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93화
믿기지 않겠지만, 한유안은 판타지 소설을 그렇게 많이 읽지 않았다. 판타지 소설은 입시에 별로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한유안은 자신의 지능이 평균보다 살짝 높을지언정 대단한 수준이 아니라는 걸 이르게 깨우쳤다. 모르고 살기엔 주변에 천재가 너무 많았다.
누구는 네 살에 천자문을 떼고, 누구는 여덟 살에 영재 학교에 들어갔다. 일부러 발굴하지 않아도 영재가 도매 시장에 널린 상품처럼 온 세상에 굴러다녔다. 그 사이에서 인정받으려면 여가고 취미고 뭐고, 그냥 죽었다고 생각하며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한유안이 다른 데 눈 돌리지 않고 열심히 하는 성실함만큼은 타고났다는 거였다. 그래서 한유안은 결국 썩어 넘치는 천재들을 제치고, 고등학교 3학년 9월 모의고사 만점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솔직히 죽지 않고 수능 시험장에 들어가기만 했어도 수능 만점 역시 불가능하진 않았을 테다.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며 한유안을 향해 독한 놈이라고 말했다. 한유안 본인도 ‘독한 놈’이라는 표현을 좋아했다. 순한 놈보단 독한 놈이 이 팍팍한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이렇게 입시에 미쳐 청소년기를 공부로 허비한 한유안이 판타지 소설에 조예가 깊을 리 없다. 제일 많이 읽는 문학이 국어 교과서인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 수박 겉핥기 수준의 지식을 잘 아는 척 말하고 있을 뿐, 한유안은 실제로 <이르커스의 서>에 대해서 잘 몰랐다.
17권 중에 고작 한 권 읽어 놓고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자만이다. 셀 수 없이 많은 판타지 소설이 전부 다 같은 구성일 수는 없다. 클리셰는 있을지언정 모든 소설이 한유안의 예측대로 흘러가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이르커스의 서>는 애초에 해피 엔딩이 아니었다. 세계가 멸망하면서 끝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소설은 주인공 이르커스가 하렘을 차리기는커녕 황비조차 들이지 않는다. 소설 속의 이르커스는 정말 17권 내내 사건과 음모에 휩싸이거나 전쟁만 치른다. 먼치킨 주인공이긴 한데, 처음부터 끝까지 개고생만 한다.
덕분에 <이르커스의 서>는 출판 시장에서 철저하게 외면 받았다. 다수의 독자가 ‘그렇게 세계는 멸망했다’로 끝맺음이 나는 소설을 ‘용두사망’이라고 불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 의미에서 한유안이 <이르커스의 서> 결말을 모르는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한유안은 이상한 데서 융통성이 없는 인간이라, ‘세계는 이 연도에 이렇게 멸망합니다’라고 적힌 소설의 결말을 봤다면 무기력하게 세계 멸망이나 기다렸을 터였다. 세계사 연도 외우는 것처럼 몇백 년 동안 멸망할 시점을 염불처럼 외웠을지도 몰랐다.
“1권 말고 17권을 읽어 볼걸…….”
그러나,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한유안은 심란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천장 무늬만 바라보았다.
이미 <이르커스의 서>는 틀어질 대로 틀어져, 원작대로라면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이르커스가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부터가 미스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과연 입시 기간 내내 교과서와 참고서, 그리고 추가 문제집 없이는 공부해 본 적 없는 대한민국 고등 교육의 수혜자다웠다. 정해진 길목을 벗어나면 불안해한다는 점까지 완벽한 입시생이다. 다른 세계에서 400년 넘게 살았음에도 입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 보면 한국 교육은 일종의 저주였다.
“그런데 이제…… <이르커스의 서>가 의미가 있나?”
한유안은 고민했다. 한참의 고민 끝에 단순한 결론이 났다. 알 게 뭐야. 이르커스는 이제 <이르커스의 서>에 나오는 주인공이 아니라, 한유안만의 주인공이었다.
<이르커스의 서> 작가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결국 이 세계는 다른 결말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
에리스 멜킨은 이르커스의 잘난 외모와 마검사라는 특출 난 설정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에리스의 관심사는 오로지 권력과 황위뿐이었다.
그건 에리스의 손위 형제인 에킨도르 멜킨도 매한가지였다.
