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90화
이게 거울 치료라는 걸까?
아들 하나 살려 보겠다고 무리한 짓을 저지르는 전 황비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천 갈래로 박박 찢기는 느낌이었다.
“총만 돌려주신다면 라단타를 굳이 추적하지 않겠습니다.”
“…….”
“그는 제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합니다. 왕관을 쓰게 된들, 얼마 안 가 다른 이에게 빼앗기게 될 만큼 정신도 나간 상태죠.”
바닥에 주저앉아 일어나지도 못하는 전 황비 앞에 이르커스가 몸을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훔친 총으로 남을 쏘고 자살하려고 했던 상대를 대하는 것치곤 어조가 친절했다. 물론 어조만 친절할 뿐, 그 내용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지만.
하지만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라단타는 황위에 어울리지 않았다. 젊은 시절의 총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아집밖에 남지 않은 얼굴이었으니까.
라단타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다. 황제가 되더라도 삼일천하에 불과할 것이고, 힘들게 자리에 오른들 기대하는 것만큼 호의호식하고 살 수 없으리라는 것도.
그럼에도 포기하지 못하는 건, 한평생 그것만 바라보고 산 탓에 다른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겠지.
인생에 목표가 ‘황제 되기’밖에 없던 사람인데, 그 목표가 좌절되면 과연 제정신으로 살 수 있을까?
수없이 ‘죽음’이라는 인생 목표를 코앞에서 좌절당해 본 나로서는 라단타가 저토록 가망 없는 황위에 집착하는 게 놀랍지는 않았다. 원래 가망이 없으면 집착이 커지기 마련이다.
에리스 멜킨이 황위를 넘보는 것과 라단타가 황위를 바라는 것은 엇비슷해 보여도 아예 궤가 다르다.
전자는 가능성이 있고, 후자는 아예 희망조차 없다. 평범한 사람이 죽고 싶어 하는 것과 내가 죽음을 바라는 것이 엇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것처럼, 라단타는 아주 희박한 가능성에 제 모든 걸 걸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제 그는 자기 아집에서 벗어나거나, 억지로라도 다른 목표를 찾아내야만 그나마 제정신을 유지하고 살 수 있다.
나는 아예 엎드려 울기 시작한 전 황비를 내려다보았다.
“이르, 이 사람이랑 대화를 좀 하고 싶은데.”
“……왜? 내가 설마 죽일까 봐?”
이 자식, 왜 또 눈깔 음울해지냐. 남이랑 대화 좀 하겠다니까 대놓고 우울해지는 걸 보니 중증이었다.
나는 내게서 떨어질 생각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이르커스의 등을 냅다 떠밀었다.
“내가 설마 널 못 믿겠니?”
“…….”
“또 시선으로 호소 그만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나 찾아봐.”
라단타를 그냥 놔주더라도 마리아가 안전한지는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전 황비는 입을 꾹 다물고 ‘마리아는 관계없다’라고 말했지만, 상대가 안쓰러운 것과 별개로 그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다.
내 경험상 이런 문제는 8할의 확률로 온 가족이 다 엮여 있기 때문이다. 가족만 엮여 있으면 차라리 다행이고, 가족 일에 남들 머리채까지 잡고 끌어들이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마리아 찾기 전까진 돌아오지 말고.”
“당신, 마리아랑은 언제…….”
“언제 친해졌냐고? 안 친해. 근데, 너랑 친하잖아. 네가 가르친 애라며.”
“…….”
“자, 착한 제자는 스승님 말을 잘 들어야지?”
이르커스가 엄청나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든 말든, 나는 총만 회수해 돌아가려는 이르커스를 계속 떠밀었다.
황제가 됐으면 할 일을 다 하도록 해! 이복동생이라도 피가 절반쯤 섞였으면, 순순히 구하라고!
????????????
전 황비는 나와 단둘이 남게 되자, 눈물을 그쳤다. 대충 봐도 더 울 힘조차 남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낡고 좁은 아카데미만큼이나 노쇠해 보였다. 한때 황제의 배우자로서 권력을 쥐어 봤던 사람답게 귀부인 특유의 우아함은 여전했으나, 금발이라고 해서 새치가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당신, 이름이 뭐더라?”
