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95화
“에리스와 대화는 잘 나눴어?”
“그래. 에리스 그 애, 다시 보니 황비로는 좀 아깝더라.”
“…….”
“결혼으로 묶어 둘 수 없다면 등용이라도 해야겠어. 그간 너한테서 이것저것 실컷 털어 갔던데, 왜 에리스를 그냥 놀리고 있었던 거야?”
“가까이 뒀으면 당신이 깨어나기 전에 기어코 나를 암살한 뒤, 황제 자리에 올랐을 사람이라서.”
“……아, 하긴.”
에리스 멜킨은 확실히 유능한 인재지만, 가까이 뒀다간 뒤통수 맞기 딱 좋았다. 사이는 안 좋아도 박쥐 같은 에킨도르와 피를 나눈 남매니, 에리스라고 아주 충직하리란 법은 없었다. 내가 보기에 에리스 멜킨은 사람에게 충성하는 인간이 아니라, 권력을 위해 충의를 다지는 인물이었다.
“꼭 그게 아니어도 멜킨 후작을 가까이에 두면 결혼하라는 압박이 계속 들어왔을 테니까. 후작도 이럴 거면 자기와 결혼하자고 했고.”
“그래서 결국 국혼을 결심한 거구나.”
“그런 압박은 그냥 무시해도 돼. 귀족들이 아무리 귀찮게 해 봤자, 황제는 나니까.”
“방금 대사, 조금 폭군 같았어.”
“……내가 결혼을 결심한 건 귀족들 때문이 아니라 당신 때문이야. 알고 있잖아?”
“진짜 나 불러들이겠다는 이유 하나로 결혼을 결심한 거라고?”
“라단타 정도로는 당신의 흥미를 못 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다른 수가 필요했어. 후작과 정당한 보상을 대가로 거래를 한 것도 그 이유고.”
“…….”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르커스 입으로 그 말을 들으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또 한편으로는 라단타의 반란보다 에리스와의 결혼이 내게 더 잘 먹힐 거라는 걸 이르커스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나름대로 모르는 척, 괜찮은 척, 이르커스에게서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잘 지낸 줄 알았는데 빤히 보이는 발버둥이었나 보다.
“결혼 소식에도 내가 안 돌아왔으면?”
“…….”
“그러면 어쩌려고 했어?”
그럼, 이르커스는 에리스와 무사히 결혼했을까?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가정하는 것뿐인데도 속이 조금 울렁거렸다. 만일 내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이르커스는 나와 영생을 공유하게 되는 대신 순탄한 필멸자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다른 강수를 두려고 했지.”
“다른 거?”
“그래. 내가 죽었다거나, 죽을 만큼 크게 다쳤다거나. 그 말을 들으면 아무리 멀리 도망쳤어도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어. 남쪽 숲이 아니라 카만에 있었을 테니, 소식도 금방 닿았을 거고.”
“……뭐?”
“결혼 소식에도 당신이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면 죽으려고 했어. 놀랄 일인가?”
미친 소리였다.
나는 이르커스가 혹시 질 나쁜 농담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이르커스의 얼굴은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진실해 보였다.
“진짜 죽을 생각은 없었고, 죽기 직전까지만…….”
내 아연실색한 표정을 보고 그제야 자신이 뭔가 잘못했다는 걸 깨달은 이르커스가 엎질러 버린 물을 주워 담겠다고 수습할 만한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어 봐야 내 혈압만 착실하게 오를 뿐이었다. 죽기 직전까지? 이 자식 이거, 어떤 새끼한테 잘못 배워서 몸을 이렇게 함부로 굴려?
이르커스가 누구한테 이렇게 나쁜 걸 배웠나 생각해 보니 범인은 나였다. 그러고 보면 나는 불사랍시고 온갖 곳에서 몸을 함부로 내던졌다.
이르커스가 보고 자란 게 그런 것뿐이니 저놈이 저러는 건 내 탓이 맞았다. 올랐던 혈압이 정상으로 뚝 떨어졌다. 그래, 누구 탓을 하겠냐. 다 내 탓이다.