선대 멜킨 백작이 검소하고 소탈한 성격이었던 걸 생각해 본다면, 에리스와 에킨도르의 이 권력 지향 주의가 어디서부터 유래되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일이다.
“생각해 봤는데, 황비 말고 공작도 괜찮은 것 같아요.”
“그건 곤란합니다.”
“어째서요? 이런 식으로 결혼을 무를 거라면 확실한 보상을 해 주셔야죠.”
“에킨도르 멜킨을 잡아 넘겨준 걸로는 부족했습니까?”
“그건 저한테 딸린 수많은 빚 중 하나를 드디어 갚으신 거고. 가문의 명예를 드높여 주시는 걸로 이번 일은 무마해 드리겠다고 제안드리는 거예요. 이 정도면 꽤 합리적인 거래 아닌가요?”
이르커스는 에리스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에리스는 정말 많은 부분에서 도움이 되는 인력이었다. 에리스가 만약 이르커스의 줄을 잡지 않고 라단타의 편을 들었다면 앙헬만큼이나 까다로운 상대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르커스는 제국법을 좀 제멋대로 주무르더라도 에리스가 바라는 대로 멜킨 후작가의 계급을 한 단계 더 높여 줄 의향이 있었다. 유안이 노발대발하며 법이 장난이냐고 드러눕지만 않았어도 다른 귀족들의 반발을 싹 무시하고 에리스가 바라는 대로 일을 처리했을 터였다. 그래야 에리스 멜킨이 불만을 말하러 황궁으로 뛰어오지 않을 테니까.
“대현자님이 안 된다고 하신 거죠? 12년 만에 폐하께서 황제다운 태도로 제 부탁을 거절하고 계셔서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저도 혼란스럽네요.”
“다른 부탁이라면 가능한 선에서 들어드리겠습니다. 차라리 영지를 하나 받아 두는 건 어떻습니까?”
에리스가 입을 가리며 우아하게 웃었다. 손해 보는 장사는 죽어도 하지 않겠다는 고상한 의사 표현이었다.
“제 혼삿길은 다 막혔는데 이러실 건가요?”
“……결혼할 생각이 있기는 했습니까?”
“그럼요. 가문을 이만큼 끌어올려 놨는데, 후계는 남겨야 손해를 안 보죠.”
이르커스는 그냥 말을 아끼기로 했다. 에리스 멜킨은 이르커스가 대화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분명 소백작일 때는 조금 더 순진한 구석이 있었던 것 같은데.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격된 뒤로 에리스는 이르커스에게 제 욕심을 드러내는 데 스스럼이 없었다. 황제를 격의 없이 대하는 걸로는 트리스탄 못지않았고.
“그러면, 작위 승격 대신 대현자님을 개인적으로 만나 뵙고 싶습니다.”
“대현자와는 현재 별도의 알현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비공식적으로 요청하는 거예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내내 ‘그냥 영지 하나 줄 테니까 받아 가’라는 태도로 일관하던 이르커스가 처음으로 에리스에게 경계를 내비쳤다.
에리스는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지 않기 위해 면면에 대외용 미소를 내걸었다.
로베인 제국의 황제들은 대대로 문제가 많았다. 한번 반역이 일어나 다른 가문이 황위를 찬탈했던 때에도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똑같은 문제들이 생겼다. 오죽하면 귀족들 사이에서 ‘광증이 없으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는 말이 떠돌았을까.
성군보다 폭군을 훨씬 많이 배출한 로베인 황실에서 기실 이르커스 정도면 제법 괜찮은 황제였다. 확실히 성군은 아닌데, 지난 황제들이 너무 사고를 많이 쳐 놔서 이르커스가 상대적으로 정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 유안이 뒤에서 정신 차리고 국정 운영하라고 이르커스를 잡고 흔들지 않았더라면 이르커스도 만만치 않은 또라이 황제로 전락하긴 했을 것이다.
그러니 평소 정상인 행세를 하고 있더라도 이르커스 역시 핏줄을 속일 수는 없었다. 대현자 얘기만 나와도 표정이 바뀌고, 누군가 대현자에게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노골적으로 경계한다.
그래도 약혼자라는 관계로 오래 묶여 있었고, 깨질 결혼이긴 했으나 국혼까지 올릴 뻔한 사이에 대현자와 만나게 해 달라고 했다고 표정부터 싸늘해지는 걸 보면 이르커스도 역시 제정신은 아니었다.
