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92화
아자젤 섀턴이 죽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자젤 카르만이 죽었다. 어린 고용인들만 골라 어떻게 한번 해 보려 들던 변태 새끼 노먼의 아들이지만, 자기 아버지와는 다르게 나름대로 멀쩡하고 총명하던 어린 소년의 죽음은 내게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마리아는 아자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정신을 못 차렸고, 라단타는 이르커스가 조절을 잘못한 탓에 흉부에 큰 부상을 입어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내가 라단타의 검에 대신 찔린 일에 연연하지 않는 줄 알았더니, 알게 모르게 마음에 깊이 담아 두고 있던 모양이다. 힘 조절이 되지 않아 너무 깊이 벴다고 말하는 이르커스의 얼굴은 일견 결백해 보였다.
(전)카만 왕족한테 엿 좀 먹였다고 나를 끈질기게 괴롭혔던 마법 사용 제약 역시 아자젤의 죽음과 함께 해결되었다. 당장 체내에 마나가 남아 있지 않아, 전처럼 마법을 자유자재로 쓰려면 회복 기간이 몇 년은 더 필요하겠지만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비마법사보다 마법사로 살아온 시간이 더 긴 탓에 마법 사용에 제약이 생긴 이후, 모든 생활이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불편했다. 이젠 적어도 내가 쳐 놓은 결계에 내가 발목이 잡히는 부끄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예상보다 더 빨리 마법 사용 제약이 풀렸으니 기뻐해야 하는데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자젤의 죽음에 사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아자젤과 길게 대화해 본 적도 없고, 아자젤 역시 본인이 카만 왕족의 마지막 남은 직계 핏줄이라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알지 못했으니까. 나도 에델라이드가 준 서류에 적힌 내용이 아니었다면 아자젤과 노먼의 연관성을 단번에 떠올리지 못했을 터였다.
그럼에도 아자젤의 신변과 죽음이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르커스는 분명 구할 수 있었는데도 아자젤을 살리지 않았다. 이르커스 입장에서는 아자젤의 목숨보다 내 마법 계약 페널티가 사라지는 게 더 중요했을 테니까.
라단타도 따지자면 이르커스에게 이용당한 거다. 라단타가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었고, 젊었을 때만큼의 머리가 남아 있었더라면 그도 아자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끝내, 이르커스는 자기 손에 명분 없는 피는 묻히지 않았다. 황제로서는 훌륭한 판단이었다. 내가 그렇게 가르쳤고, 이르커스는 그 가르침을 받은 대로 인간성에 연연하지 않는 어른으로 자랐다.
나는 어린 이르커스에게 사람의 소중함을 배우고, 이르커스는 과거의 내게서 불필요한 인간성을 버리는 법을 배웠다.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었다.
“헤누스교 신관을 불렀어. 중상이긴 하지만, 신관 몇 명이 붙으면 상처는 금방 회복될 거야.”
“내가 치료 마법 써도 되는데.”
“제약이 완전히 사라진 건지 아닌지 알아볼 시간도 필요하잖아. 당장은 마나도 모자랄 테고.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마법 쓰지 말고…….”
내 심란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르커스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법 제약 풀렸다고 철부지 마법사처럼 아무 마법이나 막 쓰지 말라는 잔소리가 따라왔다.
“있잖아, 이르.”
“응.”
“네 결혼 말이야. 라단타 문제가 정리되면 그대로 진행할 거니?”
라단타가 반역죄로 사형당하고 나면 에리스 멜킨과 이르커스는 다시 국혼을 치러야 한다. 맹세의 서약이고 뭐고, 시작과 동시에 라단타가 들이닥쳐 결혼이 아주 박살 났으니까.
이르커스가 날 얼마나 사랑하든 간에 황제 노릇을 하려면 어찌 됐든 권위를 받쳐 주는 배우자가 있어야 했다. 국가와 결혼했노라고 선언한 모 통치자를 어설프게 따라 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인제 와서 결혼을 무르는 건 안 되겠지.”
“…….”
“에리스 말고, 그냥 로베인 제국과 결혼하겠다고 그래.”
에리스 멜킨이 듣는다면 권력으로부터 자기를 멀어지게 만든다며 혈압이 올라 쓰러질 만한 소리였다. 라단타가 붙잡혔음에도 어딘가로 도주한 에킨도르 멜킨을 못 잡은 탓에 에리스는 요즘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에리스가 이르커스를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전략적으로 부부가 되는 건 확실히 나쁘지 않다. 더구나 욕심도 많고, 머리도 잘 굴린다. 정치 수완까지 좋으니 이르커스와 결혼한다면 황비로서 훌륭하게 국정을 수행할 것이다. 최고의 며느릿감이란 소리다.
이 전부를 다 알면서도 내 입에서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마음이 심란한 탓에 입이 통제가 안 되는 중이었다.
머리가 입을 향해 기함하며 ‘너 이 자식 미쳤어?’ 하고 경고음을 보내고 있었으나, 머리와 따로 놀기 시작한 입은 내 통제를 벗어나, ‘그래, 나 미쳤다!’ 하고 싶었던 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전에는 나랑 결혼할 거라고 했다면서.”
“…….”
“내 말은, 그러니까…… 아니다. 내가 미쳤나 봐. 방금 대화는 모두 잊어라. 황제라면 결혼은 해야지.”
간신히 통제권을 되찾은 머리가 올바른 말을 출력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르커스는 아무 말 없이 혼자 횡설수설하는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나는 이 시선이 뭘 뜻하는지 잘 안다. ‘너 어디까지 하나 보자’라는 시선이다.
“유안, 나는 이제 열두 살이나 열일곱 살이 아니야.”
“알아. 스물아홉이잖아.”
