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89화
어렸을 때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말에 회의적이었다.
우리 엄마가 내 세뱃돈 다 뺏어 가는데 어떻게 부모가 자식을 이기지 못한단 말인가? 내가 엄마를 이길 수 있었으면 내 세뱃돈은 엄마의 주머니가 아니라, 내 용돈 기입장에 적혔어야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보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400살 생일에 이르커스를 제자로 거두면서 나도 보호자의 심정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된 것이다. 부모님을 이해하기 위해 대략 380년 정도가 소요됐다는 걸 안다면, 엄마 아빠 둘 다 고혈압으로 쓰러질지도 모르지만.
그러니, 전 황비의 비이성적인 선택에 대해서 내가 뭐라고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세상에는 피보호자를 내팽개치고 자기만 호의호식하려는 보호자도 있다. 어린아이에게 가혹하게 굴거나, 심지어는 폭력을 행사하는 개새끼들도 천지에 널려 있고.
하지만 실제로 그런 놈들보다 피보호자를 사랑하고 아껴 주는 보호자가 더 많았다.
엄격하게 꾸짖을지언정 책임감을 품고, 아이를 바르게 키우려는 어른들. 조금은 어그러진 애정일지라도 냉담과 무시보다는 관심과 친절을 내비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들.
전 황비도 그냥 제 자식들이 사지로 뛰어나가는 꼴을 두 눈 뜨고 못 보는 보호자에 불과할 뿐이었을 테다. 에델라이드를 살려 달라고 내게 와서 간곡하게 부탁하던 테리즈가 그랬고, 이르커스 때문에 죽음이 저 멀리 물 건너가 버린 내가 그렇듯이.
“아카데미가 뭐 이렇게 작아?”
“학생 대다수가 평민이니까.”
“……으, 지긋지긋한 계급 사회.”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가 이 아카데미보다 넓겠다. 한 2세기 전에 방문했던 귀족 전용 아카데미는 여기보다 네 배쯤 넓었던 것 같은데.
“거, 대현자는 가끔 다른 세상 사람인 것처럼 말을 한다니까. 계급 사회든 뭐든, 영향도 안 받으면서.”
“영향을 안 받기는. 나, 시작은 노예였잖아.”
“시작은?”
“아무튼. 난 계급 사회를 욕해도 된다고.”
금세 납득하는 트리스탄과 달리, 이르커스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다.
이펜하임 대륙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이 이도 저도 아닌 판타지 세계를 별 어색함 없이 받아들인다.
중세 유럽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대 한국도 아닌데 기기묘묘하게 중세 유럽과 현대 한국의 나쁜 점만 엉망진창으로 섞여 있는 세계관에도 잘만 적응해서 산다는 뜻이다.
물론 종종 에델라이드처럼 영웅적인 특성을 가진 인물이 등장해, 이렇게는 못 살겠다며 세상을 뒤집어엎기도 했다. 하지만, 규범과 사회 질서에 적응한 인간들은 대체로 왜 사회 구조가 이렇게 돌아가는가에 대해서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니, 남들 보기에 사사건건 이 세계의 어떤 부분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나는 이상해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통은 그냥 대현자라서 그런가 보다, 라고 넘기지만 이르커스한테는 이 대현자 수법을 너무 우려먹어서 이젠 통하지도 않았다.
말조심 좀 하고 살아야 하는데. 새해마다 ‘죽어야지’ 발언 안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보다 판타지 세계의 대현자스러운 언행을 유지하는 게 더 어려웠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툭툭 내뱉는 것 때문에, 이르커스는 주기적으로 내게 내 필멸자 시절을 캐물었다. 어려서도 궁금해하더니, 기억력은 또 어찌나 좋은지 아직도 내가 과거를 말해 주지 않았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
“당장 중요한 건 라단타다.”