“억지로 데려오면 싫어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걸 생각할 줄 아는 놈이 네 목숨 가지고 도박하는 건 내가 좋아할 줄 알았어?”
“……화났어?”
“그럼 화가 안 나겠니?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미친다.”
스물아홉 살이나 먹은 제자가 마른 세수를 하는 내 앞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봤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애였다. 꼬리 내린 대형견 같기도 하고.
트리스탄은 이르커스가 내 앞에서 일부러 약한 척을 한다고 쑥덕거렸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트리스탄의 착각이었다. 이르커스는 정말 약했다. 물리적으로 약한 게 아니라, 마음이 약했다. 다들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어 주지만, 아무튼 그렇다.
“네가 나를 위해서 위험한 짓이나 나쁜 짓을 서슴지 않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라단타나 아자젤 일도 그렇고. 넓게 보자면 마녀들을 황궁에 붙들어 둔 것도 좋게 볼 수는 없는 일이지.”
“…….”
“그리고 그게 내가 널 잘못 키워서…… 내가 널 떠나 남을 돕다가 문제가 생겨서 너랑 지내보지도 않고 마법 계약부터 들이민 탓이라는 것도 알아. 전부 내 탓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결국 부정할 수는 없었고.”
언젠가 한 번은 이 부분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긴 해야 했다. 내 예상보다 이 말을 하게 된 시기가 조금 빨랐을 뿐이다.
이건 이르커스에게 일부러 상처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얼떨결에 사람을 죽인 어린애를 타이르거나 벌하지 않고 껴안고 달래 준 대가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체험했다. 나에 대한 이르커스의 집념에 가까운 애정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나는 긴 시간 동안 또 제자를 잘못 키운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건 내 업보니까.
“내가 너한테 소중한 존재라서 그런다는 거 알아.”
“알면…….”
“하지만, 나는 네가 나 때문에 더 나빠지는 걸 원하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겠니?”
스물아홉 살이 아니라 잘못을 저지른 미운 아홉 살을 훈계하는 기분이었다. 이르커스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내 말에 대답이 없었다.
사실 그냥 말로 타이른다고 나아질 문제가 아니긴 했다. 내가 흑화시켜 놓고 이제 와 갱생시키는 게 쉬울 리가 없다. 나는 과거의 나를 향해 섀도 복싱을 시전했다. 왜 그랬니, 과거의 대현자!
이르커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조금 더 침묵을 지키다가, 누가 봐도 처연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다시는 날 떠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
“…….”
“아니, 약속 정도로는 부족하지. 다시 계약을 맺어 줘. 파기할 수 없는, 마법 계약을.”
????????????
트리스탄의 스승, 그러니까 드래곤 슬레이어한테 목이 잘려 죽은 블랙 드래곤은 이름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이름이 없었다. 드래곤들 사이에서는 서로 부르는 명칭 같은 게 있는 모양이지만, 그걸 인간인 내가 알 수는 없다.
길고 긴 세월을 살았음에도 드래곤어를 익히는 것에는 결국 실패했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배워 보려고 했는데, 인간이랑 드래곤의 발성 기관과 구강 구조에 차이가 있어서 도전조차 하지 못했다.
종족 차이가 이렇게 무섭다. 인간이 고양이 언어를 아무리 흉내 내려고 해 봤자, 인간의 냐옹 소리를 고양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도 나와 연배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나름대로 잘 지내던 블랙 드래곤은 인간에 불과한 내게 크나큰 호의를 내비쳤다. 내가 부를 수 있을 만한 인간식 이름을 지어 줘도 괜찮다고 허락한 것이다.
그간 나는 그 블랙 드래곤을 속으로는 ‘용용이’나 ‘블·드’쯤으로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작명 허가에 크게 당황했다. 지금도 내가 붙여 준 블랙 드래곤의 인간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 대충 지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비비라고 불렀다. 맞다. 블랙의 ‘B’를 두 번 반복해서 비비. 드래곤이 그 이름을 마음에 들어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네 스승이 드래곤 슬레이어였잖아.”
