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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96화 (96/106)

대현자는 죽고 싶어 96화

한네만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당장 손을 들어 한네만의 눈을 콱 찔러 버릴까 고민했지만, 내가 잘못한 게 맞았으므로 그냥 가만히 있었다.

“400년간 왜 연애 못 하셨는지 알 것 같아요.”

“네가 뭘 알아.”

“제가 대현자님보다 연애 경력은 더 길 걸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저 내일모레면 마흔인데 무슨 소리세요.”

내일모레면 마흔이라는 소리에 정신이 좀 들었다. 언제 그렇게 나이를 먹었대? 물론, 내가 봉인되기 전까지 열일곱 살이던 이르커스가 스물아홉 살이 됐으니, 그 주변 인물들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한네만이 나보다 연애 경험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황궁 마법사로 갈려 나가면서 언제 그렇게 사람을 만나고 다녔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황궁 마법사가 체질인가 봐? 연애할 시간도 있고?”

“진짜……. 돌아가신 저희 할아버지도 저한테 이런 식으로 굴지는 않으셨거든요?”

“내가 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보다 나이 많으니까 참아라.”

“…….”

“아무튼, 어린 제자의 마음은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나, 왜 다시 감금당했지?”

드래곤을 찾으러 당분간 떠나야겠다고 말한 게 문제였다는 건 안다. 하지만 왜 외출 금지령이 떨어졌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귀납적 사고가 필요했다.

한네만은 혼자 골똘하게 고민하는 내 옆에 앉아, 한숨만 푹푹 쉬며 동생 에이사와 소통을 시도하고 있었다.

한네만과 에이사의 소통 기능은 정말이지 유용했다. 마법을 쓰지 않고도 거리 제약 없이 서로의 뜻을 전달하고 수신할 수 있다니. 그야말로 인간 카×오톡 그 자체였다.

“그 마음, 아마 대현자님만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

“뭐야, 넌 알아?”

“그럼요. 지나가는 시종을 붙잡고 물어도 다들 알 텐데. 남의 연애사에 끼어들기 싫어서 다들 몸 사리는 거지.”

“알면 좀 말해 줘.”

“저, 오래 살고 싶다니까요…….”

배은망덕한 새끼. 내가 형형한 시선으로 노려보자, 한네만은 아예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내가 아니라 내 어깨 너머를 보며 창문도 없는 방에서 날씨 타령이나 하는 꼴이 기가 찼다. 나이 먹더니 이 자식도 많이 능글맞아졌단 말이야.

“에이사가 에델라이드 님께 여쭤보고 다시 연락하겠대요. 일은 바빠도 꼭 그 멜킨 후작이라는 분을 뵙고 싶다네요.”

“그나마 다행이네. 넌 후계 생산 마법 같은 걸 개발하기엔 마나가 부족하잖아.”

“에이사도 저랑 큰 차이 없거든요?”

“무슨 소리야? 네가 지렁이면 에이사는 뱀이지.”

내 냉담한 비유에도 한네만은 그렇게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에이사가 뱀이라는 소리에 굉장히 흐뭇한 얼굴로 ‘걔가 저보다 아주 조금 더 영특하긴 하죠.’라고 받아치는 게 아닌가. 은근히 이놈도 시스터 콤플렉스 기질이 있다.

“멜킨 후작이 마법으로 후계를 만드는 데 성공하면 세상이 발칵 뒤집어지겠어요.”

“그렇겠지. 반발하는 사람도 나올 거고, 혁신적이라고 감탄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에이사와 에리스 멜킨의 마법 연구가 성공하게 된다면 나와 이르커스 사이에도 자녀가 생길 수 있지 않나, 의문이 들었다.

“아니, 내가 진짜 미쳤나?”

그리고 그 의문은 생각한 지 3초 만에 파기되었다.

아무리 이르커스의 미남 유전자가 아깝다고 해도 그렇지, 돌이켜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애를 또 어떻게 키우려고. 나한테 애는 이르커스 하나로 충분하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불시에 감금당하다 보니 내가 드디어 맛이 갔나 싶어서.”

“……여기서 그냥 나가실 수도 있으시잖아요. 이제 마법도 다시 쓸 수 있으시니까.”

