. 죽지는 못했겠지만, 살아 있어도 사는 것 같지 않았을 거야. 네가 살해당했다면 나는 그게 인륜지사에 반하는 일일지라도 널 위해서 복수하고, 널 기억하는 모든 이를 찾아가서 네가 이 세상에 남긴 아주 조그마한 조각이라도 주워 담고 싶어 했겠지.”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비비가 남긴 목걸이는 착용하지 않으면서, 이르커스가 준 반지는 끼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을 텐데. 아무튼, 내 어린 제자는 질투가 너무 많은 것과 비례하게 나 못지않게 의심도 많았다.

    “난 비비가 아니라 널 사랑하는 거야. 예카리나를 아무리 존경해도, 한네만을 아무리 귀여워해도…….”

    “…….”

    “내 최우선 순위는 널 만난 이래로 항상 너였어.”

    내가 죽기 위해 이르커스를 이용하려고 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나는 신처럼 말할 줄 아는 대현자였고, 삶에 지쳐 있었으며, 언젠가 죽는 인간에게 정을 주면 안 된다고 끊임없이 되새김질했다. 오랜 잠에 들었다 깨어나면 알던 사람들은 전부 죽어 사라졌고, 내가 알던 세상은 언제나 쉽게 변했으니까.

    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한 번 본 것만으로 교과서를 달달 외우는 천재들을 따라갈 수 없었다. 성격도 나쁘고, 겁도 많다. 포식자 앞에서 덩치를 불려 저항해 보려는 피식자처럼, 대단한 척 허세를 부리고 다니지만 실제로는 마음도 약하다.

    그걸 전부 알기 때문에 내가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사랑하는 상대를 상처 입힌다. 나는 그런 족속이다.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죽지 않는 존재라는 걸 제외하면 결국 하찮은 인간으로 타고난 존재.

    그래서 영생을 견딜 수가 없었다. 죽고 싶다고 소리치지 않으면 이 지지부진한 삶을 제정신으로 견뎌 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내가 죽으면 이르커스가 죽게 될지도 모르니까. 고작 우리가 같은 영생을 공유하게 됐다는 사실만으로 죽음에 대한 갈망이 이토록 간단하게 사라지다니. 몇 세기 동안 못 죽어서 안달이었는데, 지금은 ‘죽음’의 지읒 자도 생각나지 않다니. 정말이지, 사람 마음도 이렇게 변덕스럽다.

    이르커스가 날 한 팔로 끌어안았다.

    세상 모든 건 변한다. 이건 확실한 사실이다. 내 마음 하나도 이렇게 쉽게 변하는데, 다른 것이라고 영원할 리 없다. 아이는 금세 자라 어른이 되고, 종교는 알력 다툼에 따라 바뀌며, 영원할 것 같던 권력 구도 역시 영웅의 등장에 따라 전복된다.

    하지만 지금 날 끌어안고 있는 이 팔 만큼은, 어쩌면 영원하지 않을까?

    그는 내 주인공이고, 나는 그의 세계니까.

    ????????????

    [유안에게.]

    사밀라가 떠나기 전, 남기고 간 편지를 드디어 꺼내 읽었다.

    뭐가 힘들거나 괴로워서 읽는 건 아니었고, 혹시 사밀라는 쥬리아의 거짓 저주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의심이 들어 편지를 꺼내 든 것이다.

    [넌 정말 바보야.]

    사밀라와 테리즈 펄번이 언제 이렇게 비슷한 족속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둘 다 편지로 내 속을 긁는 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영생 저주에 걸려 놓고 저주의 기본 조건도 다 까먹은 거니? 하기야, 넌 마법사니까 마녀처럼 축복이나 저주를 걸 일이 없지.

    쥬리아는 그냥 너희가 너무 짜증이 났던 것뿐이야. 결론이 나야 우리가 떠날 수 있을 텐데, 너는 겁이 너무 많잖니. 몰아붙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충격을 주고 싶었던 거야. 너희가 오죽 답답했어야지.

    이 편지를 읽고 있을 쯤에는 이미 깨달았을지도 모르지만, 쥬리아는 이르커스에게 어떤 저주도 걸지 않았어. 말이나 되니? 원격 저주라니. 그건 너의 ‘예카리나’가 살아 돌아와도 못 할 일이야.]

    역시 알고 있었구나.

    나는 끝까지 말은 안 해 주고 편지로만 이 사실을 남기고 떠난 사밀라를 살짝 원망했다. 덜 쪽팔리게 미리 좀 말해 주지! 영생 불멸자에게 흑역사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하지만, 그 원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밀라의 필체는 본인이 꾸미고 다니는 것처럼 무척 화려했고 장식적이었다. 뚝뚝 끊어지고 굽은 곳이 많은 테리즈의 필체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러나, 그 다른 필체 사이로 익숙한 다정함이 느껴졌다. 속을 박박 긁고, 좋은 내용은 별로 없지만, 그럼에도 느껴지는 나에 대한 미묘한 호의.

    [나는 네가 아주 행복했으면 좋겠어. 비록 쥬리아와 나는 수명이 다해 곧 죽을지언정, 너와 이르커스는 네 말을 빌리자면 그 ‘끔찍한 영생’을 함께 살아가야 하잖니.

    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네가 그 긴 세월을 외롭지 않게 보내길 바랐어. 넌 틱틱거리는 것치곤 참 다정한 대현자니까!

    그러니, 위대한 마녀답게 대단한 축복을 줄게. 실효성 있는 축복은 아니겠지만, 넌 이 편지에 담긴 내 애정과 기원을 느낄 수 있을 거야.

    마녀는 예언 같은 거 못하지만, 나는 어쩐지 네가 영원히…… 아주 영원히, 행복할 것 같아.]

    원격 저주는 예카리나가 살아 돌아와도 못할 거라더니, 자기는 원격으로 축복을 보낸다. 자기 말처럼 참으로 위대한 마녀가 아닐 수 없다.

    이르커스와 한 핏줄을 공유하고 있어 이르커스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거라고 생각했던 마녀들이 사실은 내 행복을 바라고 있었다니. 언젠가 진담처럼 내가 원하면 마녀로서 모든 걸 걸고 날 죽여 주겠다던 사밀라의 말이 떠올랐다.

    결국, 사밀라는 이르커스의 손을 들어 주었다. 내 ‘죽여 줘’보다 ‘사랑은 멋져!’ 타령이 심한 사밀라니, 당연히 날 배신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아마 나와 약속한 그 순간에는 사밀라 역시 진심이었을 것이다. 내가 이르커스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죽고 싶다는 마음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접지 않았다면, 사밀라는 나와의 약속을 지켰을지도 몰랐다.

    내가 어차피 찰나라고 생각하며 흘려보냈던 많은 인연이 떠올랐다.

    스쳐 지나갈 것이라고 해서, 내 영생을 오래 기다려 주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 하찮은 건 아니었다. 그 순간에 맺은 관계는 언제나 허상이 아니라 진짜였고, 그들이 죽어 사라진다고 내게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까.

    편지를 접어 로브 안으로 밀어 넣었다. 테리즈가 남긴 편지와 함께 가능한 오래 사밀라의 편지도 보관해 두고 싶었다.

    세월이 흐르면 종이가 닳고, 글자가 날아가 그저 종이 쪼가리가 되어 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사밀라가 내게 남긴 축복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지는 않을 테다.

    세상 모든 건 너무 쉽게 변하고, 삶은 아주 가끔만 즐겁고, 대체로 지긋지긋하다.

    그럼에도 정말 가끔은 죽고 싶다는 생각보다 제대로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대현자는 이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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