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99화
“혹시, 쟤가 황궁에서 기다린다던 표범 같은 제자?”
“야, 그걸 말하면 어떡해.”
“왜? 네가 ‘파기할 수 없는’ 마법 계약 시늉만 해 달라고 한 건 아직 안 말했잖아.”
방금 말했잖아, 미친놈아…….
나는 진짜 울고 싶어졌다. 이르커스가 눈으로 ‘너 내가 그럴 줄 알았다’ 하고 나를 욕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어린 드래곤은 제법 능숙하게 이르커스의 검을 막아 냈다. 어리더라도 드래곤은 드래곤인 것이다. 나는 고래 싸움에 휘말려 새우 등 터지지 않게 거리를 두고 선 채로 한숨만 푹푹 쉬었다.
비비가 날 자기 동족들한테 뭐라고 설명했는지 몰랐다는 게 내 첫 번째 실수고, 드래곤은 영혼결혼식 같은 결혼 문화가 있다는 걸 이제 알았다는 게 내 두 번째 실수다. 마지막으로 드래곤의 관점이 인간과 무척 달라, 비밀이라곤 지켜지지 않는다는 거다. 이게 제일 문제였다.
이로써 나는 이르커스에게 감금의 빌미만 잔뜩 제공하고 말았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마음 같아선 최대 출력으로 대치 중인 두 사람에게 낙뢰를 치고 남쪽 숲으로 피신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진짜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당장 저 둘을 기절시킨다고 하더라도, 깨어나면 날 지옥까지 쫓아올 게 뻔했으니까.
나는 마음속으로 예카리나와 비비를 애타게 찾았다. 너희 후손들, 아무래도 진짜 또라이 같아. 내게 답할 수 없는 망자 둘에게 열심히 텔레파시를 보냈다. 물론 난 죽지 않지만, 아무튼 살려 줘…….
레어 안의 기물들이 싹둑싹둑 썰려 나가는 광경이 참으로 장관이었다. 이르커스와 어린 드래곤은 제법 접전을 펼쳤지만, 이르커스가 마법을 함께 쓰기 시작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누군가를 응원할 만한 상황이 아님에도, 마법과 검을 제 몸처럼 다루는 이르커스를 보고 있자니 아주 기특했다. 언제 이렇게 훌륭한 마검사로 자랐는지. 누구 제자인지 공격 마법도 저렇게 잘 쓰고.
“대현자! 당신 제자 좀 말려 봐!”
“네가 그냥 항복하면 되잖아.”
“싫어! 그럼 그분의 반려가 되지 않을 거잖아.”
“……반려?”
기특함이 어떻게 30초를 못 가냐.
나는 어린 드래곤을 향해 다시 한번 ‘그걸 말하면 어떡해’라는 의미가 담긴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인간관계에 대한 지식이 들어 있을 리 만무한 드래곤 뇌는 내 시선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반려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어어, 신경 안 써도 돼. 그냥 드래곤식 헛소리야.”
“헛소리라니? 그분과의 신성한 영원의 혼인을……!”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드는 어린 드래곤을 향해 마나를 잔뜩 끌어와 침묵 마법을 걸었다. 진작 이럴걸.
인간 형태로 말이 나오지 않자, 드래곤 모습으로 다시 돌아간 그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온몸으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놈이 입을 열게 두면 안 된다는 걸 깨우쳤기 때문에 침묵 마법을 해제해 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방금까지 드래곤과의 전투로 살기 등등한 이르커스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 레어가 다 무너지도록 드래곤 형태로 굴러다니는 어린 드래곤보다, 설명을 요구하며 날 뚫어져라 바라보는 이르커스 쪽이 백 배는 더 무서웠다.
그냥 황궁에서 얌전히 감금당하고 있을걸. 그랬더라면 문제가 이렇게 커지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후회해 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그 시점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한들 나는 또 탈출을 감행할 게 뻔했다.
“‘반려’와 ‘시늉’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
“말해 줄 거지?”
검을 도로 검집에 밀어 넣고, 흐트러진 금발을 정돈한 이르커스가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좆됐다는 걸 직감했지만, 인제 와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어. 말해 줘야지, 그럼.”
아무래도 감금 엔딩 확정이다.
????????????
내가 비비를 처음 만난 건 벌써 백 년도 더 된 일이다.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대륙 탐험을 하던 중, 남의 레어에 지금처럼 무단 침입했던 내가 비비가 쌓아 놓은 금은보화를 조금 챙겼다가 싸움이 난 게 시작이었다.
말이 싸움이지, 내가 일방적으로 털렸다.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불 뿜는 드래곤한테 처맞고 진작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불에 좀 지져진 걸로 죽지 않았고, 그 덕에 비비는 나를 아주 신기한 생물로 여겼다.
드래곤이 강하다는 걸 체험한 뒤로 비비에게 두어 번 정도는 나 좀 죽여 달라고 사정하기도 했다. 당시에 한창 힘든 불멸자 라이프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강한 상대만 만나면 죽여 달라고 안달복달이었다.
비비는 처음에야 그런 나를 죽여 주기 위해 노력하다가, 나중에는 내게 정이 들었다며 그냥 자기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자고 했다.
