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100화
난 쓰레기 새끼다.
나름대로 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애쓴 결과가 제자의 눈물이라니.
다시 말하지만, 나는 정말 재활용 불가능한 쓰레기다. 타는 쓰레기도 되지 못했다. 바닷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플라스틱도 북극곰은 울릴지언정 이르커스를 울리진 않을 거라는 점에서 나보다 나을 수도 있었다.
“울렸네.”
“……진짜?”
“현실을 자꾸 부정하지 마. 네가 울렸잖아.”
내가 건 침묵 마법을 자력으로 해제한 어린 드래곤이 검은 눈동자를 도르륵 굴려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저거 어떡해?’라는 시선이었다.
그렇게 쳐다본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반의반 정도는 이 드래곤의 탓이었다. 지금은 남 탓을 좀 해도 된다.
나는 어린 드래곤과 함께 어쩔 줄 모르는 상태로 우는 이르커스만 바라보았다. 조각 같은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걸로 봐서…… 나는 여전히 쓰레기였다.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잔인해?”
우느라 잠긴 목소리로 이르커스가 내게 질문했다. 그 질문에 답할 말이 없었다. ‘잔인하다’는 표현을 부정할 수가 없어서.
알면서도 외면한 세월만 벌써 17년이었다. 열두 살 때부터 스물아홉 살까지, 나는 이르커스의 감정을 모르는 척했다. 내가 이르커스를 향해 느끼는 애정 역시 최대한 외면해 오지 않았던가.
그를 사랑한다는 걸 인정하고, <이르커스의 서>에 대해서 말해 주기까지 했으면서 한편으로는 여전히 이르커스를 믿지 않았다.
언젠가 너도 변하겠지. 내 곁을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존재처럼 이르커스 역시 달라지리라고 생각했다. 쥬리아의 저주가 사라지면, 긴 생애 동안 내가 아닌 누군가를 더 사랑하게 될 거라고. 그간 너무 많은 것이 찰나처럼 스쳐 지나갔으니까.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만 들으면 그걸로 만족하고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안 돼. 저주든 계약이든, 가리지 않고 쓰는 한이 있더라도 붙들고 싶어.”
“이르, 난 널 떠나지 않아.”
“거짓말.”
“…….”
“나는 언젠가 당신을 떠날 거라고 생각하면서?”
감정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는데, 그 이후에도 이런 시련이 주어진다. 나도 모르게 내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어렴풋하게 피 맛이 돌았다.
미래를 대비하는 건 내 습관이었다.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평범한 습관.
이게 안 되면 저걸 하고, 저게 안 되면 또 다른 길을 만들어 둔다. 끊임없이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에서 태어났으니 계속해서 새로운 방향성을 찾고, 잘못 흘러갈 것을 대비해 시작도 전에 대안을 내놨다.
사람과 관계 맺는 일에서도 이 습관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르커스와 영생을 함께 살아갈 것을 꿈꾸는 한편으로, 나는 기민하게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했다. 버려질 경우의 수, 서로가 어긋날 때의 경우의 수, 이르커스가 언젠가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경우의 수…….
“……겁이 났어.”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속으로야 내가 쓰레기라는 걸 수백 번도 넘게 인정했지만, 나를 사랑하는 제자 앞에서 내가 ‘대현자’라는 칭호에 어울리지 않는, 하찮고 속 좁은 인간에 불과하다는 걸 인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한때는 신처럼 말할 줄 알았던 내가, 그 앞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넌 한참 어리고, 아름답고, 나도 사랑할 수밖에 없던 상대니까.”
“…….”
“언젠가 다른 누군가가 너를 사랑하겠지. 그러면 네가 이렇게 답답한 나를 계속 사랑해 줄까? 너랑 내 속도가 달라서, 내가 널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하게 됐을 때 네가 내게 질리면 어떡하지. 난 그런 게 겁이 났어.”
“그럴 일 없다는 거 알잖아.”
“아니. 이 세상에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불멸자답지 않은 불안이다. 썩어 넘치는 시간을 찰나나마 연애로 낭비한다고 손해 보는 것도 없을 텐데. 그 사랑이 아무리 지독했다고 한들, 변해 버린 것은 기억 저편에 묻고 다시 죽음이나 갈망하면 그뿐일 텐데.
하지만 초연해질 수가 없었다. 대현자가 아니라 처음 이 세계에 떨어져 멋모르던 노예 시절일 때처럼 안달이 나고 불안하기만 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는데, 그 이후가 더 겁이 난다는 건 정말 아이러니였다.
