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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91화 (91/106)
  • 대현자는 죽고 싶어 91화

    라일라를 트리스탄에게 넘기고, 이르커스를 찾아 밖으로 나왔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음에도 아카데미 학생들은 하나같이 나를 알아봤다. 황제랑 같이 행차했으니, 못 알아보기도 어렵겠지.

    “정말 대현자님이세요?”

    개중에는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그럼 가짜 대현자일까 봐?’라고 대답하려다, 내 싸가지 없는 화법을 고치고자 선선하게 웃으며 ‘그렇단다.’라고 응수했다.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나서 나름대로 할머니들한테 사랑 받는 귀염둥이 화법을 구사하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시니컬하게 말하는 대현자가 됐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내 대답을 들은 학생은 귀 끝을 붉히며 소란스럽게 제 친구들에게로 달려갔다.

    마법도 못 쓰는 상태의 대현자가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저렇게 난리인가 싶어 우스웠지만, 저 무렵에는 원래 굴러가는 낙엽만 보고도 웃음이 난댔다. 학교든 군대든 졸업이나 제대 직전만 되면 다들 마음속 나사가 느슨해진다고 하니까.

    나는 흐뭇하게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우리 이르커스도 저렇게 귀엽던 시절이 있었지.

    “그럼, 대현자님이 정말 황제 폐하랑 결혼하시는 거야?”

    “아니지, 대현자님은 그냥 정부라고. 남자끼리 어떻게 결혼을 해?”

    “남자인 게 뭐 어때서? 제국법이야 황제 마음이지. 그리고, 대현자잖아? 당연히 결혼해서 전략적으로 옆에 묶어 둬야지!”

    학생들을 흐뭇하게 본 지 30초도 지나지 않아, 학생들끼리 내가 이르커스와 결혼할지 안 할지로 말싸움이 시작됐다. 내 흐뭇함은 결국 30초도 유지되지 못했다.

    왜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항상 그토록 피곤해 보였는지 완벽하게 이해가 갔다. 어린 녀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나는 괘씸한 학생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비록 아카데미가 쑥대밭이 됐어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꼰대 발언을 내뱉기에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아자젤은 어디 갔어?”

    하지만 내가 잔소리할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똘망똘망해 보이는 학생 하나가 대화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 버렸다.

    덕분에 나는 타이밍을 놓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학생들의 대화를 조금 멀리서 훔쳐 듣는 어른이 되고 말았다.

    “마리아 님이랑 같이 외출했다던데.”

    “아까 마리아 님이랑 뒷문으로 나가는 거 봤어.”

    “그럼, 역시 마리아 님과 아자젤도 이 일에 엮인 거네. 반역자로 몰리려나?”

    “설마. 아까 선생님들이 그랬는데, 마리아 님은 반역과 정말 아무 관계 없대.”

    “에이, 그래도 반역자와 한 핏줄이라 폐위까지 당한 거잖아. 아카데미에서 쫓겨나실 수도 있어.”

    얼떨결에 애들 말을 엿듣는 처지로 전락했지만, 그래도 전혀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마리아와 아자젤이 뒷문으로 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

    라단타와 동행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나로선 라단타의 행방보다는 마리아와 아자젤의 안전 쪽이 더 신경 쓰였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어느 쪽이 뒷문 방향일지를 잠시 고민했다. 길을 잃을 것도 없는 작은 아카데미지만, 처음 와 본 곳에서 마법을 안 쓰고 정확한 장소를 찾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길을 못 찾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무작정 가는 게 아니라, 길을 알 만한 사람한테 묻는 것이다.

    나는 도로 재잘거리는 학생 무리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애들아. 너희 공부하러 안 가니?”

    “대현자님이 왜…….”

    “계속 그렇게 서서 게임 NPC처럼 떠들 거면 내 일일 내비게이션 좀 해 주렴.”

    “네?”

    “뒷문이 어디야? 앞장서라.”

    ????????????

    “항상 네게 묻고 싶었어. 왜 나를 배신했지?”

    “그게 무슨 소리세요? 배신이라니…….”

    “네 배신이 어머니와 조부님께 무슨 영향을 끼쳤는지 돌이켜 봐라. 나는…… 한 핏줄이니만큼 형제 중에서 널 가장 아꼈는데.”

    학생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뒷문을 넘어, 아카데미 근처에 위치한 번화가로 나온 것까진 좋았다.