“……예?”
“미안. 내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거든.”
분명 12년 전에는 알았는데 까먹었다. 어쩔 수 없다. 고해하자면, 사실 나는 아직도 라단타의 미들 네임을 외우지 못했다.
러일 전쟁이 1904년에 발발한 건 기억나는데, 남의 중간 이름은 이토록 못 외우는 걸 보면 내 기억력은 아주 편파적이었다. 입시에 도움 안 되는 건 뒤도 안 돌아보고 잊던 습관이 사라지지 않은 탓이다.
자주 보고 불러야 기억이 나지, 직접 대면할 일도 거의 없는 사람의 얼굴과 이름은 내 머릿속에서 금방 휘발돼 버렸다.
폐위됐다고 해도 따지자면 한때 공녀였고, 황비였는데, 대현자쯤 되는 인간이 본인 이름을 전혀 모른다고 하니 전 황비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만했다.
“……라일라입니다.”
라 돌림 자야, 뭐야. 여기도 항렬 같은 거 따지나?
정말 기억 안 나서 물어본 건데, 전 황비는 내가 자기를 시험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우느라 기운이 빠져 있던 몸이 금세 경계 태세로 전환된 것으로 보아, 라일라도 황비답게 정신없는 황궁 생활을 보냈나 보다.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남의 질문을 곧이곧대로 듣기도 어려웠을 거고, 자포자기한 상태로도 내가 왜 이르커스를 박박 우겨 쫓아내고 자기와 독대하기를 원했는지 잔뜩 머리 굴려 가며 고민 중이겠지.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난 마탄에 맞아도 안 죽거든.”
“그건…… 정말 죄송합니다.”
“뭐, 좀 괘씸하긴 한데…… 괜찮아. 사실 당신을 이해 못 할 것도 없거든. 한 50년 전에 이랬으면 낙뢰 좀 내리쳤겠지만.”
“낙뢰…… 말인가요?”
“그 시절에 내가 인간을 좀 싫어해서. 아무튼, 지금은 그럴 생각 없어. 그냥 몇 가지 궁금해서 당신이랑 대화하고 싶었던 거야.”
라일라가 아들인 라단타를 살려 달라고 부탁했을 때부터 나는 이게 너무 궁금했다.
“마리아도 당신 친딸이지?”
<이르커스의 서>는 무척 구닥다리다. 누가 쓴 소설인지 작가 이름조차 기억 안 나지만, 전자책도 아니고 종이책으로 17권이나 출판된 걸로 봐서 출간된 지 꽤 오래됐을 것이다.
내 아버지가 구매한 도서로 보였으니, 그 시절 감성과 가치관이 반영되었을 수밖에 없다. 원작 시작 시점 4세기 전에 들어왔을 때는 노예 제도까지 버젓이 남아 있던 걸로 봐서는 그나마 지금이 나아진 거다.
게다가 한국 작가가 쓴 거니, 판타지의 탈을 쓰고 있어도 묘하게 한국적인 부분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부부의 이름만 봐도 그렇고, 굳이 많고 많은 색 중에 검은색 눈과 머리만 저주 받았다는 설정도 그렇다.
황위나 작위 계승이 남성에게 우선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비슷한 맥락이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그냥, 궁금해져서. 라단타를 살려 보겠다고 마리아를 위험하게 만드는 이유가 말이야.”
“…….”
“베첼 공작은 라단타를 위해서 마리아를 도구처럼 쓰려고 했다던데. 당신도 그래?”
탓하려고 묻는 게 아니라, 그냥 궁금했다. 라단타를 위해 죽음까지 결심한 사람이, 왜 마리아를 위해서 살아갈 생각은 못 하는지.
충분히 오래 살았는데도 나를 포함한 인간의 복잡한 심리는 온전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나이 먹는다고 없던 지혜가 강제로 생기지는 않는 모양이다.