“협상을 좀 해 보려고 그러죠. 왜, 설마 제가 대현자님께 반하기라도 할까 봐 이러시는 거예요?”
“…….”
“진짜?”
“……그만 나가 보십시오.”
황제가 의부증이라고 말하면 사형일 테지.
에리스는 알현실을 나서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황궁 복도를 지키고 선 기사들이 그 모습을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에리스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황제와의 파혼으로 멜킨 후작에 대한 동정 여론이 형성돼 있으니, 에리스가 황궁 복도에서 광소를 터트린다고 하더라도 다들 파혼의 충격 때문에 저런다고 알아서 오해할 터였다.
????????????
“멜킨 후작이 파혼 보상에 대해 당신과 개인적으로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데.”
“엑.”
마시던 차를 그대로 뱉을 뻔했다.
이거 혹시 그건가? 내 남자를 가로채다니, 용서할 수 없어. 날 며느리로 간택해 놓고 이런 식으로 사람을 줬다 뺏는다니. 이펜하임 특산물로 담근 김치로 뺨을 쳐서 이 원한을 갚겠다!
등교 시간마다 본 한국 아침 드라마의 전반적인 줄거리가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멜킨 후작과는 언제 가까워진 거야?”
“내가 에리스 멜킨이랑? 가깝다고?”
“…….”
“별로 안 가까운데?”
찻물이 튀어나올 뻔한 입가를 손등으로 스윽 훔쳤다.
에리스와 가까운 건 이르커스지 내가 아니다. 그녀를 이르커스의 약혼 상대로 점찍어 에킨도르랑 손잡고 이르커스한테 소개해 준 건 나지만, 실제로 나와 에리스 사이에는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이르커스는 내가 만인과 다 친하다고 종종 이상한 오해를 하곤 했다. 내가 귀엽게 생긴 건 사실이지만, 본인처럼 끝내주는 미모를 가진 건 아닌데 어째서 저런 오해를 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이펜하임 대륙에서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다. 보통 나를 처음 대면한 사람들은 내가 대현자라는 사실보다 내 검은 머리에 대한 거부감을 먼저 드러내기 일쑤였다.
이르커스와 예카리나를 제외하고 이곳에서 가장 가깝게 지낸 상대는 대체로 인간도 아니었다. 나무 정령이랑 드래곤이지……. 돌이켜 보니 열 받네. 아무리 판타지 세계여도 그렇지, 사람을 왜 머리 색으로 판단하고 난리야.
“그럼 개인적으로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고 답변할게.”
“잠깐. 만나 보긴 해야지. 따로 물질적인 보상은 안 받고 나 만나서 얘기하는 걸로 파혼 문제를 묻을 수 있으면, 내가 열 번도 더 만나 줘야지.”
“그냥 영지 줄게. 광산이 매장돼 있는 걸로 주면…… 후작도 할 말 없겠지.”
“아니, 그걸 왜 줘? 손해 보는 장사하면 안 된다니까? 너 이 자식…… 나 없는 12년 동안 얼마나 해 처먹었어.”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수많은 전쟁 게임에서 직할령이 얼마나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세계사 중세 파트에서도 영지가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데! 땅은 현대 한국이나 판타지 세계나 다다익선이다. 특히, 토지세 낼 일 없는 황제라면 노른자 땅은 다 들고 있어야 한다.
내가 땅의 중요성과 귀족 세력 견제에 대해 일장 연설을 시작하자, 이르커스는 금세 풀이 죽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눈에만 풀 죽은 것처럼 보이고, 남들 보기에는 음울하기 짝이 없는 면면이었다.
나는 이르커스가 왜 이런 표정을 짓는지 안다. 내가 죽겠다고 난리 칠 때마다 이런 표정을 짓곤 했으니까. 나와 연관된 상황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비언어적 의사 표현이었다.
“너, 설마 질투해서 그래? 별것도 아닌 걸로?”
“…….”
진짜?
최선을 다한 회피를 마치고 내 감정을 인정하고 나자, 엄청난 문제가 새로 나타났다.
그간 어떻게 정상적인 척하고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이르커스는 질투가 엄청 심했다. 그냥 ‘엄청’이 아니라 ‘진짜 엄청’ 심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