    마침 거리에서 라단타의 미약한 마나 흐름을 잡아, 번화가 뒷골목에 있는 빈민촌까지 잘 찾아온 것도 좋다 이거다.

    그런데 막 도착했을 때, 라단타와 마리아 사이에 남매 이벤트가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도저히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하고 내 입이나 틀어막았다. 오늘 타이밍 왜 이래.

    주위를 둘러봤지만, 이르커스는 보이지 않았다. 얘는 라단타랑 마리아가 여기에 있는데 어디 가서 찾고 있는 거람.

    나는 혀를 차며 마리아와 라단타 사이에 어중간하게 낀 아자젤만 안타깝게 바라봤다. 있어야 할 이르커스는 없고, 남의 집안싸움에 등 터지고 있는 아자젤만 보였다.

    “물론, 오라버니는 항상 제게 잘해 주셨죠. 그래도 같은 핏줄이라고 죽이거나 내쫓지는 않으셨으니까.”

    “…….”

    “하지만, 전 그때 고작 여덟 살이었어요. 계획적으로 배신할 만큼 머리가 좋은 편도 아니었고요. 지금 오라버니는 피해망상에 빠져 계신 거예요.”

    말 잘한다. 나는 거리를 두고 숨은 채로 마리아가 라단타를 말로 때리는 걸 구경했다.

    라단타 쟤도 젊었을 땐 나름 영특한 구석이 있었는데, 황위 차지에 실패한 뒤 방랑하면서 총기를 잃어 저렇게 남 탓이나 하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았구나.

    악역인 데다, 썩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툭하면 자기 문제에 남을 끌어들이는 놈이니 붙은 정도 없지만, 그래도 마음이 안 좋기는 했다. 12년은 내게 찰나와 같은 시간인데, 내가 알던 사람들은 라단타와 마찬가지로 너무 쉽게 변해 버렸다.

    “너, 확실히 변했구나. 마리.”

    “전 늘 한결같았어요.”

    “변했으니 친혈육인 내가 아니라 이르커스한테 붙어, 날 팔아넘긴 거겠지.”

    “팔아넘기다니요? 지금 저와 어머니가 오라버니를 얼마나 물심양면으로…….”

    엄마가 아침마다 챙겨 보던 막장 드라마가 눈앞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흥미진진하긴 한데, 이대로 가만히 지켜봤다간 라단타가 마리아를 죽일 것 같았다. 아직 정식 서임을 받기 전이긴 해도 마리아 역시 기사지만, 라단타도 황궁에서 오랜 시간 검술 교육을 받았다. 교육 기간만 따지자면 마리아보다 라단타가 검을 쥔 시간이 더 길었다.

    거기다 두 사람은 체격 차도 꽤 있었다. 마리아도 여성치곤 키가 큰 편이지만, 라단타는 막 스무 살이 된 마리아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그러니 라단타가 마음먹고 덤비면 마리아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마법을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로브를 뒤져 보면 언제 넣어 뒀는지 기억도 안 나는 마도구 몇 개가 떨어지긴 할 테지만, 마도구를 찾는 동안 마리아가 죽게 생겼으니 나도 마음이 급해졌다.

    “마리아 님께 그 더러운 손 떼세요!”

    그러나 내가 나서기 전에 먼저 마리아의 앞을 막아서는 존재가 있었다. 아자젤은 벌벌 떨면서도 라단타와 마리아 사이에 끼어들어 마리아를 지키려고 했다.

    “유안.”

    라단타, 쟤도 참 독하다. 흑화한 악역은 여동생과 열다섯 살짜리를 상대할 때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화풀이하는 꼴을 보고 있으니 사이다 없이 고구마를 세 개쯤 집어 먹은 것처럼 속이 답답해졌다.

    이러다간 아자젤도 죽겠다 싶어 냅다 나서려는데, 누가 등 뒤에서 한 팔로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나도 어디 가서 절대 작다는 소리 듣고 살지 않았는데, 발끝이 땅에서 한 뼘 정도 덜렁 들렸다.

    뒤에서 반쯤 안겨 들린 탓에 딱 붙은 몸에서 익숙한 체온이 느껴졌다.

    나를 이렇게 짐짝처럼 안아 드는 건 단 한 명뿐이지만, 그래도 당황한 탓에 말이 안 나왔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내가 저 사이로 뛰어들려고 하자마자 이르커스가 튀어나온 것이다.

    이미 와서 지켜보고 있었구만…….

