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94화
정말 억울하다. 에리스 멜킨의 (전)약혼자는 내가 아니라 이르커스다. 그러니 굳이 에리스를 질투해야 한다면 이르커스가 아니라 내가 하는 게 옳다.
물론, 나는 에리스와 이르커스 사이에 어떤 감정도 없다. 진짜다. 둘이 국혼 올린다는 소식에 기겁해서 황궁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건 사실이지만, 이 나이 먹고 한참 어린 에리스를 질투하지는 않는다. 남들이 보기엔 질투처럼 보이겠지만, 이건 그냥…… 어른으로서의 걱정? 그런 거다.
“내가 보기엔 이르커스나 대현자, 당신이나 도긴개긴인 것 같소.”
“네가 뭘 알아.”
“이럴 거면 왜 상담해 달라고 한 거요?”
“사밀라가 없으니 네가 희생해야지. 어쩔 수 없잖아. 내가 아는 기혼자는 너 하나인걸.”
트리스탄이 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트리스탄을 붙잡고 내 할 말만 했다.
그나마 유부남인 트리스탄이 사랑을 알지, 한네만처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들이 사랑을 어떻게 알겠는가? 오십 년은 살아 봐야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망한 사랑 전문가인 사밀라가 황궁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편지 한 장만 덜렁 남긴 뒤 멀리 떠나 버렸으니, 그나마 내가 연애 상담을 할 수 있는 건 트리스탄밖에 없었다.
다른 놈들은 죄다 어리거나, 그도 아니면 미혼이었다. 사밀라만큼 전문적인 연애 상담을 기대하는 건 불가능할지라도, 이졸데와 여전히 금실 좋은 트리스탄이라면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 격으로 좋은 조언을 해 줄 것 같았다.
“솔직히 나는, 그…… 질투심을 이제 깨달은 그쪽도 정상은 아닌 것 같소만.”
“어려서는 안 이랬다니까?”
“…….”
“진짜야, 너도 알잖아.”
트리스탄이 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내 말에 장단을 맞춰 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르커스는 의젓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열두 살 때는 자기 떨어트려 놓고 외출하지 말라고 내게 매달리긴 했어도, 내가 길버트랑 잘 지내는 것에 대해선 불평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길버트가 나무 정령이고, 이르커스가 내 아틀리에에 얹혀살고 있었으니 말할 수도 없기는 했겠지만.
어쨌든, 그 시기의 이르커스는 나이에 안 맞게 어른스럽고 조용했다. 어린 에델라이드를 한번 안아 들었을 때 그간 제대로 못 하는 척하던 마법을 바로 사용하긴 했지만, 그것도 따지자면 질투라고 할 수는 없다. 열두 살이 무슨 질투야. 그 나이답게 칭얼거린 거지.
열다섯 살 때도 테리즈나 에델라이드를 썩 좋아하지 않는 게 눈에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카만의 정보 길드인 나이트 펠로우를 믿지 못했던 거다. 테리즈와 이르커스의 첫 만남은 썩 긍정적이지 않았으니까.
황궁에 입궁해서도 어찌 됐든 지금처럼 내가 누구를 만나는 걸 경계하지는 않았다. ……아닌가? 했었나? 생각해 보니 이르커스는 나 없는 새 내게 갉작거리던 앙헬을 총으로 쏴 버릴 만큼 싫어했다.
하지만 앙헬은 사람 속을 긁어 놓는 데 도가 튼 놈이라, 굳이 내가 아니어도 이르커스가 앙헬을 싫어할 이유는 썩어 넘칠 만큼 많았을 테다.
그 외에도 이르커스는 나와 정치적인 목적으로 여러 번 만났던 에킨도르 멜킨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에킨도르 멜킨은 박쥐 같은 놈이었으므로 질투 때문에 에킨도르를 싫어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르가 어려서는 질투심 같은 게 없었던 것 같아.”
“……맙소사.”
“맙소사는 무슨 맙소사야.”
“방금 믿지도 않는 엘리오스 신이 보고 싶어졌소. 이런 인간이 대현자라니.”
“나 아니면 누가 대현자 해. 나 정도 되니까, 어? 대현자 칭호도 받고 그러는 거야.”
“놀랍도록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인간이 대현자인 게 현실인가 싶소. 세상이 말세로군.”
