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97화
예카리나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날 예뻐한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그 당시의 난 애완 인간에 불과했으니까.
대현자인 지금과 다르게 ‘황비의 총애를 받는 특이한 애완 인간’은 발언권이 별로 없었다. 예카리나는 나를 예뻐하긴 했지만,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이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은 그냥 흘려넘겼다. 공용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잘못 배운 단어가 화석화됐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여기가 소설 속이라는 가정은 좀 흥미롭긴 해.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다들 유안, 네 정신 상태를 의심할 테니까 말이야.’
쇠약해져 앓아누운 예카리나에게, 나는 지나가듯 이 세상은 사실 <이르커스의 서>라는 판타지 소설 속이라고 말을 꺼냈다.
이 말을 꺼내기까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당시의 나는 지금처럼 강하지도 않았고, 예카리나의 보호 없이는 언제 목이 떨어져도 놀랍지 않은 처지였으므로.
가장 의지하던 상대인 예카리나조차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 이후 누구에게도 이 세상이 판타지 소설 속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내가 이펜하임 대륙 태생이 아니라는 걸 딱히 숨기지는 않았지만, 현대 한국에서 태어났고, 수능 당일 트럭에 치여 라이트 노벨 남자 주인공처럼 이세계 트립당했노라고 설명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단 뜻이다.
“<이르커스의 서>라는 소설이 있었어. 17권짜리였고, 나는 1권밖에 안 읽었지.”
“……예언서 같은 건가?”
“어쩌면. 그 소설 제목만 들어도 알겠지만, 네가 주인공이었고.”
생각보다 쉽게 말이 튀어나왔다. 따지자면 진실 공개인데, 비장함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이르커스의 손을 쥐고 촉감 놀이라도 하듯 주무르며 다음 말을 이어 갔다.
“그때 난 고작 열아홉 살이었고,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었어. 그 시험 전날, <이르커스의 서> 1권을 읽어 버린 게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지.”
아직도 동급생의 ‘수능 전날 판타지 소설 읽지 마라’라는 충고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 예언자 놈의 말을 듣지 않아서, 나는 빙의 및 이세계 트립의 법칙에 따라 트럭에 치여 다른 세상으로 굴러떨어졌다.
“시험을 보러 가는 중에 사고가 나서…… 아마 죽었을 거라고 생각해. 운 나쁘게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 차려 보니 황궁 정원 분수대에 처박혀 있었어.”
“그래서 황궁 정원 분수대를 ‘시작’이라고 했구나.”
“그래. 따지자면 이 세계에서 내 고향은 거기니까. 난 이방인이야. 여기엔 내 친척도 가족도 없지. 하늘에서 뚝 떨어졌는데.”
그 이후로 4세기가 흘렀지만, 분수대로 사람이 뚝 떨어져 처박히는 일은 더 일어나지 않았다. 하긴, 나처럼 방심하고 있던 수재 정도가 아니라면 수능 전날 17권짜리 판타지 소설을 펼쳐 볼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자기 손을 잡고,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실컷 주무르고 있음에도 이르커스는 평온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더 말해 보라는 듯 내게 더 가까이 몸을 기울일 뿐이었다.
훅 끼쳐 오는 체향이 익숙했다. 어쩌면 내게서도 이르커스와 비슷한 체향이 날 것 같았다.
“황제가 예카리나한테 날 선물했어. 내 신분은 노예였고, 공용어를 따로 배우기 전까진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었어.”
“…….”
“예카리나가 죽고 나면 나도 자연히 죽게 될 게 뻔했지.”
영생 저주는 따지자면 나에 대한 예카리나의 마지막 책임감이었다. 자기 딸들을 부탁한다는 사유가 있기는 했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었어도 예카리나는 자기가 거둔 내 거취를 어떻게든 알아봐 줬을 사람이었다.
그 호의 때문에 영생을 살게 됐지만, 예카리나는 여전히 나의 은인이다. 가끔 원망한 것도 사실이고, 죽고 나면 저승에서 나한테 왜 그랬냐고 땡깡이라도 피울 생각이긴 했어도…… 예카리나에 대한 은혜는 내가 영원히 품고 살아가야 할 감정이었다.
“왜 나는…… 더 일찍 못 태어났지.”
“응?”
“400년 정도 일찍 태어났더라면, ‘그’ 예카리나보다 내가 먼저일 수 있었는데.”
얘가 뭐라는 거야.
진지한 얼굴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게 어이없어서 조금 웃었다. 그때의 나는 대현자가 아니었으므로, 황위 싸움에서 밀리고 있는 열두 살의 이르커스를 도와줄 수 없었을 테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시기가 있기 마련이다. 이르커스는 항상 나와 자신의 나이 차이가 세기 단위라는 걸 불만스러워 했지만, 그만큼의 격차가 있기 때문에 내가 이르커스의 보호자가 될 수 있었던 거다.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당신이 덜 고생하고 덜 외로웠을지도 모르잖아.”
“…….”
“그게 아쉬워. 그 비비인가 뭔가 하는 드래곤보다 내가 당신을 일찍 만났으면, 그래서 더 일찍 영생을 공유했더라면…….”
이르커스는 정말 억울해 보였다. 일찍 못 태어난 걸로 사람이 이렇게 억울해 보일 수 있다니.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못해도 <이르커스의 서> 1권 내용이 어떤지, 그도 아니면 그 소설의 결말을 알고 있냐는 질문을 받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면 내가 원래 살던 세상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물을 줄 알았다. 이르커스가 나를 믿는 것과 별개로 내가 뱉은 말들이 그렇게 믿음직한 소리는 아니니까.
그런데, 이르커스는 내 얘기에 어떤 의문도 가지지 않았다.