아직 이르커스에게 이 세계는 사실 <이르커스의 서>라는 소설 설정이고, 넌 이 세계의 주인공이었노라고 진실을 공개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르커스가 나와 함께 영생을 살게 된 이상,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말해 주기는 할 테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준비되지 않은 대화 주제에서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냅다 말을 돌리는 거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아카데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실 라단타가 죽든 말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었지만, 라단타가 내가 빼돌린 총으로 애먼 아카데미 학생을 죽이는 건 문제였다. 책임 소재를 떠나서 그냥 기분이 나빴다.
“당신이 준 것들 말이야.”
이르커스가 성큼성큼 걸어 내 옆에 가까이 붙었다. 나름 앞서 걷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되찾으면 어디 숨겨 놓을까 봐. 아무도 못 찾게…… 자꾸 잃어버리니까.”
무슨 물건 챙겨 둘 거라는 소리를 저렇게 감금하겠다는 소리처럼 한담.
나는 손만 뻗어 이르커스의 금발을 마구잡이로 헝클어트렸다. 다음부터 안 잃어버리면 되지. 이런 부분에서는 역시, 이르커스도 아직 애였다.
????????????
아카데미 내부는 외부보다 더 소박했다. 강의실 책걸상이 일체형인 걸 보자마자 기사가 되겠다는 학생들한테 어떻게 저런 고행을 줄 수 있는지 마음이 심란해졌다.
“기사 되기도 전에 허리 디스크 오겠는데.”
“허리 디스크?”
“그런 게 있다. 애들 불쌍하니까, 라단타 제압하고 나면 책걸상이라도 바꿔 줘야지.”
나는 굽실거리며 이르커스를 맞이하는 아카데미 직원들을 눈대중으로 살폈다.
어디 혼자 횡령해서 호의호식하고 있는 인간은 없나 살펴본 건데, 안타깝게도 이 아카데미는 정말 가난하게 운영되는 모양이었다.
숨어들어도 왜 이런 데로 들어오고 난리야. 건물 박살 나서 사람 죽어도 복원도 잘 안 되고, 보상금도 못 받는 애들 천지인 곳이다.
친혈육인 마리아가 있으니 이곳으로 기어들어 왔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이해가 잘 안 갔다.
“마리아는?”
“없어. 아자젤 섀턴이라는 학생과 같이 교외로 외출했다는군.”
“방에는 가 봤어?”
“잠겨 있어. 학장이 기숙사 사감을 불러서 열쇠를 받아 오겠다는데, 마법으로 결계까지 쳐 놔서 열쇠로는 안 열릴 거야.”
“안에 라단타가 있을까?”
“글쎄. 너무 노골적으로 닫아 놓은 걸 보니, 다른 데 있을 것 같기는 해.”
앙헬의 마도구에 봉인당하기 전 한두 번 정도 마주쳤던 전 황비의 얼굴을 떠올려 봤다. 제대로 대면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전 황비의 인상은 내 기억 속에 흐릿하게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에리스 멜킨처럼 권력을 쥐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 하는 야심가 느낌은 확실히 아니었고, 그렇다고 테리즈나 에델라이드처럼 고집이 세 보이지도 않았다.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몰라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린 듯한 귀부인 이미지였는데. 남편이 좀 못마땅해도 참고 살아 주는 느낌의…… 거기까지 생각하다 생각을 멈췄다. 정확히 말하자면 생각할 겨를이 사라진 거였다.
이르커스가 바로 검을 들어, 날 조준해서 날아온 마탄을 쳐 냈기 때문이었다.
하마터면 내가 제작한 마탄에 내가 맞을 뻔했잖아. 마도구는 이래서 위험하다. 마나 흐름이 안 느껴지니까.
마탄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연히 얼굴 일부가 망가진 라단타가 총을 들고 우리를 향해 이죽거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기대와 달리 우리를 향해 아카데미 한복판에서 총을 갈긴 상대는 전 황비였다.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
????????????
라단타 본인은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지만, 그놈은 나름 인복이 좋았다.