“그냥 튈까 고민해 보기도 했는데, 어쩐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직감이 그래.”

내가 여기서 튀면 이르커스가 황제 자리를 내팽개치고 날 쫓아올 것 같다. 이건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또, 서두를 필요가 없기도 했다. 좀 미적거린다고 갑자기 대륙 전역에 퍼져 있을 드래곤의 씨가 마르는 것도 아니고.

나는 한네만에게 이만 나가 봐도 좋다고 말한 뒤, 침대에 털썩 누워 버렸다.

문은 잠겼고, 넓고 넓은 방에서 이런 식으로 황제 감금을 당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며칠 정도는 이르커스의 이유를 알 수 없는 투정에 어울려 줄 용의가 있었다. 오랜만에 잔뜩 게으름 부리니 몸이 편하기도 했고.

시간이 남는 김에 에리스 멜킨이 부탁한 대로 마법사도 알아봐 줬으니, 내가 황궁에서 해야 할 일은 나름대로 전부 끝낸 셈이다.

예전에는 드래곤을 만나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산지나 호수가 있던 자리를 찾아가면, 거기에 드래곤이 자기 레어를 구축해 놓고 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들 어디로 가 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드래곤들은 자기 죽이겠다고 들이닥치는 인간을 피해 몸을 숨겨 버렸다. 다른 이종족들이 인간과 어울려 살기를 포기하고, 각자의 구역에 자리를 잡은 것과 같은 이유였다.

인간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면 드래곤들이 자꾸 아무 생각 없이 마을 하나를 날려 먹는 일이 잦아 드래곤 사냥을 다닌 거지만, 드래곤 입장에서는 파리나 바퀴벌레만큼 조그마한 놈들이 아득바득 덤벼서 자기 동족을 죽이고 있는 상황인 거다. 더러워서라도 몸을 피하는 게 맞는 일이었다.

“이럴 때 비비가 살아 있었으면 좀 편했을 텐데.”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르커스에게 ‘파기할 수 없는’ 마법 계약을 순순히 맺어 줄 생각이 없었다. 맺는 시늉이나 할 생각으로 드래곤을 찾으려던 거지, 마법 사용 제약 때문에 그 고생을 해 놓고서 이르커스랑 또 마법 계약을 맺을 리가 있나.

그래도 이르커스가 영 나를 못 믿으니, 드래곤을 찾아가 이르커스 몰래 계약 수식을 수정해 달라고 귀띔이라도 해 둘 생각이었다. 비비와 친했던 대현자라고 날 소개하면,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드래곤들이라도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테니까.

“또 그 드래곤 얘기.”

“깜짝이야. 언제 들어왔어?”

“방금. 자는 것 같아서 일부러 조용히 들어왔는데.”

제복 차림의 이르커스가 거추장스러운 겉옷 단추를 손으로 툭툭 풀며 내가 누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죽은 드래곤 생각하느라 바빴나 봐.”

“말 그렇게 하는 법은 누구한테 배운 거야?”

“당신.”

“……하, 내 죄가 크다.”

이불을 끌어다 얼굴 위로 덮어 버리자, 이르커스가 도로 내 얼굴이 드러나도록 이불 끄트머리를 잡아 내렸다.

황제의 의무나 다하라는 내 말에 토라진 (트리스탄은 다 큰 이르커스한테 이런 깜찍한 표현 쓰지 말라고 성질을 부렸다.) 이르커스는 근 며칠간 나름대로 국정을 돌보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트리스탄 말로는 평소처럼 설렁설렁하는 게 아니라, 꽤 꼼꼼하게 그간 지나쳤던 것들을 살피는 중이라고 했다.

잔소리가 효과 있었다는 건 다행인데, 그 반대급부로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서도 꼬박꼬박 나를 보러 온다는 게 문제였다. 마치 시킨 일 잘하고 왔으니 칭찬해 달라는 개 같았다.

보는 눈도 많고, 듣는 귀도 많은 황궁이니만큼 이르커스의 사소한 스킨십을 받아 주지 않겠다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을 다잡았지만, 이렇게 단둘이 남은 장소에서 이르커스가 아무렇지 않게 내 뺨을 감싸거나 고개를 숙여 몸을 가까이하면 내 결심은 순식간에 백지가 되고 만다. 이르커스의 얼굴 공격은 정말 무자비했다.