트리스탄은 내 고민 상담을 더는 못 들어 주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더니 내게 진지하게 ‘대현자’ 칭호 내려놓는 게 어떠냐는 괘씸한 발언까지 덧붙이는 게 아닌가.
나는 어이가 없어서 트리스탄의 머리 위로 작은 비구름을 만들었다. 금세 쫄딱 젖은 트리스탄이 마법 사용 제약이 풀려선 안 됐다며 역정을 냈다.
이르커스가 반대하든 말든, 나는 에리스 멜킨을 만날 생각이 있었다. 땅 주는 것보다 만남을 가지는 게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사실, 조금 겁이 나긴 했다.
에리스와 이미 대면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때는 지금과 상황이 달랐다. 에리스도 나를 장인어른이라고 생각했겠지? 내가 에리스를 며느리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하지만 지금 에리스와 내 사이는 무척 미묘한 상태다. 이르커스를 사이에 두고 대차게 꼬여 버렸다. 에리스의 관점으로 보자면, 시아버지인 줄 알았던 내가 갑자기 ‘네 남편 될 뻔한 황제는 내가 가진다’며 중간에 가로챈 거였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여전히 내가 이르커스의 편이고, 보호자로서 피보호자인 이르커스를 지켜 줘야 한다는 생각은 유효하다. 하지만 이르커스에 대한 내 마음을 인정해 버린 이상, 에리스를 이르커스와 짝지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계산적으로 생각하자면 이르커스와 에리스를 결혼시켜도 문제는 없다. 어차피 에리스는 언젠가 죽는다. 나와 영생을 공유하게 된 이르커스와는 처지가 다른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일종의 기만이었다. 실제로 나는 판타지 세계가 아니라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결혼이 신 앞에서 이루어지는 신성한 맹세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결혼을 했으면 부부끼리는 서로에게 충실해야 한다곤 생각한다. 그게 내 ‘상식’이니까. 귀족들이 툭하면 정부를 들이는 세계관이라도 지켜야 할 건 지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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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상하는 일이긴 하지만, 황제께서는 애초에 저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요.”
머리채 정도는 잡힐 각오를 하고 에리스를 황궁으로 불렀다. 이르커스는 꼭 에리스를 만나야겠느냐고 내게 세 번이나 더 물어봤지만, 부동산보다는 내 넘쳐흐르는 시간을 허비하는 게 남는 장사였다.
이르커스는 결국 내 고집을 꺾지 못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스승 이기는 제자도 별로 없다. 청출어람 청어람이라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내가 하겠다는데! 내가 에리스를 만나겠다는데 이르커스가 뭐 어쩔 것인가. 잠자코 스승의 뜻을 따라야지.
황궁 정원이 잘 보이는 자리에 차와 다과가 차려질 때까지만 해도 나는 에리스가 내게 한 소리 할 줄 알았다. 따지자면 남의 삽질에 이용당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짜증이 안 난다면 에리스는 길 위의 부처였다.
하지만 에리스가 나를 만나자마자 한 말은 다른 무엇도 아닌 ‘공작으로 승격해 줘요’였다. 아침 드라마에 나올 법한 ‘이르커스는 내 남자예요!’라거나 ‘당신은 대현자가 아니라 도둑놈이야!’ 같은 대사는 일절 나오지 않았다.
에리스는 정말 권력만을 탐했다. 세상에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다는 걸 오랜 인생 경험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이토록 순수하게 작위와 세력만을 원하는 인간은 또 오랜만이었다.
인간은 복합적이라 원래 이거 원하면서 저것도 바라는 법인데, 에리스 멜킨은 다른 의미로 참 우직했다.
이르커스를 설득해서 자기를 공작으로 만들어 줬으면 좋겠고, 덤으로 아는 마법사가 있다면 자웅 동체 생물처럼 후계를 혼자서 생산해 보려고 하니 소개해 달라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멜킨은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격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공작으로 작위를 올려 주는 건 곤란했다. 명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명분 없는 승격은 또 다른 분란의 불씨를 제공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처음부터 황제께서 제게 마땅한 보상을 약속하고 가짜 결혼을 계획한 것인데, 일이 잘 마무리되고 나니 이런 식으로 자꾸 발을 빼시더군요.”
“아니, 한번 들어 봐라. 도대체 무슨 명분으로 공작위를 주니?”
“못 줄 건 또 뭔가요?”