아빠는 황제고, 엄마는 공녀 출신이라 자기 뒷배경에는 공작가가 있다. 조부는 마리아가 시퍼렇게 두 눈 뜨고 살아 있는데도 라단타만 챙기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라단타를 아꼈다.
앙헬은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니 논외로 치자. 원래 주변에 사람이 열 명 있으면 한 명 정도는 재앙이다.
아무튼, 라단타는 자기 편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결국 그렇게 박쥐처럼 왔다 갔다 하던 에킨도르도 선택지가 없어 그랬다곤 하지만 라단타의 편에 섰으니까.
“너한테는 늘…… 미안하구나.”
“무엇이 그리 미안하십니까?”
“내가 내 아들을 잘못 키운 것. 그게 가장 미안한 일이지.”
전 황비는 여전히 내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나 혼자 있었더라면 무력하게 내가 만든 마탄에 내가 맞는 불상사를 당했겠지만, 이르커스가 옆에 있으니 전 황비가 든 총은 무용지물이었다.
전 황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아직 영생을 살게 되었다는 게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이르커스와 다르게, 죽지 않는 게 확실한 나를 쏜 것부터가 노골적이었다. 저 총에 맞아도 나는 죽지 않을 테니, 기습이 아니라 위협이 목적이었겠지.
“이 아카데미와 마리아는 라단타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 네가 그걸 꼭 알아주었으면 좋겠구나.”
“…….”
“부탁 하나만 들어주겠니?”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끼쳤다. 익숙한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이 ‘부탁’들을 여러 번 경험했다. 예카리나도 테리즈도, 내게 이런 식으로 부탁했다.
나는 이르커스의 팔을 잡아당겼다. 죽기 직전의 사람이 남기는 마지막 부탁은 여러모로 골치였다. 거절하기도 어렵고, 대체로 부탁 내용도 힘든 것뿐이었다.
“내가 대신 죗값을 치를 테니, 라단타를 살려 주렴.”
이럴 줄 알았다.
나는 총을 자기 턱 아래에 가져다 대는 전 황비를 바라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인간은 언제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전 황비가 이런다고 라단타가 ‘엄마 고마워, 역시 우리 엄마뿐이야!’ 이러지 않을 텐데.
나도 누군가의 보호자로서 전 황비의 행동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다고 착잡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싫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는 소리보다 이르커스의 목소리가 더 빨랐다.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이르커스는 마법을 써, 마탄이 발포되는 걸 제어했다. 정교한 솜씨였다.
“어째서…….”
“라단타의 문제는 라단타의 것이지, 당신이 대신 해결해 줄 수 없으니까요.”
어우, 역시 내 예쁜 제자. 황제다운 발언이구나. 심각한 상황에서도 이르커스의 저 발언은 조금 기특했다. 녀석, 정말 다 컸네. 기특하다, 기특해.
전 황비가 총을 발포하려고 아무리 노력해 봐도 이르커스의 마법으로 제어가 걸린 마탄은 요지부동이었다. 망연자실한 표정의 전 황비가 총을 바닥으로 툭 떨어트렸다.
마법도, 검도 쓰지 못하는 전 황비에겐 에킨도르가 빼돌린 저 총이야말로 최적의 자살 도구였을 테다. 당신도 나처럼 피보호자를 두고 도망치고 싶어서 안달이 났겠지. 애를 잘못 키웠으니, 어떤 방식을 쓰든 간에 회피하고 싶었을 테니까.
“……그냥, 죽고 싶구나.”
총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전 황비의 뺨을 타고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내 자식이 죽는 꼴을, 내가 어떻게 살아서 지켜볼 수 있겠니…….”
저 말이 마탄보다 더 빠르게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이것조차 내게 익숙한 대사다. 나는 저 감정을 알고 있다. 내가 최근까지 가장 두려워했던 감정이었으니까.
“내가 아무리 잘못 키웠더라도, 나는 그 애를 사랑해.”
울면서 말하는 전 황비 때문에 점점 더 모든 게 명확해졌다. 나는 그 애를 사랑해. 나는 그 애를…….