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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98화 (98/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98화

    드래곤을 처음 봤을 때, 내가 했던 생각은 ‘공룡보다는 간지 난다’였다.

    두려움이나 압도감 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어린 시절, 엄마 손을 잡고 공룡 박물관을 두 번 이상 방문해 봤으니까.

    어려서는 나름 천재인 척해 보려고 기를 쓰고 공룡들의 이름을 다 외우려고 애쓴 적도 있었다. 결국, 내가 이름을 기억하는 것보다 공룡에 대한 흥미가 식는 게 더 빨랐던 탓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저기.”

    “응?”

    “지금 며칠이나 지났지?”

    “글쎄. 우린 인간처럼 날짜를 세지 않아서.”

    사흘 만에 드래곤을 찾아낸 것까지는 좋았다. 탐색 마법은 역시 최고다. 마법 없이는 몇 달이 걸릴 일도 마법만 쓸 수 있으면 아주 속전속결로 해치울 수 있으니까. 역시, 판타지 세계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마법이다.

    내가 찾아낸 드래곤은 아직 어린 블랙 드래곤이었다. 당연히 이름은 없었고, 내게 인간식 이름으로 불리는 걸 원하지도 않았다.

    다들 인간과 접촉을 피하려고 어찌나 꼭꼭 숨었던지 이 어린 블랙 드래곤을 제외하면 다른 드래곤들의 레어 위치는 찾을 수조차 없었다.

    남의 레어에 초인종도 안 누르고 걸어 들어갔으니, 인간과 그간 접점이 없었을 어린 드래곤이 질겁하는 건 당연했다. 나도 레어 무단 침입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드래곤 형태로 알뜰살뜰 레어 청소를 하고 있던 어린 드래곤은, 갑자기 튀어나온 나를 보고 기함했다. 따지자면 집 청소 중 외부에서 침입한 바퀴벌레를 발견했을 때 놀라는 것과 비슷했다.

    아주 사소한…… 전투 비슷한 환영 인사를 치르고 나서야 드래곤과 마주 앉아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 어린 드래곤이라 전투 센스가 부족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과거, 비비급의 장성한 드래곤이었다면 꽤 고전했을 것이다. 멸종 위기종이라 지금은 마녀들에게 살짝 급이 밀렸다고 하더라도, 드래곤은 여전히 명실상부 세계관 최강의 종족이니까.

    낙뢰를 잔뜩 맞아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어린 드래곤이 비비 얘기를 듣고 태도를 바꾼 건 순식간이었다. 당장 기회를 봐서 나를 내쫓고 레어를 버린 뒤 떠나려던 놈이, 내가 과거 나이 많은 블랙 드래곤과 친하게 지냈던 대현자라는 사실을 밝히자 눈이 돌았다.

    “제 발로 찾아왔으면서 어째서 떠나려는 거야? 드디어 드래곤의 반려가 될 생각이 들어서 온 게 아니야?”

    그런데 비비, 이 새끼는 자기 동족들한테 날 대체 뭐라고 설명한 걸까?

    죽은 놈한테 찾아가 질문할 수 없는 게 천추의 한이었다. 마법사 말고 네크로맨서가 됐어야 한다. 나만 걔를 친구로 생각하고, 걔는 나를 무슨 반려 예정자쯤으로 여겼던 모양이었다. 이미 죽은 놈이지만, 정말 괘씸하다.

    ‘성격은 나쁜데 왜 인기가 많은 거야?’라던 이르커스의 질문이 후두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게나 말이다. 아마 날 좋아했던 놈들도 다 어디 하나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 인기가 좋았던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만 들었다.

    “반려는 무슨 놈의 반려. 비비는 오래전에 죽었잖아.”

    “인간 이름까지 짓게 두다니…… 그분은 정말 널 사랑했던 거야. 이건 드래곤 생에 다신 없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애초에 죽은 놈이랑 어떻게 반려가 되냐고. 미친 소리 하지 말고, 그냥 좀 보내 줄래? 나, 황궁에서 표범 같은 제자가 기다리고 있어.”