    나는 너무 큰 소리가 나지 않게끔 이르커스와 몸을 밀착한 채,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언제 왔어?”

    “처음부터 있었는데.”

    “처음부터? 저거, 안 말려도 돼?”

    “집안싸움에 함부로 끼면 안 좋다며.”

    그건 그렇지. 그런데, 저거 너희 집안이잖아…….

    뭐라고 한 소리 하려는데, 라단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도 내가 만만해?”

    야, 이거 너무 한국적이다.

    나는 다시 한번 판타지 세계에서 고국의 정취를 느꼈다. 싸우다 말문 막히면 나오는 단골 대사 3위. ‘너도 내가 만만해?’가 나오고 말았다. 자매품으로는 ‘너도 내가 우스워?’가 있다.

    내가 고국의 정취를 느끼든 말든, 아자젤은 마리아 앞에 서서 힘겹게 라단타의 검을 받아 내기 시작했다.

    마리아 역시 검을 꺼내 들었지만, 아무래도 제 친혈육을 향해 검을 겨눌 용기가 부족해 보였다. 말로는 두드려 패도 검으로 찌를 만큼 증오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마리아가 라단타를 죽이면, 라일라가 제정신으로 살아가지 못할 테니 그런 부분도 걸릴 것이고.

    내가 기억하기로 라단타는 본인 말마따나 어린 마리아를 꽤 아꼈다. 아끼는 이유가 여동생을 외교용 정략결혼 도구로 팔아넘기려고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핏줄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애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마리아를 죽이거나 내쫓지는 않았으니까.

    “이르, 이제 그냥 라단타를 붙잡자. 저놈을 법의 심판대에 세워야겠어.”

    “내가 지금 잡으면 그는 사형이야.”

    “알아. 그래도 아자젤이나 마리아가 죽는 것보다는 라단타가 제국법에 따라 사형당하는 게 낫지.”

    “…….”

    “가라, 이르커스.”

    마법을 못 쓰지만, 내게는 아직 포×몬처럼 쓸 수 있는 세계관 최강 먼치킨 제자가 남아 있다.

    내가 등을 떠밀자, 이르커스는 못 살겠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서 있는 자리에서 검을 빼 들었다.

    누가 마검사 아니랄까 봐, 검을 드는 것만으로 마나의 흐름이 달라졌다. 동시에 라단타가 당황해 아자젤을 공격하던 것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우리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네가 기어코 나를 배신했구나!”

    역시 악역답게 남 탓하는 게 장난 아니었다. 검을 들고 저벅저벅 라단타를 죽이러 가는 건 이르커스인데, 라단타는 마리아를 향해 노발대발 화를 내고 있었다.

    나는 기차 화통을 삶아 먹기라도 한 것처럼 크게 소리치는 라단타의 목소리에 기가 질려 귀를 틀어막았다. 내가 마법만 쓸 수 있었어도, 아무 말 못 하게 침묵 마법을 싹 걸어 주는 건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비명이 들렸다. 나는 이르커스를 따라 라단타와 마리아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라단타가 아니라, 마리아가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아자젤이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에리스와 이르커스의 국혼에서, 라단타의 검에 찔린 내가 저런 식으로 쓰러졌을까?

    아자젤이 쓰러지는 모습이 이르커스 안의 무언가를 자극한 것 같았다. 더 이상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피가 바닥에 튀고, 소란에 놀란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고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란 속에서 이르커스가 라단타의 가슴을 베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르커스는 분명히 아자젤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간섭할 수 있었음에도 그저 지켜보았다.

    저런 방관자적 태도는 과거, 내가 이르커스에게 직접 가르쳐 준 거였다. 사람은 언젠가 죽고, 필요하지 않은 일에는 구태여 관여하지 말라고.

    “…….”

    묘하게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게 <이르커스의 서>에 나오는 장면이었다면, 이 장면은 무언가 꼬여도 잔뜩 꼬여 버렸다.

    악역은 정말 악역다운데, 주인공은 전혀 주인공답지 않았다. 이래도 되는 걸까? 머릿속에 떠오른 불안이 다시 내 가슴을 아프게 내리눌렀다.

    우리가 서로를 계속 망쳐도 되는 걸까?

    이르커스에게 묻고 싶었다. 넌 세계의 주인공이었는데, 나만의 주인공으로 전락하고 말았어. 이래도 괜찮은 걸까. 이걸로 충분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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