“그렇소만.”
“혹시 네 스승, 아직 살아 있니?”
“있겠소? 내 나이가 벌써 중년인데. 진작 노화로 돌아가셨지.”
역시, 인간은 너무 빨리 뒈진다. 나는 간만에 불멸자다운 생각이나 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그간 신경도 안 쓰던 드래곤 슬레이어에 대해 다시 트리스탄에게 질문한 이유는 드래곤들을 다시 만날 필요가 생긴 탓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스승은 왜 찾소?”
“아, 다른 게 아니라 네 스승이 죽인 드래곤이 내 친구였거든.”
“……친구?”
“어어, 우리가 연배가 좀 비슷했어. 걔가 갑자기 말년에 나한테 고백하는 바람에 관계가 좀 애매해지긴 했었는데.”
“……고백?”
‘친구’ 소리는 트리스탄이 했는데, ‘고백’ 소리는 언제부터 나와 트리스탄의 대화를 주워듣고 있었는지, 갑자기 응접실로 난입한 이르커스가 내뱉었다.
이거 망했는걸? 나는 조상신이 내 머릿속에서 다시 마카레나를 추든 말든 평온한 표정을 가장하기 위해 기를 썼다.
“한참 전 일이야. 비비는 죽었고.”
“애칭도 있었나 봐?”
완전 대충 지은 남의 인간 이름을 애칭이라고 생각해 주는 정성이 갸륵했다. 나는 또 눈깔이 음울해지는 이르커스를 보며 어디서부터 얘를 고쳐 놔야 할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예카리나한테 자격지심을 느끼고, 자기 약혼자였던 에리스한테 말도 안 되는 질투를 내비치더니, 이제는 죽은 이종족한테까지 시비다. 이미 죽고 없는 드래곤이 저승에서 억울하다고 꺼이꺼이 울어도 할 말 없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르.”
나는 일단 이르커스의 팔을 붙잡았다. 마탑 박살 낸 것처럼 드래곤 토벌하겠다는 발언을 하기 전에 대화 주제를 환기해야 했다.
“네가 원하는 ‘파기할 수 없는 마법 계약’을 하려면 드래곤이 필요해.”
“어째서?”
“아무리 내가 대현자라도 아예 ‘파기할 수 없는’ 계약은 맺을 수 없으니까.”
세계관 최강 종족은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이다. <이르커스의 서>는 세계관만큼은 정말 정직한 판타지 소설이니까.
최강의 종족 정도는 돼야 파기할 수 없는 마법 계약을 맺을 수 있다. 아무리 내가 마법 수식을 꼼꼼하게 짠다고 하더라도 이르커스가 원하는 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나는 불멸자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이니까. 드래곤과 몸집을 비교하면 아주 조그마한 존재인데, 축적하고 있는 마나 양이 다른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난 그런 계약 없이도 널 떠날 생각 없지만, 넌 날 못 믿잖아.”
“…….”
“그러니까, 도움 좀 받으려는 거야.”
이 정도 성의를 보여야 이르커스가 ‘그런 거 없어도 옆에 있겠다니까?’라는 나의 말을 믿어 줄 것이다.
“유안. 하나만 물어볼게.”
“응.”
“드래곤 찾으러 혼자 가려고?”
“당연하지.”
하지만 뭐가 문제였는지, 나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르커스의 음울한 눈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어디서부터가 오답인지 다시 돌이켜 보다가 이내 정정할 말을 골라냈다.
“넌 황제잖아. 본인의 의무를 다해라.”
내 말을 듣던 트리스탄이 참지 못하고 쯧, 하고 혀를 찼다. 그제야 나는 이것도 오답이라는 걸 깨우쳤다.
아…… 출제 위원 누구야. 문제가 너무 어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