미친 용 소리였다. 내가 아무리 영생을 사는 인간이라지만, 드래곤이랑 어떻게 가정을 꾸린단 말인가? 고양이와 결혼하겠다는 현대인과 다를 바 없었다.
칼 같이 거절했지만, 비비는 내가 그냥 앙큼하게 한번 튕겨 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래서 드래곤들이란…… 자기가 내게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은 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친구 블랙 드래곤은 트리스탄의 스승에게 목이 잘렸다.
“그게 다야.”
“너무 슬픈 이야기야. 드래곤 슬레이어 놈들…… 사돈의 팔촌까지 멸족시켜 버리겠어.”
“걔가 먼저 레어 확장하겠다고 인간 마을 하나 날려 버렸다니까?”
“그분은 그러실 수 있어! 레어가 좁으셨나 보지!”
나는 다시 어린 드래곤에게 침묵 마법을 걸었다. 그래도 되긴 뭐가 돼. 공룡보다 간지 나면 뭐 하냐, 말이라곤 하나도 안 통하는데.
이건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 체계의 차이로 인한 소통 불능이다. 나는 비비와 나의 추억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도 조잘거리는 어린 드래곤과 달리, 별말이 없는 이르커스의 눈치를 봤다.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은데, 묘하게 조용했다. 물론 원래도 구구절절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생각에 잠긴 얼굴에 시름이 가득한 걸 보니 비비와 나의 우정 스토리를 원만하게 이해해 줄 것 같진 않았다.
“‘반려’는 이제 됐고, ‘시늉’ 얘기도 마저 해 줘.”
“아, 그거? 그거 별거 아냐.”
“그건 내가 들어 보고 판단할게.”
이거 말했다간 꼼짝없이 붙잡혀 살 것 같은데.
나는 아주 잠깐 갈등했다. 쥬리아의 저주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이르커스는 살아 있는 한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수백 년 동안 한결같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나는 가능하다면, 쥬리아가 열 받아서 걸어 놓은 그 저주를 해주할 생각이었다.
마침 드래곤을 방문한 김에 해주 방법에 관해 물어볼 생각이기도 했다. 마녀의 저주는 보통 해주가 어렵지만, 영생 저주만큼 강력한 건 아닐 테니 드래곤이라면 방법을 알 터였다.
그러니 쥬리아의 저주가 사라지고 나면, 이르커스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영생 사는데 평생 나만 보고 산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뇌과학적으로 사랑의 유효 기간은 반년이라니까. 반년마다 상대에게 새롭게 반하지 않는 이상 영원한 사랑이 가능할 리가 없다.
“이르, 화내지 말고 침착하게 들어 봐.”
“…….”
“영생을 사는데, 네가 어떻게 나만 사랑하겠어.”
이르커스 대신 옆에서 버둥거리던 어린 드래곤이 입을 쩍 벌렸다. 독이 있을 것처럼 날카로운 드래곤의 치아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렇게 놀라는 걸 보니 이 어린 드래곤은 내가 비비 말고 내 제자와 걸쩍지근한 관계라는 사실을 방금 깨달은 모양이었다.
나를 향해 배신감 서린 시선이 쏟아졌다. 덕분에 나는 두 배로 피곤해졌다.
“만약 네가 나 말고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는데 나와 파기할 수 없는 마법 계약으로 묶인다고 생각해 봐. 너나 나나 얼마나 곤란하겠니?”
“……왜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멋대로 상상하고 대비하려는 거야?”
“그래야 나중에 충격을 덜 받을 거 아냐.”
이르커스가 두통이 이는지 자기 이마를 짚었다. 입 모양을 보니 작게 욕을 내뱉은 것도 같았다. 내가 비상 탈출해서 도망을 가도 욕설만큼은 내뱉지 않았는데, 어지간히 열이 오른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법 계약을 또 맺는 건 합리적인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나는 이르커스를 먼저 떠날 생각이 없다. 잠깐의 불안과 걱정으로 다가올 미래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덜컥 계약을 맺는 건 손해였다.
“당신은…….”
“…….”
“나한테 대체 왜 그래?”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감정이 역류하는 것처럼, 이르커스의 잠긴 목소리가 내 귓가를 맴돌았다.
“왜 항상, 당연히 내가 변하고 떠날 거라고 생각해?”
“그건…….”
“날 사랑한다면서…….”
화를 내거나 짜증부터 부릴 줄 알았는데, 이르커스는 제 손에 얼굴을 파묻고 긴 호흡만 내뱉었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꼭 우는 것처럼 보였다.
손을 뻗어 이르커스가 울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이르커스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힘없이 내게 잡힌 손목 탓에 잘생긴 얼굴이 도로 드러났다.
젖은 눈가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보였다. 어떡해. 진짜 울잖아.
“뭘 어떻게 해야, 내 옆에 있어 줄 거야?”
나는 기어코 이르커스를 울리고 말았다. 전부 내 잘못이었다. 다른 손으로 이르커스의 젖은 뺨을 쓸어 줬지만, 한번 넘쳐흐르기 시작한 감정은 쉽게 그칠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