내가 팥으로 메주를 만든다고 해도, 이르커스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을 게 틀림없다. 의부증 초기 증세를 보인 것치고 이르커스는 이런 부분에서는 일절 의심이 없었다.
그게 고마운 한편으로 좀 웃겼다. 지금 이게 일찍 태어나고 아니고의 문제야? 그때 만났으면 너도나도 서로의 보호자나 피보호자가 될 수 없었을 거라니까.
이르커스에게 역으로 붙들린 내 손끝에서부터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 왔다. 가족이나 친척 한 명 없이 이 세계에 떨어져 온갖 고생을 다 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고생이 별로 안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 주인공을 만나려고 내가 그렇게 고생했던 거구나, 라고 생각하니 견딜 만한 것도 같았다.
????????????
며칠간 얌전히 감금당하고 있다 보니 좀이 쑤셔 결국 탈출을 감행했다. 곧장 황궁 밖으로 탈출한 건 아니고, 그냥 이동 마법을 써서 그 방에서 뛰쳐나왔을 뿐이다.
은밀 행동에 취약한 마법사답게, 이동하자마자 바로 들키고 말았지만 한네만 같은 조무래기 마법사가 나를 잡을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간만에 느끼는 바깥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조금 기다리면 알아서 풀어 줄 줄 알았더니, 이르커스는 내가 불만을 토로하지 않자 기다렸다는 듯 온갖 방법으로 날 가둬 두려고 했다. 언젠가 느꼈던 감금에 대한 불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서랍 깊숙이 넣어 뒀던 반지를 꺼내 다시 손에 끼웠을 때는 나를 꽉 안고 놔주질 않았다. 이제 본인이 열두 살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할 때가 됐는데, 아직도 하는 짓은 영락없이 어린애였다.
이르커스가 저렇게 좋아하니 내가 좀 답답하긴 해도 황궁 안에 얌전히 있을까, 살짝 고민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어리광을 다 받아 주고 있다 보면 밑도 끝도 없을 것 같았다.
“어디 가려고?”
이거 봐.
정말 얌전히 있다가 며칠 만에 밖으로 나온 건데, 이 자식 이거 시선이 아주 불순하다. 나는 내 좌표를 바로 추적해서 따라온 이르커스에게 붙들린 채로 한숨만 쉬었다.
“너 인마, 이거 집착이야.”
“…….”
“좋은 황제는, 어? 집착 같은 거 안 한다고.”
생각해 보니 황제들은 다 이상한 데 집착했던 것 같다. 불로불사에 집착하는 놈도 있었고, 자리에 집착하는 놈도 있었고. 그러니 그놈들이 좋은 황제가 못 된 거겠지.
더 깊이 생각해 보니, 내가 아는 황제 중에 좋은 황제는 아무도 없었다. 요절한 놈이 아닌 이상 다 도긴개긴이다.
궁을 나간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놀랄 일이라고 쫓아왔는지.
나는 일은 다 하고 왔느냐며 날 붙들고 있는 이르커스에게 역공을 시전했다. 이르커스는 미련이 뚝뚝 흘러넘치는 시선으로 ‘집착하면 안 돼?’라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이나 내뱉었다.
당연히 안 되지. 나와 이르커스 사이에 건강함이 아무리 부족하다고 해도, 둘 다 성인이라면 적어도 각자의 사생활은 보장해 줄 필요가 있다.
“한동안 괜찮았잖아.”
“이렇게 놀고먹으면서 살 수는 없어. 바쁜 가운데 놀고먹는 것과 정말 할 일이 없어서 놀고먹는 건 재미 자체가 다르단 말이다.”
“…….”
“멀리 안 갈게. 사흘 내로 돌아올 테니까, 외출 좀 허락해 줘라.”
“같이 가, 차라리.”
“이르, 잘 들어. 난 아무 일도 안 하는 대현자라 사흘 정도는 잠적 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
“하지만, 넌 사흘 잠적 타면 제국이 뒤집히는 황제라고.”
“그놈의 황제 소리…….”
“그놈의 황제가 너다.”
이르커스는 당장이라도 황제를 때려치우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건 안 된다. 마땅한 후계자를 선정하고 인수인계까지 완벽하게 마친 다음에 때려치워야 할 거 아니야. 새로운 사람을 구하지도 않고 냅다 그만두는 무책임한 사회 구성원이 되어선 안 된다.
나는 날 꼭 붙들고 있는 이르커스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쳐 잡았다. 이쯤 되면 내가 그냥 역마살이 있어서 떠돌아다니는 것뿐, 자기를 두고 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 때도 됐는데. 어쩌다 이렇게 분리 불안이 심해졌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진짜 근교 산책만 하고 올게.”
“어디로 갈 건데.”
“발 닿는 어딘가로……. 나한테 추적 마법 걸어 놔도 돼.”
“이래 놓고 사흘이 아니라 한 3개월 뒤에 올 거잖아.”
“진짜 아니라니까? 내가 사흘보다 더 늦게 오면 얌전히 감금당해 준다. 약속.”
“……정말?”
이젠 마법도 쓸 수 있는데, 드래곤 레어 찾는 일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려고.
그런데 이르커스 눈에 갑자기 이채가 도는 걸 보니,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한기가 느껴졌다. 지금 여기서 긍정해 버리면 다음엔 정말 꼼짝없이 붙들려 살게 될 것만 같았다.
모르겠다. 일단 비상 탈출 감행이다.
나는 곧바로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미안하다, 이르커스! 서두를 건 없지만 방 안에서 며칠씩 있기엔 내가 그 정도로 히키코모리는 아니야!
강가에서 솜사탕 씻은 너구리처럼 세상 망한 표정을 짓는 이르커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적절한 일감이 필요한 한국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