“그래. 그리고 이젠 당신처럼 더 늙지도, 죽지도 않겠지. 당신이 진절머리를 내도, 죽어 버리라고 애원해도 곁에서 함께할 거야.”
“…….”
“내가 언젠가 죽기 때문에 내 사랑에 답할 수 없다는 회피는 이제 불가능해.”
이르커스가 내게 손을 뻗었다. 내 뺨을 감싸는 큰 손은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체온이 높았다.
“그냥 나를 사랑한다고 해 줄 수는 없어?”
“나는…….”
“더 이상 변명거리도 없잖아.”
나는 이르커스의 손에 얼굴을 반쯤 파묻은 채로 숨을 들이켰다.
이르커스의 말대로 백기를 든 채, 내 감정을 인정해 버리고 죄책감은 모르는 척 뒤로 미뤄 두고 싶었다.
이르커스는 툭하면 여기저기로 도망치기만 하는 나를 너무 오래 기다렸다.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다른 사람이랑 살림을 차려도 두 번은 차렸을 시간이었다.
“나는 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지만, 해결해야 할 것들이 여전히 한가득 남아 있었다.
이르커스에게 말해 줘야 할 이야기들. 쥬리아가 네게 저주를 걸었고, 나는 사실 네가 소설 속 주인공이라는 걸 알고 널 도와준 거라고. 나 때문에 올곧았던 네가 잘못돼 버린 거라고 털어놔야 했다.
사실을 제대로 말하지 않고, 또 내 판단으로만 움직이면 이르커스를 계속해서 상처 입힐 게 뻔했다. 테리즈와 에델라이드, 라일라와 마리아를 보며 느낀 점이 있지 않던가.
“난 겁이 많나 봐.”
검에 찔리는 건 수도 없이 경험해 봤고, 목이 날아간 적도 있는데 이런 게 겁이 난다니.
영원불멸을 살아가는 대현자면서, 고작 사랑한다고 인정하게 되면 이르커스와의 관계가 예상치 못한 방면으로 흘러가게 될까 봐 무서웠다.
시작도 전에 끝을 생각하는 인간만큼 연애에 부적합한 사람이 없다던데, 내가 그런 종류의 사람인 것 같았다.
이르커스와 관련된 모든 감정이 날 두렵게 했다. 세상 사람들이 다들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자기 세계가 무너지고, 남의 세계를 무너트리는 감각을 다들 어떻게 견디고 사는 건지.
“내가 널 남쪽 숲에서 처음 만났을 때, 무슨 생각 한 줄 알아?”
“아니.”
“이 세계의 주인공이 드디어 등장했다.”
그때만 해도 이르커스와 이런 사이가 될 줄은 몰랐다. 일종의 계약직 보호자로서 피보호자를 황제로 만들어 준 다음에 죽을 생각만 가득했으니까.
당시의 나는 삶에 너무 지쳐 있었다. 영원을 견디기 어려웠고, 누구의 손에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죽고 싶었다.
그래서 이르커스가 좋았다. 이 세계의 주인공이라서, 나를 죽여 줄 수 있는 사람이라서, 예카리나의 후손이자 황제가 될 재목이라서.
“네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너라면 나를 죽여 줄 수 있을 테니까 잘해 줬던 거야. 다른 열두 살짜리가 남쪽 숲으로 들어왔다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겠지. 제자로 삼아 주지도 않았을 거고, 나무 정령들한테서 구해 주지도 않았을 거야.”
이르커스는 잠자코 내 말을 듣기만 했다. 뺨에 닿은 손이 드문드문 손끝으로 내 눈가 아래 여린 살을 쓸어 주었다.
“너, 이런 인간을 영원히 사랑할 자신 있어?”
나였으면 절대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 거다. 물론, 나 정도면 두뇌 명석하고 나름 귀엽게 생겼으니 어딜 가나 수요는 있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성격이 너무 별로였다.
정의롭지도 않고, 손해 보기도 싫어한다. 미래를 끊임없이 걱정하고, 기운이 빠지면 드러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어려운 문제가 닥치면 어떻게든 해결하려고는 들지만, 할 수 있는 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회피한다.
어딜 봐도 좋은 성격은 아니다. 주변 사람을 질리게 하기 딱 좋은 성질머리였다. 게다가, 오래 살 만큼 산 덕에 나이 많은 사람 특유의 아집과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당신이 놓친 게 있어.”
“……놓친 거?”
“나도 당신이 아니었으면 따라가지 않았을 거야.”
뺨을 쓸어 주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당신이 그런 인간이라서, 사랑하게 된 거고.”
“…….”
“내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라면, 내 세계는 당신이 되겠지.”
정통 판타지 소설의 성장형 먼치킨 주인공들은 열에 여덟 정도 정의롭다. 특히나 오래된 판타지 소설일수록 더 그렇다. 선을 따르고, 악을 물리친다. 믿음직한 동료들을 곁에 두고, 비열한 짓을 저지르거나 권모술수를 계획하지 않는다. 그건 주인공답지 않은 일이니까.
하지만, 정통 판타지 소설이 아닌 나만의 주인공 이르커스는 완전무결하지 않다. 이르커스는 필요하면 사람을 죽이는 데 스스럼이 없었고, 남을 이용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 냈다.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답지 않은 이르커스 사크리나 로베인. 내가 키워 낸 흠결 많은 주인공.
“이상적인 주인공이 아니라서 실망했어?”
나의 주인공이 내게 묻는다.
“아니.”
풀이 방식을 제대로 몰랐을 뿐, 나는 저 물음의 답은 확실히 알고 있다. 어떤 난제도 몇 세기가 지나면 결국 풀리기 마련이니까.
“그런 주인공이라서……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