    나도 방금 알게 된 건데, 드래곤은 죽어서도 반려를 들일 수 있었다. 일종의 영혼결혼식 같은 거였다. 하지만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남의 종족의 관혼상제 따위…… 중국의 순장 문화 다음으로 충격적일 뿐이다.

    어린 드래곤은 눈을 빛내며 그분도 다시 자신을 찾아온 나의 순정에 감복할 거라는 개소리를 지껄였다. 아니, 드래곤이니 용소리라고 해야 할까.

    나는 침착하게 어린 드래곤을 설득해 보려고 했지만, 낙뢰를 몇 번 맞든 간에 이 미친놈은 신나서 다른 드래곤들에게도 연락하겠다며 호들갑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 역시 발이 묶였다. 내가 탈출하려고 할 때마다 레어에 결계가 하나씩 늘어났다. 이르커스한테 감금당하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일감 찾아 도망쳐 왔는데, 본 지 얼마 안 된 드래곤 새끼한테 추가 감금당하는 중이었다.

    나도 내 상황이 황당해서 탈출을 포기하고 남의 레어에 냅다 퍼질러 누워 버렸다. 며칠이 지났는지는 몰라도 최소 사흘은 이미 지난 게 확실했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이르커스가 날 기어코 찾으러 올 터였다. 일부러 탈출하는 것보다 그게 더 싸게 먹히는 일일지도 몰랐다.

    ‘이번에야말로 감금 엔딩이겠는걸…….’

    확실한 약속을 하지 않고 비상 탈출을 감행해 도망치긴 했지만, 이번에도 기간 약속을 지키지 않고 늦게 돌아온 나를 이르커스가 가만둘 리 없었다.

    나는 신이 나서 반려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며 바쁘게 돌아다니는 어린 드래곤을 향해 손에 잡히는 물건을 대충 집어 던졌다. 큰 덩치와 단단한 가죽 때문에 드래곤에게 명중한 애꿎은 물건만 박살 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내가 널 찾아온 건 마법 계약 관련이지, 반려 문제가 아니라니까.”

    “‘파기할 수 없는’ 마법 계약 말이야?”

    “그래. 정말로 파기할 수 없게 해 달라는 게 아니라, 그런 시늉만 해 달라고.”

    어린 드래곤은 도대체 내가 왜 그런 걸 요구하는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날 빤히 쳐다봤다.

    “왜 본인의 표범 같은 제자를 속이려고 하는 건데?”

    날카로운 질문에 정곡을 찔리자,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

    왜냐고? 오래 살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거고, 이르커스랑 내가 아무리 영생을 공유하게 돼도 서로를 속박하는 건 이롭지 않다. 언제 이르커스가 날 떠나 자기 인생을 살고 싶어질지 모르는데, 무슨 페널티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마법 계약을 ‘파기할 수 없는’ 상태로 맺을 수는 없다.

    하지만, 내 이런 생각을 이르커스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는 시늉이라도 해서 안심하게 만든 뒤, 먼 미래에 이르커스가 변심했을 때 ‘이 스승님은 미래를 전부 내다보았다’라고 말해 주고 떠나야 한다.

    이건 따지자면 돈까스 사 주겠다고 약속하고 치과에 데려가는 일과 비슷했다. 아무튼, 다 이르커스 잘되라고 이러는 거다.

    “그렇게 거짓말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분의 반려가 될 몸이라면 인간관계를 잘 정돈하도록 해.”

    “반려고 뭐고, 할 생각 없다니까?”

    “제 발로 레어까지 찾아와 놓고 어째서?”

    “몇 번을 말해야 하니. 내가 널 찾아온 건 마법 계약 때문이라니까?”

    “하지만, 너도 알게 모르게 그분을 그리워하고 있었을 거야. 그 검은 머리! 검은 눈! 운명에 이끌려 수많은 드래곤 중에 굳이 블랙 드래곤인 나를 찾아온 것만 봐도 확실해.”