“…….”
“제 덕에 두 분 사이에 진전이 있지 않았나요? 전 자존심도 한 수 접고, 물심양면으로 황제 폐하를 도왔습니다.”
그게 왜 네 덕이야. 나는 진심으로 억울해하며 읍소하는 에리스의 얼굴을 아연실색하며 바라보았다. 과연, 도망치다 붙잡힌 에킨도르를 바로 죽이지 않고 후작가에서 발닦개로 부리고 있다는 소문이 진짜인 것 같았다.
고양이인 줄 알고 이르커스한테 붙여 줬던 건데, 에리스는 종을 따지자면 확실히 호랑이였다. 그것도 자기가 원하는 걸 순순히 안 주면 사람을 산 채로 잡아먹는 호랑이.
“아무튼, 이런 식으로 두 분 다 제 요구를 거절하시면 저도 멋대로 행동하는 수밖에 없어요.”
“이르커스가 하사하겠다는 영지로는 부족해?”
“그거 주기 싫어서 대현자님이 절 순순히 만나 주시는 걸 보니까 별로 받고 싶지 않네요.”
“…….”
“저의 여린 마음에 입은 충격 보상까지 해서, 공작 작위와 훌륭한 마법사를 소개해 주시는 걸로 타협하시죠.”
타협이 아니라, 공갈 협박을 당하고 있다.
나는 말을 잃은 채 에리스 멜킨을 바라보았다.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우아하게 넘기는 모습은 그야말로 명화 같았다. 저 명화 같은 얼굴로 이렇게 악독하다니. 역시 사람은 성공하려면 독해야 한다.
에리스의 자웅 동체 후계 생산을 위해 소개해 줄 마법사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에이사가 있기 때문이다. 에이사는 카만에 묶인 몸이긴 하지만, 형제인 한네만이 로베인 황궁에 있으니 에델라이드와 잘 조율하면 1년 정도는 에리스에게 붙여 줄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작위였다. 이르커스는 다른 귀족들이 반발하든 말든, 명분이 있든 없든, 에리스가 원하는 대로 작위를 하사할 생각이 있어 보였다.
아마 내가 결사반대하고 나서지만 않았어도 에리스는 별다른 잡음 없이 멜킨 공작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에리스도 굳이 나를 만나게 해 달라고 이르커스에게 부탁한 것이겠지. 네가 뭔데 내 공작위를 방해하느냐는 질문을 하려고.
그러나, 당장 이르커스가 황제를 때려치우고 나와 저 멀리 떠날 게 아니라면 귀찮은 일은 더 이상 안 만드는 게 좋았다. 라단타와 앙헬 덕에 지금까지 쉴 새 없이 전쟁을 치렀는데, 귀족들이 또 끼리끼리 뭉쳐 반기를 들면 정말 곤란했다. 귀찮으니까.
“그럼 이렇게 하자. 작위를 줄 테니, 이르커스를 계속 도와줘.”
“도움이라 하심은?”
“친 황제파 세력을 구축해서 네가 황궁 내 세력 균형을 좀 맞춰 줬으면 좋겠다.”
폐위되긴 했으나 황가의 핏줄인 마리아가 살아 있다. 오늘내일할 만큼 나이를 먹긴 했어도 선대 황제의 사촌 역시 아직 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또 개싸움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귀족들끼리 연합하지 못하게 흩어 놔야 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세계 멸망급만 아니면 나와 이르커스 선에서 해결할 수 있을 테지만, 기왕이면 귀찮은 일은 안 벌어지는 게 제일이다.
나라가 좀 안정되면 나도 이르커스를 데리고 남쪽 숲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문제가 계속 터지면 황궁을 떠날 수 없지 않겠는가.
“네가 원하는 대로 쓸 만한 마법사도 조만간 붙여 주지.”
“좋습니다. 역시 대현자님은 제자와 다르게 말이 통하시는 분이세요.”
“이르커스를 적대하는 귀족들이 다른 생각 못 하게 실컷 괴롭혀 줄 거라고 믿는다.”
“괴롭히기라……. 그게 또 제 전문이죠.”
나는 에리스 멜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에리스가 우아하게 내 손을 붙잡았다.
악수가 오고 가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에리스 같은 인간은 적으로 두면 괴롭지만, 내 편으로 삼으면 최고로 든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