“쥬리아가 네게 저주를 걸었어. 네 결혼식 날이었고.”
밑바닥을 다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별수 없었다. 이르커스의 우는 얼굴 앞에서 비밀을 완벽하게 지키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내가 결혼 선물로 널 축복해 달라고 하니까, 쥬리아가 싫다며 네게 저주를 걸었어. ‘살아 있는 한 영원히 대현자를 사랑하도록’.”
“……의미 없는 저주야.”
“그 저주 내용을 듣고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 왜인 줄 알아?”
“…….”
“말로는 강제성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그런 안전장치가 있기를 내심 바랐거든.”
사랑은 정말 추악한 감정이다.
나는 예카리나가 다윈에게 헌신하다 죽는 걸 두 눈으로 봤다. 그녀의 핏줄을 이어받은 마녀들 역시 높은 확률로 잘못된 사랑을 답습했다. 마녀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사람들은 대개 변심했고, 영원을 이야기하던 상대는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곧바로 배신했다.
너무 많은 사례를 보았고, 바로 옆에서 경험했다. 아름다운 사랑을 하겠노라고 들떠 말하는 어린 마녀들을 마주할 때마다 입맛이 썼다. 영원한 건 내 목숨밖에 없고, 아름다운 것은 모두 변색하기 마련이라고 잔소리를 늘어놓고 싶었다.
그런 내가 결국 예카리나가 흘린 말처럼 이르커스에 대한 사랑을 인정하고 만 것이다.
나만큼은 절대 하지 않으리라고 수도 없이 다짐했던 사랑을. 불멸자로서 필멸자를 사랑하게 될 리 없으니, 겪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던 그 감각을.
“마법 계약 없이도 난 널 떠나지 않을 거야. 쥬리아가 네게 남긴 저주도 해주하고 싶고.”
“…….”
“어쩌면 영원히 네가 변심할 거라는 불안에 휩싸여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지. 너도 내게 같은 걸 느낄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안전장치를 없애지 않으면 총은 절대로 발포되지 않는다.
계약과 저주로 묶인다면 모든 게 간단명료해진다. 이르커스는 내내 나를 사랑할 것이고, 나 또한 설령 마음이 변한다고 하더라도 이르커스의 곁을 떠날 수 없게끔 마법 계약이 우리를 구속할 테니까.
하지만, 그게 정말 사랑이긴 한가?
그건 결국 ‘추악한 사랑’에서 ‘추악한’만 남은 관계가 될 것이다. 상대를 옆에 억지로 묶어 두는 게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나는 이미 4세기 전에 아주 가까이에서 확인했다.
“유안,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아.”
눈가가 붉어진 채로 입을 다물고 있던 이르커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젠가 꽃이 져 버린다고 정원에 발조차 들이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굴잖아.”
“…….”
“정원사가 아무리 그 정원에는 유리 장미만 있어서 시들 일 없다고 말해도 믿지 않을 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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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축복이나 저주가 완벽하게 성립되기 위해선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 마녀가 대상의 이름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둘, 마녀와 대상이 물리적으로 접촉한 상태여야 한다. 손을 붙잡거나, 최소한 손끝이라도 닿아 있어야만 축복이나 저주가 실현된다.
셋, 마녀가 감당할 수 있는 종류의 축복이나 저주여야 한다.
한유안은 축복을 가장한 영생 저주에 걸린 지 너무 오래된 탓에 이 세 가지 조건을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
오히려 이 조건을 바로 기억해 낸 것은 한유안이 아니라 이르커스였다. 따지자면 이건 수재와 천재의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유안이 곧잘 말하는 대로, 수재에게는 기억력에 한계가 있으니까.
쥬리아는 이르커스에게 저주를 걸 수 없다. 적어도 이르커스를 대상으로 한 저주를 걸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쥬리아는 이르커스와 손끝조차 닿아 있지 않았으므로.
게다가 ‘살아 있는 한 상대를 영원히 사랑하도록’ 만드는 저주는 쥬리아가 감당할 수 있는 저주도 아니었다. 그러니, 첫 번째 조건을 제외하면 그 외 모든 조건 미달로 쥬리아의 저주는 성립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한유안은 이르커스에 대한 일이라면 이지가 흐려져,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쥬리아는 애초에 귀찮게 저주를 걸 생각이 없었고, 그저 사밀라와 저를 붙들어 놓은 채로 세월아 네월아 결말을 내지 못하는 한유안과 이르커스에게 그런 식으로 짜증을 부렸을 따름이었다. 쥬리아 역시 사밀라와 한 핏줄이니만큼 괴팍한 구석이 있었다.