이르커스를 위해 죽을 결심은 할 수 있으면서도, 함께 살아갈 각오는 다지지 못한 나와 비슷했던 걸까? 아니면, 같은 자식이어도 황제가 될 확률이 높은 아들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더는 눈물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는데, 라일라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비난하는 말처럼 들렸나 보다.
나는 내 화법에 큰 문제가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방금 되게 친절하게 말하지 않았나? 왜 울지?
위로에는 소질이 없기 때문에, 그냥 입을 다물고 우는 상대를 앞에 둔 채로 울음이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대현자님께서는…… 자식이 없으니 이해 못 하실 겁니다.”
자식이 없긴 왜 없어. 친자식은 없어도 자식새끼 키워 봐야 소용없다는 점에서 유사 자식인 이르커스는 존재한다.
라일라가 탈수 직전 상태로 훌쩍거리고 있지 않았더라면, 바로 반박부터 했을 것이다.
넌 나랑 이르커스가 무슨 사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일단은 사제 관계지만, 유사 가족이라고. 물론, 가족끼리 키스는 안 하겠지만……. 어쨌든, 사랑이란 커다란 분류 안에서 나는 라일라를 이해했단 말이다.
하지만, 나의 이 억울함은 라일라에게 전혀 닿지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나는 살 만큼 살아 놓고 자손 하나 남기지 않은 쑥맥 대현자에 불과할 테니까.
“마리아는 제가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아이지만, 지금 라단타는 그런 상태가 아니니까…….”
어떻게 이토록 한국적일 수가. 역시 가장 한국적인 게 가장 판타지스러운 것이다.
마치 변명하듯 ‘그래도 마리아는 제 앞가림을 잘하는 아이’라고 말하는 게 무색하게도 라일라의 고개는 점차 땅으로 향했다.
저러다 또 울겠다 싶어, 로브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져 언제 넣어 뒀는지 기억도 안 나는 손수건을 찾아 내밀었다.
“됐어. 뭐라고 탓하는 게 아니라, 그냥 궁금했던 거라니까. 당신도 죽을 결심은 쉽게 하면서 살아갈 각오는 없어 보여서.”
손수건을 받아 든 라일라는 그 손수건을 쓰지 않고 손에만 쥐고 있었다. 겉보기엔 깨끗한데, 언제 넣어 둔 손수건인지 모른다는 게 티가 났나 보다.
나는 이 어색한 독대의 장을 그만 마무리해 줄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현자님.”
“응?”
“라단타는 항상, 현 황제를 부러워했습니다. 저는, 그냥…… 그 애가 얻고 싶어 하는 것들을 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어정쩡하게 서 있는 상태로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어이가 없었다.
그야 남의 떡이 더 커 보여서 부러워한 거지. 이르커스한테 대현자라는 배경이 생기고, 겸사겸사 트리스탄 일행처럼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가 생겼으니 부러움이 생겼을 뿐, 그 외에는 어디로 보나 라단타의 시작점이 월등하게 좋았다.
“최근에는 그런 소리도 하더군요. 자기는 꼭 세상의 조연인 것 같다고.”
눈치는 여전히 좋구나. 라단타가 조연인 건 맞다. 주인공은 이르커스니까. 제목부터가 <이르커스의 서>인데 주인공이 라단타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마 저는 대현자님처럼 좋은 보호자가 되어 주지 못한 거겠죠. 라단타에게든, 마리아에게든.”
솔직히 말해서 나는 라일라가 자기 자녀들을 차별하며 키웠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남의 집안 문제에 간섭할 생각도 없거니와, 듣다 보면 라일라보다 라단타 그 새끼가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가진 게 많다 못해 넘쳐났던 놈이 제 마음대로 일 좀 안 풀린다고 열등감에 빠져서는 이르커스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게 같잖았다.
“이런 말 하기 미안하지만, 라일라.”
“…….”
“지금이라도 마리아나 챙겨. 걘 대체 무슨 죄야?”
상대는 울기만 하고, 나는 내 화법에 커다란 문제가 있음을 깨달은 독대 자리였지만 그래도 꽤 얻어 낸 게 있었다.
거울 치료는 정말…… 영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