    이 미친 용 새끼…….

    나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어린 드래곤을 보며 속으로 눈물을 훔쳤다. 검은 머리랑 검은 눈인 건 내 부모님 유전자가 힘낸 거지, 블랙 드래곤이랑은 아무런 관계 없다고 아무리 설명해 봤자 이 어린 드래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정말이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놈이었다.

    드래곤들은 실제로 남의 말을 잘 안 들었다.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 강한 종족이니, 자기들 내키는 대로 살았다. 집단생활도 잘 안 하고, 철저하게 능력 주의인 데다가, 감정을 느끼는 방식도 타 종족과 달랐다. 그래서 한창 인간성을 잃었던 나와 가까워졌던 거지만…… 이렇게 다시 보니 정말 답이 없다.

    이러니까 인간이 드래곤 죽이겠다고 드래곤 슬레이어로 전직하는 거 아니냐고. 나는 얼굴도 모르는 트리스탄의 스승을 마음 깊이 이해했다.

    내가 죽은 드래곤을 저주하고, 죽은 인간을 이해하는 동안, 레어 바깥에서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어라?”

    그제야 거대한 드래곤의 모습에서 인간 형태로 스멀스멀 외형을 바꾼 놈이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결계를 일흔 개 정도 쳤는데, 어떻게 뚫었지?”

    그새 결계를 일흔 개나 쳤냐고.

    그간 내가 탈출하려던 횟수가 그 정도 되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이르커스보다 더한 집착이었다.

    나는 속으로 내 팔자를 한탄했다. 사주팔자라는 게 여전히 유효하다면 이번 해에는 감금수가 들어선 게 틀림없다. 여기서 나간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감금이 예정돼 있으니까.

    어려서 조금 허술하긴 하지만, 세계관 최강 종족인 드래곤이 친 일흔 겹 결계를 박살 내고 레어에 침입할 인간은 아무리 생각해도 표범 같은 내 제자밖에 없었다.

    ????????????

    1권밖에 안 읽은 한유안은 모르는 일이지만, <이르커스의 서>는 17권에서 세계가 멸망하며 끝이 난다. 신의 진노나 자연재해 때문이 아니라, 종족 간의 전쟁 때문에.

    역시, 생명체는 자멸을 향해 달리는 폭주 기관차와 다름없다. 공격 마법이 오가다 보니 대륙은 점차 황폐해졌고,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들도 대다수 멸종했다. 핵전쟁 저리 가라인 마법 전쟁을 해 대니, 대륙 하나 말아먹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르커스의 서> 17권에서 이르커스는 인간을 대륙에서 내쫓으려던 드래곤을 멸절시킨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르커스 역시 회복할 수 없는 부상을 입어 죽는다.

    정말 독자들이 딱 싫어할 만한 스토리였다. 세계는 멸망하고, 먼치킨인 게 무색하게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던 주인공은 기어코 죽는다니. 이렇게 꿈도 희망도 없는 소설을 보고 한유안은 ‘주인공이 먼치킨이니 승승장구하고 하렘을 차리겠구나’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뜬금없는 한유안의 개입으로 인해 <이르커스의 서> 원작은 파괴된 지 오래였다. 이르커스는 인류를 위해 드래곤과 싸우는 게 아니라, 웬 드래곤이 한유안을 억류하고 있길래 쳐들어온 것뿐이었다.

    황궁을 나간 스승이 사흘 만에 돌아오겠다는 약속도 어기고 일주일 동안 감감무소식이었으니, 상대방 의사야 어떻든 이르커스 입장에서는 정당방위에 가까웠다.

    “유안.”

    “이르, 이건 말이지…… 사정이 있었어.”

    “그렇구나.”

    전혀 수긍하지 못한 얼굴로, 이르커스는 아무렇지 않게 유안 옆의 남자에게 검을 휘둘렀다.

    “일단, 저 드래곤부터 해치우고 마저 얘기하는 게 좋겠어.”

    종족 전쟁의 씨앗이 흙바닥에 뿌려지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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