“안 돼. 황궁 안에서는 조심하기로 했잖아.”

“이미 키스까지 다 해 놓고.”

“그러니까, 더 조심해야지.”

“…….”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이르커스가 다시 내 어깨를 내리눌러 못 일어나게 다시 눕혔다.

나는 버둥거리는 대신, 순순히 누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르커스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봤다. 이 각도에서도 저렇게 미남이라니,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다.

“도대체 왜 삐진 거야?”

“내가 그냥 삐진 걸로 보여?”

“당연하지. 설마 너, 이미 죽고 없는 드래곤을 질투하는 건 아니지?”

“맞는데.”

당연히 아닐 거라고 생각해서 반쯤 농담으로 물어본 건데, 이르커스는 내가 무안해질 만큼 곧바로 질투가 맞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당신한테 마법 구속구가 통했다면, 그냥 구속구를 채워 두고 황궁에서 못 벗어나게끔 통제하고 싶어.”

“…….”

“싫어할 걸 아니까, 안 하는 것뿐이야. 사실 트리스탄이나 한네만이랑 대화하는 것도 가끔 질투 나.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지? 특히 한네만은 가끔 거슬려. 당신이 귀여워하는 게 눈에 보여서.”

한네만이 들었으면 자기 빼고 싸워 달라고 상소문이라도 썼을 법한 말이었다.

나는 당황과 황당을 넘어, 가슴속에 움트는 이상한 만족감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얘가 뭐라는 거야. 저 입을 다물게 해야…… 아닌가? 저 미친 소리가 좀 마음에 드는 것 같기도 하고.

“당신은 내 전부를 아는데, 난 당신 과거에 대해서 여전히 모르잖아.”

“알 필요가 없으니까. 지난 걸 알아서 뭐 하려고.”

“비비인지 뭔지, 왜 이종족한테까지 고백 받은 거야? 성격도 나쁘면서 인기는 왜 좋은 건지.”

“야…….”

“키스나 해 줘, 빨리. 그럼 그냥 입 닥칠게.”

방금까지 토라진 척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이르커스는 손을 들어 제 입가를 툭툭 가리켰다.

성격도 나쁘면서 인기는 왜 좋냐는 말이 마음에 무척 걸렸지만, 이대로 놔두면 그간 쌓였던 불만으로 랩이라도 할 것 같은 이르커스를 달래는 게 먼저였다.

이르커스의 팔을 잡아 누워 있는 내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다른 손으로 턱을 붙잡고, 키스라고 하기엔 우스울 만큼 가볍게 쪽하고 입술만 닿았다 떨어졌다.

“이걸로 만족하도록 해.”

“……사기꾼.”

“스승한테 못하는 말이 없다.”

“황제 그만두고 나면, 내 마음대로 하게 해 줄 거야?”

천진한 얼굴로 내 옆에 따라 눕는 이르커스를 보고 있자니, 트리스탄이 그놈 그거 다 거짓부렁이라고 말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나는 트리스탄의 헛소리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우리 애가 연기를 이렇게 잘할 리가 없다. 저 천진함은 아무리 봐도 진짜다.

“왜 이렇게 입 맞추고 껴안는 걸 좋아해?”

“그간 못했으니까.”

“알겠어. 황궁을 벗어나고 나면, 지금보다는 더 받아 줄 테니까…….”

나는 은근히 몸을 붙여 오는 이르커스를 초인적인 의지로 떼어 내곤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엉겨 붙는 제자 덕에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어두운 조명과 침대에 같이 누워 있는 상황, 그리고 뭐든 다 자라 버렸으면서도 여전히 어린 날의 표정을 짓는 이르커스. 이런 것들이 평소와 달라서, 내 마음을 말랑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르커스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투로 내뱉었던 말들이 너무 황당하고, 또 반쯤은 이상하게 마음에 들어 지금이야말로 이르커스에게 얘기해 줄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고.

“내 과거가 그렇게 궁금하면, 조금은 얘기해 줄게.”

지금이라면, 그리고 이르커스에게라면 <이르커스의 서>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슨 이상한 소리를 지껄여도, 이르커스는 그 말을 잠자코 들어 줄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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