“애초에 저주가…… 없다고?”
“그래. 너희 둘한테 같은 축복이 느껴지긴 하는데. 불로불사의 축복 말이야.”
“그거 말고 정말 없어?”
“그렇다니까?”
“네가 허접 드래곤이라 못 느끼는 게 아니고?”
“열 받네?”
어린 드래곤이 진짜냐며 여러 번 저주 여부에 대해 캐묻는 한유안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같잖은 위협이었음에도 이르커스는 곧바로 드래곤에게 검을 겨눴다.
“기껏 부탁을 들어줘도 이런다니까. 이래서 인간들이 싫어.”
“인간들도 아마 드래곤을 썩 좋아하진 않을 거야.”
“흥, 한날 미물 주제에 위대한 드래곤을 싫어해 봤자지.”
어린 드래곤답게 참으로 철없는 소리였다. 한유안이 쥬리아의 저주가 페이크였다는 사실에 충격 받아 자기가 지껄인 말들을 주워 담고 싶어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무조건 한 소리 했을 만한 발언이기도 했다.
이르커스는 처음부터 쥬리아가 제게 저주 따위 걸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 눈만 깜빡였다. 작게 “그래서 내가 의미 없는 저주라고 했잖아.”라고 속삭인 게 전부였다.
“그럼…… 전에 내가 저주에 대해서 한 말은 잊어, 이르커스.”
“……싫어.”
“스승 말을 좀 들어라.”
“평생 기억하고 살 거야.”
유치한 티격태격이 이어졌다. 방금까지 울리고 울었던 사람들이 나눌 만한 대화는 아니었다.
그 꼴을 옆에서 지켜보던 어린 드래곤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상한 인간한테 코가 꿰여 반려 없이 죽은 ‘그분’의 넋을 위로하려고 했는데, 이미 그 이상한 인간에게 다른 반려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제멋대로 사는 드래곤들이라고 해도, 남의 애인을 가로채서 죽은 드래곤과 짝을 맺어 줄 만큼 무뢰한은 아니었다.
“원래라면 내 레어를 박살 낸 값을 그 목숨으로 갚아야 할 테지만…….”
“못 죽어서 못 갚는데.”
“……둘 다 목숨으로 갚기는 글렀으니 금은보화로 갚도록 해.”
“웃기지 마. 네 레어 박살 낸 거 너잖아.”
“6할 정도는 너희 책임이거든?”
이미 엉망인 레어 안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이르커스는 자연스레 팔을 뻗어 유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드래곤 입장에서는 우스울 정도로 상대를 경계하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유안은 드래곤과 손해 배상 싸움에 정신이 팔려, 이르커스가 제 가까이 붙었다는 걸 바로 눈치채지도 못했다.
어린 드래곤은 조금 황당해졌다. 어쩌다 사랑싸움에 참관하게 된 거지? 그간 트리스탄과 사밀라, 한네만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같은 의문을 느꼈다는 건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마법 계약이고 뭐고 다 필요 없는 거 맞지?”
“어어.”
“그럼, 다시는 찾아오지 마. 어휴, 인간 안 나오는 레어 새로 구해야지. 아주 지긋지긋해.”
자기가 한유안을 구류하고 있던 탓에 이 난리가 났다는 걸 잊어버린 채, 잔뜩 투덜거린 어린 드래곤이 이거나 가지고 가라며 목걸이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그분’께서 남긴 인간의 장식품.”
“비비 거라고?”
“인간이나 쓸 만한 물건이니, 너 주려고 가지고 계셨던 거겠지.”
한유안은 얼떨떨하게 그 목걸이를 받았다. 그리고 이르커스는 거의 눈빛만으로 그 목걸이를 태워 버릴 것처럼 바라보았다.
연애 상대가 세기 단위로 연상이니, 연적을 죽일 수도 없었다. 다들 이미 죽어 버렸으니까.
하지만, 역설적으로 생각하자면 ‘영원히’ 한유안 곁에 남을 사람은 이제 이르커스뿐이었다.
이미 죽은 놈들이 저승에서 대체 뭘 할 것인가? 한유안이 아무리 과거의 누군가를 특별하게 여겼고, 얼마나 아꼈든 간에 앞으로 유안의 영생을 함께할 상대는 오로지 이르커스 하나였다.
결국, 이르커스 사크리나 로베인은 주인공답게 진정한 승리를 거머쥐었다. 꽃이 지는 게 무서워 정원에 발 들이지 않겠다는 사람 품에, 절대 시들 일 없는 유리 장미를 한가득 안겨 주는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